소녀, 중학교 2학년, 1994년, 그리고 세상과의 단절.
쟤 또 잔다. 저런 애들은 공부도 못해서 나중에 우리 파출부 할거야.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
아빠 테니스 연습하는거야.
얼굴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우울하거나 자신이 싫어질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여. 아무것도 못할거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하... 버스를 늦게 타서 살았다...!
소녀, 중학교 2학년, 1994년, 그리고 세상과의 단절.
영화 벌새는 신예 김보라 감독의 무시무시한 첫 장편영화다. 한국의 소규모 예술 영화들이 그렇듯, 김보라 감독은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모두 해냈다. 1994년을 살아갔던 모든 대한민국의 소녀들에게 바치는 영화.
여중생 '은희(박지후)'는 별볼일 없는 평범한(?) 소녀다. 떡집을 운영하는 '아버지(정인기)'와 '어머니(이승연)', 그리고 '오빠(손상연 / 대훈 역)', '언니(박수연 / 수희 역)'의 틈 사이에서 물 흐르듯 살아간다. 부모님께 무언갈 원한적도 없었고 바라지도 않는다. 오직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정윤서 / 지완 역)'와 보내는 시간이 좋고 노트에 끄적대는 만화가 좋다. 절친인 '지숙(박서윤)' 과 함께 가는 콜라텍이 좋고 한문학원이 좋으며 후배들이 자신을 '날라리' 라고 여기면서 굽신대는 모습도 좋다.
집안의 모든 걸 오직 오빠에게만 집중하는 아빠와 엄마는, 언니를 대치동에서 고등학교도 진학 못하는 집안의 수치로, 막내인 은희는 거의 투명인간 취급하며 살아간다. 그 시절의 모든 부모들이 그랬듯, 남아선호사상과 가부장적인 틀에 얽매여, 아들 뒤에 태어난 딸들은 안중에도 없다.
은희가 그렇게 세상과 조금씩 맞물리며 살아갈 때, 새로온 한문학원 선생님인 '영지(김새벽)'를 만난다. 그녀는 자아가 조금씩 갖춰져가는 은희에게 큰 버팀목이자 등대같은 역할을 한다. 뭐든지 물어봐도 뭐든지 대답해 주고 은희가 은연중에 놓친 것들도 영지는 핵심을 잡아 꼬집어준다. 귀 밑에 혹이 생겨 병원에 며칠동안 입원을 하던 시기에도 지완은 연락조차 안됐었지만 영지는 병문안을 기꺼이 와주었다. 그런 영지에게 고마워서 은희는 집안에 먼지만 쌓아가고 있던 '적과 흑' 이라는 책을 선물로 건넨다. 그리고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터진다. 은희가 이어져 있던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그 거대한 사건은, 영화 속에 촘촘하게 박혀있던 1990년대의 디테일을 과감하게 부숴버리듯 정말이지 어느날 갑자기 이뤄진다. 분명히 TV속에 보이는 건 무너져서 중간이 끊긴 다리인데 거대한 벽이 눈앞에 솟구친 느낌이다.
영화 벌새는 그 시절을 살았던 모두에게 건네는 기록이자 아픈 기억이다. 성수대교 붕괴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 처럼 사용했지만 실제로 온 국민들에게 그런 사고였다. 그 당시 성수대교 참사에서 고인이 된 서른 두명의 사상자중 무학여고 학생들은 모두 여덞 명이었다. 8학군 고등학교 과열 현상으로 인해 한강 건너의 무학여고로 배정받은 여학생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던 인재를 영화에 적절하게 녹여낸 감독의 능력이 정말이지 탁월하다. 가슴속에 파고드는 '갑자기?' 라는 말을 애써 무시할 수 만은 없지만, 시대의 아픔으로 남아버린 치유되지 않는 국가적 흉터를 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견뎌내야 하는지 아주 잘 보여준다.
영화 벌새는 1990년대 중학생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따라가면서도 세상은 언제나 개인에게 무심하다는 사실을 조용히 읆조린다. 은희는 영화 전-후반 내내 이렇다할 큰 사건없이 중학교 2학년을 지나지만 성수대교 붕괴 후에 세상이 뒤집어져 버린다. 은희의 아빠는 '운이 좋았다' 며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은희는 유일하게 기댈 곳이었던 따뜻한 품을 잃어버린다.
영화 벌새에서 누가 뭐래도 가장 값진 역할을 하는 건 영지다.
매우 건조하고 담백한 어투로 은희에게 항상 따스함을 전해주는 한문선생님의 존재는 부모도, 절친도, 언니 오빠도, 심지어 남자친구도 절대 줄 수 없는 무언가를 남긴다. 은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멘토' 같은 역할이자 기댈 곳 하나 없는 무미건조한 여중생의 삶에서 한줄기 등불같은 캐릭터다. 영지역을 맡은 김새벽의 모노톤 같은 연기와 목소리, 그리고 대사는 은희에게는 차갑고 밍밍한 시대였지만 그럼에도 사람에게 희망을 걸어봐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을 관객에게 건네준다.
영화 벌새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1994년을 이야기했지만 25년이 지난 지금은, 개개인에 심각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는 나머지 더욱 황폐하고 냉랭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에게 기대며 살아야 한다. 김보라 감독이 벌새 한 편으로 굉장하고 소중한 존재가 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
영화에 나왔던 1990년대의 상징물들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완벽하게 복원되어 등장한다. 삐삐(1004 486 486), 노란색 베네통 가방, 감자전, 우롱차, 장미꽃 한 송이, 다이어리, 콜라텍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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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예술영화의 승자(?)는 바로 설혜인이 아닐까.
무려 벌새와 '우리집(2019)' 에 모두 출연했다(우리집은 우정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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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벌새의 포스터를 분명 봤지만 뒤에 있던 성수대교는 보지 못해서, 성수대교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벌새를 봤기 때문에 영화적 충격이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