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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Sep 27. 2016

지구영웅전설

박민규

훗날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을 무렵,
그날의 일에 대해 슈퍼맨은 그렇게 얘기했다. 나 역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역시나 훗날에 알게 된 일이지만,
평범한 인간이 인생에서 영웅을 만날 확률은
사냥을 나선 에스키모가 말레이 맥과 마주칠 확률보다 희박한 것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대부분의 인류는 그렇게 살아간다. 영웅은 만화에나 등장하는 가상의 존재라고 믿으며,
섹스나 지구멸망설 따위에 가슴을 설레며,
예를 들자면
저 따분한 알리와 이노키의 대결에나 열을 올린다거나,
거참 맥이라는 동물이 다 있었네, 라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당신이 깜짝 놀라거나 말거나,
지구는
멸망하지 않는다.

-중략-

어쩌면 로빈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얘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로빈을 통해 나는 필요 이상의 꿈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바로
로빈이 그랬다. 배트맨을 만났기 때문에 난 영웅이 될 수 있었던거야.
그 엄청난 장비들이 없다면 난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아.
로빈의 말은 사실이었고,
나 역시 슈퍼맨을 만난 평범한 인간이었다. 나 역시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꿈도꾸지 마."

슈퍼맨은 한마디로 나의 얘기를 일축했다.
"넌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야." 슈퍼맨이 얘기했다.
"그럼 미국인이 될 테야." 내가 소리쳤다.
"소용없어." 다시 슈퍼맨이 말을 이었다.
"그런다 해도 넌 백인이 아니니까."

-중략-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운명이었다. 1979년의 그날 내가 자살을 결심한 것도, 슈퍼맨이 마침 한국의 상공을 날고 있었던 것도,
그가 날 구해준 것도, 내가 정의의 본부에 들어오게 된 것도, 내가 영웅들의 친구가 된 것도,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내가 바나나맨이 된 것도.......
물론 진정한 영웅이 되기 위해선 수많은 시련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한시도 바나나맨이 되기 위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는 배트맨의 조언에 따라 '신체개발 5개년 계획' 을 수립해 신체개발에 힘썼고,
슈퍼맨의 조언에 따라 남미의 'School of America' 에 입학, 강도높은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닥터 윌슨으로부터 영웅이 반드시 알아야할 철학과 과학의 사고체계를 습득하고,
DC코믹스의 크리에이터들이 지시하는 바나나맨으로서의 일거수일투족을 섬세하게 마스터 했다.
그 모든 과정을 끝냈을 때 슈퍼맨은 나에게 영웅의 칭호와 함께 정식 시민권을 수여해주었다.

"축하해, 이제 자넨 영웅이야." 슈퍼맨이 얘기했다.
"이게 현실일까?" 내가 소리쳤다.
"물론." 다시 슈퍼맨이 말을 이었다.
"너의 영혼은 백인이니까."

-중략-

안녕하세요, 슈퍼맨.
바나나맨입니다. 깜짝 놀라셨죠? 바로 저랍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아니, 건강하신지요. 아니 물론,
당신이 아프거나 못 지냈을 리 만무하지만, 아무튼 저는........
그렇게 묻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도무지 어떤 안부도 지구 최강의 사나이와는 어울리지 않아,
이미 서두에서부터 진땀을 흘리는 중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안부란 것은,
약하고 평범한 인간들끼리 주고받는 일종의 위로가 아닐까, 란 생각이, 당신께 보내는 편지를 시작하면서 강하게 드는
새벽입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중략-

이곳은 (실은 쓸 얘기도 없습니다만) 최악입니다. IMF 의 위기를 넘겼다고는 하지만,
실은 꾸역꾸역 살아야 할 시간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물론 저는 예외입니다.
어떤 상황이 닥친다 해도 그렇습니다.
저에겐 '잉글리쉬' 가 있으니까요.
덕분에 몸은 고달프지만, 생활은 비교적 안정적인 편입니다.
그만큼 이곳은 영어를 배우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또
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들 굳게 믿고 있기 때문 입니다.
실은 돈이 좀 모이는 대로, 아내와 함께 유학안내를 겸한 이민알선사무소를 열 계획도 세워두었습니다.
기회만 오면 미국을 다녀오겠다고, 여건만 되면 미국에서 살고 싶다고, 모두가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바나나 이민투자주식회사'
어떻습니까?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곳은,
그런 세계화를 향한, 거대한 열기와 에너지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열심히 영어를 공부하는 어린이들과,
모든 문화의 흐름, 또 안보의 체계랄까 그런 문제들과,
나스닥에 틀림없이 연동하는 주식시장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그랜드 에리어의 한복판에 내가 서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입니다.

-중략-

신선한 충격이었다.
황인종? 언뜻 떠오른 것이 토드 맥팔렌의 스폰이었다.
별다른 거 있어? 스폰은 오직 흑인 영웅이란 이유 하나로 스타덤에 올라버렸다.
그전까지, 도대체 어떤 크리에이터가 유색 인종을 영웅으로 만들 생각을 했겠는가?
미국에 사는 흑인들의 숫자가 얼마? 셀 수도 없지? 즉
모든 성공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인터넷 검색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뭐야, 
숫자로는 지구에서 가장 많은 인종이라고?








아마도 세번째 읽게되는 박민규씨의 장편소설.
그의 시점에서 보자면 이 책이 첫번째 장편소설이 아닌지 모르겠다.

각설하고,

관심 없는 사람도 '슈퍼맨' 덕에 "아, 그랬어?" 하고 대충 알겠다는 시늉을 하게되는 미국의 히어로만화 주인공들을 빌려,
미국이 전 세계에 뻗치고 있는 영향력을 유쾌하게 되 씹는 소설.

그 안에 어린시절, 살색책을 보다 담임선생님께 걸려, 부모님을 모셔오라는 말에, 자살을 결심하게 되어,
옥상에서 뛰어내리다 우연찮게도 슈퍼맨에게 구해져, 그 길로 히어로들의 '본부' 에 가, '바나나맨' 이 되어버린,
'나' 의 이야기가,
있다.

겉은 노란색(황인종)이지만 속은 하얀(백인종).. '바나나맨' 의 이야기...

여하튼.
다음은 핑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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