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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Sep 27. 2016

빛의 제국

김영하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매력이 문제야. 위성곤씨한테 매력이 철철 넘쳤다면 포르노를 보는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야.
매력만 있다면 사람들은 뭐든 용서하려고 들지. 좀 부도덕해도, 말을 뒤집어도, 사악한 짓을 해도,
다 이해하려고 한단 말이야. 그러나 이런 후진 회사에 다니는 대머리 아저씨가 포르노를 보는 건 용서할 수 없는 거야."

-중략-

그러나 지금의 남한은 팔십년대의 남한과 비슷한 점이 거의 없는, 사실상 완전히 새로운 나라였고, 당연히 북한과도 전혀 다른
종류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북한보다는 싱가포르나 프랑스에 가까울지 몰랐다.
결혼한 부부들은 아이를 낳지 않고, 일 인당 국민소득은 이만 달러에 육박하고, 은행과 대기업의 운명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매년 수십만 명의 외국인이 결혼과 취업을 위해 입국하고, 영어권 국가에서 공부하려는 초등학생들이 날마다 인천공항을 떠난다.
부산에서는 러시아제 권총이 팔리고, 인터넷으로 섹스 파트너를 찾고, 휴대폰으로 동계올림픽의 생중계를 보고,
페덱스가 샌프란시스코 산 엑스터시를 운반하고, 온 국민의 반 이상이 적립식 펀드에 투자하는 사회였다.
최고 지도자는 풍자를 감당할 카리스마도 없는 한갓 비아냥의 대상일 뿐이었고,
노동자계급을 대표한다는 정당이 해방 이후 최초로 의회에 진출했다.
만약 기영이 남파되었던 1984년에 누군가 이십 년 후 남한이 이런 사회로 변모하리라 예상했다면 아마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었을 것이었다.

-중략-

기영이 동의하자 소지는 이어서 계속 말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 소설에는 그런 부분이 빠져 있는지 모르겠어. 집을 사수하는 남자의 이야기 말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집과 가정을 강탈당하면서 사는데. 이를테면 요즘 같은 신용불량의 시대에
수많은 남자들이 얼마 안되는 빚 때문에 평생을 걸고 장만한 집이 남에게 넘어가는걸 그냥 지켜보고만 있잖아.
왜 아무도 무기를 들지 않지?
왜 농성을 하거나 분신자살을 하지 않는 거지?
우리 대학 시절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고문당했다고 궐기를 했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이 시대의 중핵이 되어 살고 있는데, 왜 자기 집을 사채업자나 은행에 빼앗기면서도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을까?"

-중략-

그는 오래 살고 싶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오래 살아서 뭘 할 건가? 그는 답한다. 오래 사는 것.
그것 자체가 목적이다. 누군가는 카사노바를 꿈꾸고 또 누군가는 나폴레옹이 되기를 바란다.
또 누군가는 히말라야의 팔천 미터급 고봉을 모두 정복하길 원하고 다른 누군가는 걸어서 세계일주를 하고자 하고
어떤 누군가는 백 미터 달리기의 세계기록을 수립하고자 한다. 그런데 나는 그저 그 누구보다도 오래 살기를 바랄 뿐이다.
오래 살아서, 출세를 뽐내던 자들과 수많은 여자를 섭렵하며 군림하던 자들이 맥없이 죽어가는 것을 보리라.
우리는 똑같은 티켓을 받고 지구라는 극장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더 많은 것을 보고 가기를 원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중략-

"진국아, 나, 괜찮아. 우리 가서 사진 보자."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따라 소파로 갔다. 둘은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 천천히 사진을 보았다.
그의 어렸을 때의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백일사진에서 그는 고추를 내놓고 헤벌레 웃고 있었다.
그러나 돌사진에서는 조금 놀란 듯한 모습으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사진첩 속에서 그는 아주 빨리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흰 스타킹을 신고 유치원에 들어갔다가 금새
유니폼을 입은 보이스카우트가 되었다. 엄마 품에 안겨 회전목마를 타던 어린아이가 어느새
학원버스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엄마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런 일이 과연 자신의 인생에 닥쳐올까, 따위를 생각했다.
끔찍하기만 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키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아까처럼,
끔찍했던 어떤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것,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 혹시
그런게 인생이 아닐까.

















이 책은 하나의 커다란 줄기를 뻗어 내어 버린 다음 무수히 많은 잔가지들을 빽빽히 나열해 놓은것 같은 책이다.

한가지를
툭,
던져버리고 나서
주루루룩- 써 내려가고 또 다른 이야기, 또 또 다른 이야기..
주인공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의 외동딸, 주인공을 쫓는 국가 기밀 요원 들의 이야기를
교차편집하여 나열해 놓은 한편의 영화같은 이야기 이다.

꽤나 이것저것 흥미거리를 나열해 놓아서 잘 읽힌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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