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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Sep 28. 2016

최후의 날 그 후

아서 c. 클라크 외

로버트 셰클리 - 세상을 파는 가게
노먼 스핀래드 - 거대한 섬광
워드 무어 - 현대판 롯
존 윈덤 - 바퀴
J. G. 밸러드 - 터미널 해변
폴 앤더슨 - 내일의 아이들
로버트 애버나시 - 누가 상속자인가
스티븐 베네 - 바빌론의 물가에서
레이 브래드버리 - 부드러운 비가 올 거야, 시카고 어비스 역으로
로저 젤라즈니 - 루시퍼
윌리엄 텐 - 동쪽으로 출발!
마이클 스완익 - 성 재니스의 향연
아서 C. 클라크 - 그대를 어찌 잊으리, 오 지구여...
할란 엘리슨 - 소년과 개





톰킨스는 말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앵무새도 그를 따라 미소를 짓는것 같았다.
"그 다음엔요?"
"몸에서 해방된 정신이 셀 수 없이 많은 세계들 중 하나를 고르게 되지. 그 모든 세계는 순간순간 만들어지는 거고."
톰킨스가 빙그레 웃더니 이내 흔들의자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펴고 열을 내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요, 선생. 의심할 바 없이 이 지구는 태양의 불타는 자궁에서 태어난 이래 수많은 대체세계들을 만들어왔소. 크고 작은 사건들로부터 갈라져나간 끝없는 세계들이지. 마치 연못에 던진 돌이 파문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거요. 그 각각의 세계에서는 각각의 알렌산더 대왕과 각각의 아메바가 제각기 세계를 만들지. 그림자 없는 물체는 있을 수 없소. 그렇죠? 그렇다면 선생. 지구는 4차원이니까 스스로를 완벽하게 반영한 3차원적 그림자를 존재하는 매 순간 드리운다고 볼 수 있소. 수백만 개의 지구, 무한한 지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말이오! 내가 해방 시켜준 선생의 정신은 그 세계 어떤 것이라도 골라서 거기서 일정 기간 살 수 있다는 얘기요."

(중략)

"성공한다면 굉장한 일이겠군요." 웨인이 공손하게 말했다.
"물론이오!" 톰킨스가 깜짝 놀랄 만큼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그땐 이 초라한 가게를 탈출구로 만들 거요! 대가도 받지 않을 거고. 누구에게나 공짜지.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쥐와 벌레가 득실거리는 이 지구를 떠나서 자기 욕망이 충족되는 지구, 자기한테 꼭 맞는 지구로 갈 수 있소."

-세상을 파는 가게


휘파람이 절로 새나왔다. 마침내 민간인들도 제정신을 차린 건가? 드디어 군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건가?
"조건이란 건.......?"
"여론이오" 차관이 말했다. "여론이 극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대통령이 전술핵무기 사용을 허가했을 당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78퍼센트가 전술핵무기 사용에 반대했습니다. 찬성은 9.8퍼센트였고 나머지는 대답을 보류했더나 '모르겠다'라고 답했죠. 대통령은 전술핵무기 사용을 허가하면서 시기를 미리 잡았어요. 그때부터 몇달 후라는 건데 그 날짜는 아직도 극비요. 다만 그날까지 전술핵무기 사용에 적어도 인구의 65퍼센트가 찬성할 것, 반대의견은 20퍼센트를 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을 단 겁니다."
"그렇군요...... 합동참모회의를 입 다물게 하려는 책략이로군요."
"..........카슨 장군, 지금 나라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말 모르고 있는 거요? 첫 번째 포 호스멘 쇼가 방영되고 나서 전술핵무기 사용 찬성론자가 25퍼센트로 늘어났어요. 두 번째 쇼 다음에는 41퍼센트가 됐지. 지금은 48퍼센트요. 반대하는 사람은 32퍼센트로 줄어들었고."
"겨우 록그룹이 그런 일을 해냈다는 겁니까?"

-거대한 섬광


"나 배고파." 웬델이 칭얼거렸다.
몰리가 지르에게 샌드위치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문명의 혜택, 이를테면 빵이나 마요네즈, 손질된 고기 같은 것들 없이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지몬 씨는 우울해졌다. 이제부터는 토끼, 다람쥐, 조개, 물고기 따위로 연명해야 하는 것이다. 웬델은 배가 고프면 자기가 먹을 건 자기가 구해야 하는 거고. 자급자족. 고되고 거친 삶.

(중략)

승리감에 도취되어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는 이내 어떻게 삶을 꾸려나갈 것인지 잡다한 생각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그는 짐을 꾸릴 때 일부러 문명과 비문명, 도시생활과 유랑생활을 이어주는 물건들을 제외했다. 즉 천막도, 통조림도, 침낭도, 등불도, 양초도, 그리고 기타 야영하는 데 필요한 어떤 물건도 챙기지 않았다. 대신 무기와 더불어 <무인도에서 살기> 책자에 실린 목록의 물품들로 짐 꾸러미를 채웠다. 갖가지 연장과 도구, 총알과 탄창, 낚시 장비와 인공 미끼, 그물, 부싯돌, 각종 씨앗, 덫, 바늘과 실, 쇠줄, 못, 간단한 의약품 따위였다. 그 밖에 정부가 발행한 소책자들도 있었는데 생가죽을 무두질하는 법, 먹을 수 있는 식물의 씨와 독버섯을 구별하는 법 등이 적힌 것이었다. 아, 망원경도 하나 있었다. 침입자가 있나 살필 수 있도록. 커피나 설탕, 밀가루는 물론 없었다. 이제 우리는 옛날부터 전해져왔지만 지금은 반쯤 잊고 살아온 인간의 교활함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생존해야 하는 것이다.

-현대판 롯


그의 머릿속에 '서구의 몰락(독일의 역사철학자 오스발트 슈펭클러의 저서)'이란 말이 떠올랐다. '슈펭글러는 난숙한 문명은 멸망한다고 예견했지. 하지만 방사능 낙진을 수반하는 원자탄은 내다보지 못했어. 세큔폭탄도, 화학폭탄도, 스스로는 느끼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 폭탄들이 하늘을 괴물 날벌레처럼 날아다니는 것도. 결국 멸망의 규모를 예측하지 못했던 거야."

(중략)

"앉게 드러먼드 대령." 로빈슨 장군이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드러먼드는 몸이 떨리는 걸 느끼면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뭔가에 홀린 듯한 그의 눈이 사무실을 이리저리 살폈다. 전쟁 전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그와 비슷하게 꾸며져 있었다.
전쟁 전이라!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난폭한 살의로 역사를 난도질하고, 과거의 모든 것을 파괴한 끝에 떠도는 검은 구름을 뚫고 희미하게 금빛으로 빛나는 칼 같은 단어. 그러나 전쟁 전이라고 해봤자 불과 2년 전이었다. 겨우 2년 전! 물론 제정신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이 뒤집힌 악몽 같은 세계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는 바버라와 아이들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가족의 얼굴조차 물밀듯 밀려드는 다른 얼굴들, 굶주린 얼굴, 죽은 얼굴, 궁핍과 고통과 증오로 짐승처럼 변해버린 인간의 얼굴들에 가려 알아볼 수 없었다. 그의 슬픔은 세계가 받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가 돼버렸다.

(중략)

"다른 행성으로 이민 가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렇지? 그래, 안 될 거야. 조직도 물자도 부족해." 로빈슨 장군이 자문자답했다. "죽으나 사나 지구에 매달릴 수밖에 없군. 몇 군데라도 안전한 장소를 찾아서, 여기 말고도 안전한 곳들이 틀림없이 있을 거야. 진정한 인간의 주거지역을 만들어서 거기서 사는 거야. 돌연변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말이야. 그럼, 우린 할 수 있어."
"안전한 장소 같은 건 없다니까요." 드러먼드가 참을성 있게 되풀이 했다. "혹시 있다고 해도 돌연변이가 수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많을 건 틀림없다구요. 유전학자가 그렇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생물학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던가요?"
"잘 모르던데. 유전학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매우 많다더군.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논리적인 추측이 고작이라는 거야."
"흐음, 그렇군요. 어쨌거나 당명 문제는 돌연변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또 생김새가 어떻든 상관없이 누구라도 지구인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아울러 어떤 문제든 폭력을 쓰거나 그냥 덮어두는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모든 사람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문화를 건설하는 것도 중요하구요. 생각하면 참 묘하죠?" 드러먼드가 말을 이었다. "관용이라든지 동정심, 관대함 같은 비실용적 덕목들이 생존을 위한 필수라는 사실 말입니다. 짐작컨대 그건 언제나 진실이었을 텐지만 정작 우리가 그 간단한 진실을 깨달은 건 인류의 반이 죽고, 하나의 생물학적 연대가 종언을 고하고 난 뒤 아닙니까? 무서운 일이죠. 우린 50만 년 동안이나 야만과 탐욕, 미신과 편견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거기서 벗어난 것은 몇 세대 안 됩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이제 인류는 그대로 끝입니다. 그래도 잘하든 못하든 시도는 해봐야죠."

(중략)

"그래도 진정한 인간은 어느 정도는 계속 존재할 거라고 유전학자가 그러던데."
"있어도 수소겠죠. 결국은 방사능도 농도가 옅어지고 방사성 동위원소들은 반감기를 거쳐 스스로 소멸할 테니까요. 하지만 의미 있을 만큼 줄어드는 데는 50년이나 100년은 걸릴 겁니다. 그때쯤 되면 순수한 인간이라는 건 아주 적은 소수종이 되겠죠. 그리고 그때까지도 짝을 못찾아 발현되기만 기다리는 열성인자들은 여전히 남아 있겠죠."
"자네가 맞네. 우린 과학이라는 걸 발명하지 말았어야 했어. 과학이 인류의 종말을 초래한 것 아닌가."
"그렇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 인류는 과학을 오용함으로써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선 겁니다. 어쨌거나 우리 문화는 과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근본적인 심리 측면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우린 이제 그것까지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길고 어려운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겠죠."

-내일의 아이들


주위는 온통 평원이었다. 봄날의 저물어가는 황혼 속에서 평원은 끝간 데 없이 광막했다. 몇 개월을 걸어 수천 킬로미터를 간다면 불안하긴 해도 그나마 안전을 확보할 수 있고, 새로 시작할 수도 있는 그런 곳에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인간은 한때 시간과 공간을 정복했지만, 이제는 거꾸로 시간과 공간에 농락당하는 세상에서 다시 희귀동물이 돼버렸다. 스미스는 궁금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이 다시 시간과 공간을 정복할 수 있을까? 혹은 내 손자 대에는?

-누가 상속자인가


그들이 행복했느냐고? 신들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위대하고 강력했다. 또 경이로운 동시에 끔찍했다. 그들과 그들의 마법을 내려다 보고 있는 동안 나는 그저 감탄하기 바쁜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늘에서 달이라도 끌어내릴 것만 같았다. 나는 지혜를 넘어선 지혜로, 지식을 넘어선 지식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룬 것이 모두 잘된 것은 아니었다. 나조차도 그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지혜는 모든 것이 평온해질 때까지 멈추지 않고 부풀어오르기만 했다.
그때 그들의 운명이 그들을 덮치는 게 보였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그것은 그들이 도시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머리 위로 들이닥쳤다. 나는 숲 사람들과의 전투에 참여한 적이 있어서 사람이 죽는 것을 적지 않게 목격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것과 달랐다. 신들 간의 전쟁에서 사용된 무기는 완전히 미지의 것이었다. 하늘에서 부링 쏟아져 내리고 독이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대화재와 파멸의 시기였다. 그들은 개미처럼 도시를 헤맸다. 불쌍하구나, 신들이여! 애처롭구나, 신들이여! 그 순간 탑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도망친 자는 전설이 전해주듯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아주 소수. 그러나 도시가 죽음의 땅으로 변한 뒤에도 오랜 세월 동안 독은 지상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신들이 결국 죽음을 맞는 것을 보았다. 폐허가 된 도시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는 울었다.

-바빌론의 물가에서


"10시." 비가 그치고 태양이 떠올랐다. 돌더미와 재만 남은 도시에서 이 집만 유일하게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밤이 되면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보이는 방사능만 남은 폐허가 된 도시에서.
"10시 15분." 정원의 살수기가 빙글빙글 돌며 활금색 물줄기는 뿜어냈다. 물방울에 반사된 빛이 온화한 아침 공기를 휘황하게 물들였다. 물줄기는 창틀에도 튀어 까맣게 탄 서쪽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집의 서쪽 바깥 벽면은 본래의 흰색 페인트칠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타버렸지만 다섯 군데 예외가 있었다.
실루엣, 혹은 사진의 필름처럼 남은, 잔디를 깎고 있는 남자와 꽃을 꺽으려고 몸을 숙인 여자, 그들과 좀 떨어져서 하늘로 두 팔을 활짝 벌린 소년과 그 위에 떠 있는 공, 그리고 소년과 마주보며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공을 잡으려고 손을 뻗은 소녀의 이미지가 각인된 곳이었다.
이 5개의 자국을 뺀 벽의 나머지 부분에는 모두 얇은 숯이 켜를 지어 덮여 있었다.

-부드러운 비가 올거야


천막 안은 어두침침했지만 조명은 제리가 놀라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비싼 것, 석유램프였다! 그것도 세 개씩이나 있었다! 과연 풍족하게 사는 사람들이라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최후의 전쟁으로 세계가 산산조각 나기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제리 같은 백인들은 수많은 석유램프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했다. 아니, 밤에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기술자들이 이야기해준 전설에 따르면 석유램프보다 훨씬 좋은 것들도 있었다. 듣고 있으면 즐겁지만 먼 과거의 영광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들. 그중에는 곡식이 흘러넘치는 창고며 온갖 물건이 가득 쌓인 슈퍼마켓 같은 것들도 있었다고 한다. 동족의 역사에 자부심을 갖게 해주지만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들. 듣고 있노라면 입에 군침이 돌지만 막상 잎에 넣어주는 건 아무것도 없는 이야기들.

-동쪽으로 출발!

"미국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지만 대붕괴는 전 세계적인 재앙이었죠." 울프는 아프리카 기업들의 존재기반이 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좋을지 잠시 망설였지만 디스테파노가 모른다면 굳이 설명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만큼 아직 문제가 많습니다. 아프리카의 경우 출산율이 그런 범주에 들어갑니다." '이게 다 미국 때문이야. 미국이 수출한 독 때문이라구. 화학물질에 살충제,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독에 찌든 식품까지.' 울프의 머릿속에 불쑥 떠오른 생각이었다.

-성 재니스의 향연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우주의 심연을 건너 그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그 빛나는 구체에는 그가 전혀 겪어보지 못한 경이로움이 있었다. 황혼에 물든 하늘의 색조, 자갈 해안에 부딪히는 바다의 신음,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급할 것 없다는 듯 너울너울 뿌려지는 눈의 축복. 이 모든 것과 그 밖에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그가 온전히 물려받았어야 마땅한 유산이었다. 그러나 마빈은 오직 책과 오래된 기록에 의해서만 그것들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망명자가 느끼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왜 돌아갈 수 없는 거지? 흘러가는 구름 아래는 저토록 평화스러워 보이는데. 그때 구체의 휘황한 빛에서 풀려난 마빈의 눈에 또 다른 게 보였다. 당연히 어두워야 할 구체의 검은 부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사악한 인광(燐光)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게 바로 세계를 화장(火葬)하는 장례식의 불길이라는 것을. 아마겟돈 이후 여전히 타오르는 방사능의 불꽃이라는 것을. 25만 마일이나 떨어져 있어도 선연히 보이는, 죽어가는 워자들이 내뿜는 불빛은 파괴로 점철된 과거를 영원히 각인시키는 표상이었다. 그 죽음의 불이 마침내 꺼지고, 생명이 되살아나 정적만 남은 텅 빈 세계를 다시 채울 때까지는 몇백 년은 족히 걸릴 터였다.

-그대를 어찌 잊으리, 오 지구여.....


그렇지만 빌어먹을, 그녀는 너무 예뻤다.
그녀는 토라져서 팔짱을 끼고 물러앉았다. "다운언더 얘기나 해봐." 내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 옛날 미국과 캐나다였던 지역에는 현재 다운언더가 200개 정도밖에 없었다. 과거 우물이나 광산, 혹은 깊은 구덩이가 있던 곳이었다. 서부에는 자연동굴을 이용한 다운언더도 일부 있었다. 다운언더 주민들은 땅 속으로 3~8킬로미터를 더 파고 들어가 주거지역을 만들었다. 전체적인 모양은 거꾸로 선 깔때기와 비슷했다. 그리고 거기 정착한 주민들은 최악의 인간, 즉 구제할 길 없이 꽉 막힌 인간들이었다. 남부 침례교인, 근본주의자, 법과 질서 신봉자, 진짜 중산층등 한마디로 거친 삶과는 아예 담을 쌓은 부류였다. 그들이 지하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지난 150년 동안 지상에서는 찾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과학자들을 데려가서 지하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발명케 한 뒤 추방해버렸다. 주민들은 그 이상의 발전이나 체제비판은 물론 새로운 물결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차단했다. 그들은 그걸로 만족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황금시대는 1차 세계대전 직전이었으며, 그 시대의 삶을 재현해 살아가는 한 언제까지든 지하에서 조용히 살아가려 했다. 제기랄, 나보고 거기서 살라면 미쳐버리기 딱 좋았다.

-소년과 개















어쩌다 이 책을 고르게 된건지는 벌써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질 않지만
분명히 제목만 보고 충동적으로 골랐던건 아니었을 거다.
제목이 주는 의미심장함에 비해 주로 과학적인 단어들이나 문체들이 열거되어 있어서 읽는데 굉장히 오래걸렸다.
그만큼 생경한 이야기들이나 내용들, 특히 '고전'으로 불려도 될만큼 소설의 출생년도가 오래된 탓에 
작품이 쓰여졌던 때의 시대적 배경이라던지 미국에 있는 고유지명 이름들이 책을 읽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주 내용들은 메가워(핵전쟁, 3차 세계대전, 아마겟돈-인류 최후의 전쟁-)가 발발한 이후나 그 전, 
혹은 먼 미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약물로 인한 정신착란증세로 과거 평화로웠던 시대를 그리워하는 '세상을 파는 가게', 
일개 록그룹이 핵무기를 발사케 한다는 다소 엉뚱하지만 이 책에 실린 작품들 중 나름대로 드라마틱한 전개가 돋보이는 '거대한 섬광', 
핵이 폭발하던 당일, 가족들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는 한 가정의 침착한 가장의 이야기를 그린 '현대판 롯', 
과학기술 자체가 '악마'로 대접받는 시대가 올거라는 '바퀴', 
14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어렵고 모호했던 '터미널 해변', 
핵전쟁 이후 그놈의 방사능 낙진 덕분에 겨우 살아남은 인류는 돌연변이 밖에 출산하지 못한다는 비극적인 미래를 보여주는 '내일의 아이들', 
전 세계가 폐허가 된 뒤에 살아남은 마지막 공산주의자와 마지막 미국인 기업가와의 이야기를 다룬 '누가 상속자인가', 
문명이 소실된 뒤에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신처럼 떠받는다는, 다소 슬프지만 영화같은 '바빌론의 물가에서', 
인류가 사라지고 남긴 물건들이 자신들을 사용해주던 인간들을 그리워 한다는 내용의 '부드러운 비가 올거야', 
그와 반대로 인류만 살아남고 물건들은 죄 다 사라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게 해주는 '시카고 어비스 역으로', 
핵전쟁 이후에 발전소를 들락거리며 일말의 희망으로 발전기를 돌리려 애쓰는 발전기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루시퍼', 
지금으로썬 상상하기 힘든, 핵전쟁 이후엔 신분의 격차가 뒤집혀, 
백인들이 인류중 가장 최하위의 계급이 될거라는 상상을 풀어놓은 '동쪽으로 출발!', 
옛날 블루스 가수(재니스 조플린)를 환생 시킨듯 하지만 핵전쟁 이후 급격히 저조된 출생율을 높이고자 
정부가 배후에서 그녀를 꼭두각시처럼 쓰고 버린다는 이야기를 담은 '성 재니스의 향연', 
짧지만 의미심장한 문체들로 꽉 차 있는, 
지구가 사라지는 모습을 먼 우주 발치에 서서 그저 지켜만 봐야하는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들을 그린 '그대를 어찌 잊으리, 오 지구여...', 
소년활극마냥 신나게 그렸지만 알고보면 총기난사사건 이후 작가가 분개해서 발표했다는 '소년과 개'.


총 14편의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재미있던 건 '세상을 파는 가게' 가 아니었나 싶다.
꽤 짧은 단편이지만 왠지 모르게 필립 k 딕의 소설들과 동질의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그 뒤로는 '그대를 어찌 잊으리, 오 지구여...', '현대판 롯', '소년과 개' 정도가 볼만했다.

거의 모든 작품이 황량한 느낌이거나 마음이 가라앉게되는, 씁쓸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만큼 핵무기라는 불필요한 무기따위에 놀아나는 모든 세계정부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핵같은거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고? 핵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내가 봤을때 인류는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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