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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Sep 28. 2016

신 [제 2부 : 신들의 숨결]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구의 역사를 일주일이라는 시간으로 환치하면, 하루는 대략 6억 6천만년에 해당한다. 우리의 역사가 월요일 0시에 지구가 단단한 구체로 출현하면서 시작된다고 가정해 보자. 월요일과 화요일과 수요일 오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수요일 정오가 되면 생명이 박테리아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목요일에서 일요일 오전까지 박테리아가 증식하고 새로운 생명 형태로 발전한다. 일요일 오후 4시쯤에는 공룡이 나타났다가 다섯 시간 뒤에 사라진다. 더 작고 연약한 생명 형태들은 무질서한 방식으로 퍼져 나가다가 사라진다. 약간의 종만이 우연히 자연재해에서 살아남는다.
일요일 자정 3분 전에 인류가 출현하고, 자정 15초 전에 최초의 도시들이 생겨난다. 자정 40분의 1초 전, 인류는 최초의 핵폭탄을 투하하고 달에 첫발을 내디딘다. 우리는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우리가 <의식을 가진 새로운 동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한순간 전의 일일 뿐이다.


(중략)


「인간 역사의 흐름은 때로 나선을 타고 올라가는 것과 같은 형태로 나타납니다. 자꾸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언제나 조금 더 높이 올라가 있죠. 실패란 올라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입니다.」


(중략)


「1호 지구에 살 때 보았던 동물 다큐멘터리가 생각나. 커다란 맹수가 영양을 추격하다가 붙잡으면 그때부터 고속도 촬영으로 찍은 슬로 모션이 나오지.」

내가 라울의 술잔에 술을 따르려고 하자 그는 손사래를 친다.

「그게 문명의 몰락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나는 그런 장면을 어떻게 찍는지 늘 궁금했어. 그런 경우에 영양은 맹수를 따돌리고 무사히 달아나기 십상이야. 그런데 그런 장면을 잘도 찍어. 어떻게 하는 걸까? 너한테 묻는 거야.」

「모르겠어.」

「사실은 모든 게 연출이야. 그런 장면을 고속도 촬영으로 찍기 위해서 일부러 마련해 놓은 구역이 있어. 배우 노릇을 할 동물들도 미리 준비해 놓지. 영양에게는 마취제를 주사해. 촬영이 시작될 때쯤에야 겨우 마취가 풀리도록 말이야. 맹수는 전날 잡아다 놓고 하루를 굶겨. 굶주리지 않으면 영양을 추격하지 않거든.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동물들을 촬영 구역으로 들여보내는 거야. 이 구역은 세모꼴로 되어 있고 주위가 막혀 있어서 영양은 오직 한 길로 달아날 수 밖에 없어. 사자를 풀어놓을 때는 빛이며 구도가 딱 좋은 지점에서 영양을 잡도록 타이밍을 조절해. 그런 식으로 완벽하게 연출된 장면을 찍는 건 쉬운 일이야. 고속도 촬영에도 아무 문제가 없고, 역광을 걱정할 필요도 없어. 대신 제작비가 적잖이 들겠지. 그 모든 것을 준비해 준 사람들에게 돈을 줘야 할 테니까 말이야.」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문제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왜 그런 것을 찍느냐는 거야. 사자가 영양을 잡아먹는 장면을 슬로 모션으로 아주 자세하게 보여 주는 것. 그게 왜 사람들을 그토록 매료시키지?」

라울은 흥미가 동하는 기색이다.

「그게 자연이기 때문이지.」

「아냐. 그런 장면들이 약육강식의 개념을 예증하기 때문이야. 사자가 영양을 잡아먹듯이 우리는 모두 경쟁을 하며 살아간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죽인다. 이런 다윈주의의 메세지가 이른바 동물 다큐멘터리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거야.」

나는 내 친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하지만 경쟁은 진화의 길이 아냐. 나는 그 점을 확신해. 사자가 영양을 잡아먹는 장면 대신 다른 것들을 보여 줄 수도 있잖아? 예를 들면 개미가 진딧물과 협력해서 분비꿀을 생산하는 장면이라든가 펭귄들이 한데 모여 서로 몸의 온기를 나누며 추위를 이겨 내는 모습 같은 거 말이야.」


(중략)


사람들은 오랫동안 왜 메뚜기들이 수백만 마리씩 떼를 지어 구름처럼 몰려다니는지 궁금하게 여겼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런 현상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단일 경작이라는 인간의 행위가 가져온 결과이다. 광대한 농경지에 한 가지 작물만 심다 보니 그 작물의 천적이 한 지역으로 몰려들게 되고 그럼으로써 기하급수적으로 개체 수가 불어난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관여하기 전만 해도 메뚜기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별로 해를 끼치지 않는 곤충일 뿐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이 자연을 변화시키고 싶어 했던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메뚜기들이 저희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들에게 반응을 보였다. 인간이 땅거죽에서 핵폭탄을 터뜨리면 가이아는 지진으로 대답한다. 인간이 지구의 검은 피인 석유를 유독 가스로 변화시켜 생명을 질식시키는 구름을 만들어 내면 지구는 기온 상승으로 응답한다. 그러고 나면 빙하가 녹고 홍수가 일어난다. 인간은 자기들이 지구를 상대로 도발을 할 때마다 지구가 응답한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이른바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란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재해라고 말하는 것들은 인간이 어머니인 지구와 대화를 하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인재(人災)일 뿐이다.


(중략)


헤르마프로디토스는 페어플레이 정신을 발휘하여 내 손을 잡아준다.

「사랑이란 지성에 대한 상상력의 승리야. 명심해. 하지만 사실... 나는 네가 부럽기도 해, 미카엘. 다른건 몰라도 너는 상상력 덕분에 아주 강렬한 감정을 경험하잖아. 설령 그것이 한낱 환상일지라도 말이야.」


(중략)


「기다려요.」

나는 여신을 뒤쫓아 루브르 박물관을 닮은 건물로 들어선다. 정면 박공에 <묵시록 박물관>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실내에서 불이 밝혀 있지 않지만 유리창으로 푸르스름한 달빛이 새어들고 있다. 벽에 사진들이 걸려 있다. 사진들 아래에는 <17호 지구>, <16호 지구>, <11호 지구> 하는 식으로 짧은 설명이 붙어 있다. 보아하니 이전 후보생들의 Y 게임을 기념하기 위한 사진들이다. 모두 폐허가 된 도시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깡패나 민병대가 휩쓰는 황폐한 도시. 때로는 인간 대신 쥐나 하이에나나 개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기도 한다. 식물들만 무성하게 자라는 도시들이 있는가 하면, 눈이나 뜨거운 모래나 바닷물에 덮인 도시도 있다. 삼켜지고 얼어붙고 말라붙고 원시 상태로 돌아가 버린 인류... 하나같이 완전히 실패한 인류의 모습이다. 신들이 구하지 못한 세계들의 전시장. 누가 이것을 생각했을까? 참으로 고약한 취미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넓은 전시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아프로디테를 찾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진들 속의 인류와 그들의 실패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17호 지구의 경우가 그렇듯이 그 모든 실패는 인간들의 책임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인류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은 인류 자신이다. 숱한 인류가 집단 자살의 길로 나아갔다. 아프로디테는 아마도 그 점을 생각하게 하려고 나를 여기로 이끌었을 것이다. 집단 자살은 인류가 어쩔 수 없이 나아가게 되는 길이다. 신들은 바윗덩어리가 비탈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애를 쓰지만 추락은 피할 수 없다.


(중략)


19세기 프랑스의 극작가 외젠 바리슈는 "페리숑 씨의 여행" 이라는 희극작품에서 인간의 묘한 심리를 드러내는 한 가지 행동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일견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알고 보면 사람들에게서 아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행동, 바로 배은망덕이다. 파리의 부르주아 페리숑 씨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알프스로 여행을 떠난다. 딸에게 반한 두 젊은이, 아르망과 다니엘도 딸에게 청혼할 기회를 얻기 위해 페리숑 씨 가족과 동행한다. 일행이 <얼금 바다>라 불리는 알프스 빙하 근처의 한 산장 여관에 묵고 있던 어느 날, 페리숑 씨는 승마를 하다가 말에서 떨어진다. 바로 옆에 낭떠러지가 있다. 그가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고 있는데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아르망이 달려들어 그를 구해 준다. 아르망에 대한 딸과 아내의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정작 은혜를 입은 페리숑 씨의 태도는 다르다. 처음엔 생명의 은인에게 기꺼이 고마움을 표시하더니 시간이 흐를 수록 그의 도움을 과소평가하려고 애쓴다.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 전나무를 보고 막 붙잡으려던 참인데 아르망이 온 것이고, 설령 아래로 떨어졌다 해도 멀쩡했을 거라는 식이다. 이튿날 페리숑 씨는 두 번째 젊은이 다니엘과 함께 가이드를 따라 몽블랑 아래의 빙하 쪽으로 트레킹을 나간다. 도중에 다니엘은 발을 헛디뎌 크레바스로 추락할 위기를 맞는다. 이때 페리숑 씨가 피켈을 내밀어 잡게 하고 가이드와 함께 그를 끌어낸다. 산장으로 돌아온 페리숑 씨는 딸과 아내 앞에서 자랑스럽게 그 일을 떠벌린다. 다니엘은 페리숑 씨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자기는 죽었을 거라면서 아낌없는 찬사로 그를 거든다. 당연한 얘기지만 페리숑 씨는 아르망보다 다니엘에게 관심을 갖도록 딸을 부추긴다. 그가 보기에 다니엘은 무척이나 호감이 가는 젊은이다. 반면에 아르망이 자기를 도와준 일은 갈수록 불필요했던 일로만 여겨진다. 급기야는 아르망이 자기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조차 의심하기에 이른다.

외젠 라비슈가 이 희극을 통해 예증하듯이, 세상에는 남에게 은혜를 입거나 신세를 지고도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고마움을 모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를 도와준 사람들을 미워하는 자들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도와준 사람들에게 빚을 진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싫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와준 사람들을 좋아한다. 우리의 선행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들이 두고두고 감사하리라 확신하면서 말이다.


(중략)


프로메테우스는 앙크를 손에 든 채 우리의 행성을 살핀다. 그는 몇몇 도시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다가 우리 쪽으로 돌아선다.

「이걸 보고 있으니 곰팡이가 핀 빵이 생각난다. 빵을 종 모양의 덮개 안에 며칠 놓아두면 푸른곰팡이와 검은곰팡이가 마치 모피처럼 돋아나지. 너희의 인류가 바로 그 모양이야. 행성에 슨 곰팡이란 말이다. 건질 게 아무것도 없어.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 있을까? 이따위 것은 파괴해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로 하지.」


(중략)


내가 지구에서 보낸 일상의 미묘한 순간들이 조각조각 기억에 되살아난다. 늘 욕망과 공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삶. 문득문득 찾아와 나를 들뜨게 하던 욕망들.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니던 공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는 일의 어려움. 노화. 질병. 타인들의 째째함. 폭력. 사회 불안. 사회생활의 모든 수준에서 나타나는 위계 제도.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작은 우두머리들. 크고 작은 꿈들. 자동차 바꾸기. 거실에 새로 페인트칠하기. 담배 끊기. 아내 몰래 바람피우기. 로또에 당첨되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 정신이 참으로 편협했다는 느낌이 든다.


(중략)


<이 세계가 견딜  만한 것은 예술이 있기 때문이야> 하는 생각이 든다.


(중략)


에드몽 웰즈가 들려준 기이한 우주 창생 신화가 생각난다. 헤라의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을 담은 신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런 꿈을 꾸었어. 창조주가 우주의 습작을 만들어 냈어. 자기가 창조하고 싶은 우주의 시험 버젼을 만든 거야. 창조주는 첫 작품을 테스트했어. 그럼으로써 그것의 모든 결함을 알아낼 수 있었지. 이어서 창조주는 동생 우주를 창조했어. 첫 작품의 결함을 보완한 완전한 우주가 만들어진 것을 확인하자 창조주가 말했어. "이제 습작을 없애 버려도 되겠다." 그런데 동생 우주가 형 우주를 보존하자고 부탁했어. 창조주는 습작 우주를 없애 버리지 않는 대신 그것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지. 그리하여 실패작인 형 우주는 성공작인 동생 우주의 보호를 받게 되었어. 그때부터 동생 우주는 형 우주의 결함을 뜯어고치려고 애썼어. 이따금 깨달은 영혼들을 보내어 형 우주가 망해가는 것을 지연시키기도 하지. 창조주는 지금도 망쳐 버린 습작에 직접 관여하지 않아. 동생 우주가 열심히 그것을 유지시키고 있을 뿐이야.>

에드몽 웰즈는 천사들의 나라에서 나를 지도하던 시절에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어디에서 읽은 것인지 스스로 지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기존 관념을 뒤흔드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의 마지막 말이 그러했다.

<우리는 그 망쳐 버린 우주 속에 있어.>


(중략)


제우스가 계속 이야기 한다.

「그 뒤에 나는 인간이 스스로 창조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내 피조물들의 창조물을 모방했다. 나는 인간의 의상을 모방했어. 토가 말이야. 그건 내가 발명한 게 아냐. 하지만 보다시피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입고 다니잖아. 나는 인간의 집들도 모방했어. 이 궁전은 그리스와 로마의 궁전 건축을 본뜬 거야.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과 성향, 예컨대 호기심, 우울, 질투, 야심, 퇴폐, 순진함, 앙심, 교만 따위도 내가 만든 게 아냐. 내가 제공한 도구들을 가지고 그들이 만들었어.」


(중략)


제우스는 셰익스피어와 도스토옙스키의 원고들을 보여 준다.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원고들 이라고 한다.

「1호 지구에서 진짜 재능 있는 사람들이 당대에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면 늘 가슴이 아파. 진정한 혁신자들은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 네 친구 조르주 멜리에스만 해도 그래. 그는 환상 영화를 발명했지만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기 극장을 팔아야 했고 절망에 빠져서 자기 필름들을 불태워 버렸어. 결국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한 채 가난 속에서 죽었지.」

제우스는 실망의 뜻이 담긴 몸짓을 보이며 말을 잇는다.

「모차르트의 작품은 늘 살리에리의 작품에 밀렸어. 살리에리는 알다시피 요제프 2세의 궁정 악장으로 당시의 유행을 주도했지. 진정으로 무언가를 혁신하는 사람들은 당대인들의 눈에 띄기가 쉽지 않아. 대개는 모방자들이 원래의 발상을 왜소하게 만들어서 그들 대신 영광을 차지하지.」

제우스는 계속 이야기 한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말했지. <어떤 진정한 천재가 이 세상에 나타났음은 바보들이 단결해서 그와 맞서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라고.」


(중략)


제우스는 <영화 박물관>의 문을 민다. 16:9형의 평면 스크린들이 보인다. 각 스크린마다 유명한 영화에서 발췌한 스틸 사진이 나타난다. 스크린에 살짝 손을 대기만 하면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한다.

「현재로서는 3천 편밖에 못 봤어. 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빨리 보았는데도 그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들을 차례대로 말하자면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이야.」

나는 놀라서 묻는다.

「SF영화들 뿐이네요?」

「그 장르가 창의성이 가장 돋보이거든. 네 고향 <1호 지구> 나 지금 너희가 'Y게임' 을 벌이고 있는 <18호 지구> 에서 늘 일어나는 일과 똑같은 것을 구경하자고 영화를 볼 수는 없잖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중략)


판도라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모든 선물을 받은 여자> 라는 뜻이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자기 뜻을 거역하고 인간들에게 불을 훔쳐다 주자 그 대가로 인간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했다. 그는 헤파이스토스에게 흙과 물을 섞어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헤파이스토스가 여자를 빚어내자 다른 신들은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저마다 여자에게 선물을 주거나 자기가 지닌 재능을 불어넣었다. 헤르메스는 여자의 마음속에 거짓과 속임수와 교활한 심성까지 담아 주었다. 그리하여 아름다움과 성적인 매력과 손재주와 언변 등을 고루 갖춘 여자, '판도라' 가 세상에 나왔다. 제우스는 그녀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냈다. 프로메테우스는 단박에 판도라를 의심했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훌륭하지만 마음속에 거짓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피메테우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홀딱 반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 제우스는 그들 부부에게 결혼 선물로 상자 하나를 주었다. 그러면서 

<이 상자를 받아서 안전한 곳에 고이 간직하거라. 하지만 미리 일러두건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것을 열어 보면 안 된다>

하고 말했다. 에피메테우스는 사랑에 흠뻑 빠진 나머지 제우스가 주는 선물을 받지 말라는 프로메테우스의 경고를 잊고 상자를 받아 자기 집 한구석에 숨겨 두었다. 판도라는 남편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세상은 경이로웠다.아픈 사람도 없고 늙는 사람도 없었으며 모두가 선량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판도라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신비한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판도라는 요염한 자태를 한껏 드러내며, 상자의 뚜껑을 열고 잠깐 들여다보기만 하자고 남편을 졸랐다.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열지 말라고 했다면서 아내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판도라는 상자를 열어 보자고 매일같이 성화를 부렸지만 에피메테우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판도라는 남편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상자를 감춰 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자물쇠를 부수고 묵직한 뚜껑을 들어 올렸다. 판도라가 미처 상자 내부를 들여다보기도 전에 상자에서 무시무시한 울부짖음과 고통에 겨운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판도라는 겁에 질린 채 흠칫 물러섰다. 그때 상자에서 증오, 질투, 잔인성, 분노, 굶주림, 가난, 고통, 질병, 노화 등 장차 인간이 겪게 될 온갖 재앙이 쏟아져 나왔다. 판도라는 뚜껑을 도로 닫았다. 그러나 이미 온갖 불행이 인간들 사이로 퍼져 나간 뒤였다. 다만 상자 밑바닥에 무언가 자그마한 것이 잔뜩 웅크린 채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그 뒤로 인간들은 갖가지 불행에 시달리면서도 희망만은 고이고이 간직하게 되었다.

[역주]

헤시오도스의 그리스어 원문에는 '상자' 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단지나 항아리를 뜻하는 <피토스> 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것이 상자로 바뀐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인문학자 '에라스무스' 의 영향이라고 한다. 그는 헤시오도스의 판도라 이야기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피소트> 라는 단어를 <픽시스(상자)>로 옮겼다. 유럽 언어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판도라의 상자> 라는 관용구는 결국 빛나는 오역(?)의 산물인 셈이다.





















1부 '우리는 신' 이 출간되고 근 5개월 만에 발간된 2부.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연재소설도 아니고 프랑스 내에선 몇년 전에 끝내고 다음작품(파라다이스)도 작년에 흥행을 마쳤다고 하는데 
번역이나 수입과 발행이 너무 늦는거 아닌가..(게다가 3권과 4권의 텀도 생겨버려서 독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마지막 3부는 올해 여름께 발매한다고 한다.

각설하고.

본 편에선 1부에서 한창 진행되던 일명 'Y게임'이 중반을 지나 종반으로 향해 간다. 
그에 따라 탈락자들도 늘어나서 절반이 채 안되는 신 후보생들을 남겨두고 작품이 끝난다. 
그 와중에 주인공 '미카엘 팽송' 은 게임에서 이탈해 '절대자' 를 두 눈으로 확인하러 그에게 다가서지만 
막연한 이야기들만 전해듣고 다시 'Y게임' 에 참가하기 위해 아에덴 섬으로 돌아간다.

1부때와 마찬가지로 예측할것 같으면서도 예측불가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플롯 덕분에 1부보다 더 빨리 읽혔다. 
하지만 신 후보생들이 다스리는 18호 지구의 백성들의 '지식의 진화' 덕분에 
조금 더 복잡해지고 어찌보면 난해할 수도 있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어 중간중간 읽기가 힘들었다. 
주인공이 게임 규칙을 어기고 뜬금없이 제우스를 만나러 갈땐 드디어 스토리가 안드로메다로 가는건가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 
마지막 3부에서는 제우스도 자신의 신이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등장할 것 같아서 역시 후반부의 스토리도 기대 된다. 
근데 무슨 소설이 겨울-봄-여름의 순으로 발매가 되냐. 정말 무슨 짓이야 열린책들(발행처).

아 그리고 1부때보다 훨씬, 주인공들과 등장인물들이 자꾸 자신들의 존재가 하나의 소설속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망상아닌 망상을 하고 있는데 그네들의 그런 언쟁을 볼때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참 이상한 작자라고 생각될 따름이다. 
소설속의 주인공들이 작가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소설이라니. 허허허.. 정말 독특하다(알겠으니까 3부에선 그만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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