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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Sep 28. 2016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서로의 손을 잡지 못하는 나무들이 서로의 손을 포기한 채 불확실한 어둠 속에서 떨고 있었다. 서로의 손을 놓지 못하는 인간들은, 그래서 서로를 포기해선 안 된다고 길을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중략)

스무 살의 여자 역시, 남자가 수신할 수 없는 전파와 같은 것임을 안것도 꽤나 오랜 세월이 지나서였다. 실은 그녀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젊음은 결국 단파 라디오와 같은 것임을,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모든 연애의 90%는 이해가 아닌 오해란 사실을.. 무렵의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스무 살이었고, 좋든 싫든 연애의 대부분을 운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나이였다.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그런 사실을 모른 채 사랑을 이룬 이들은 어쨌든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스무 살의 나는 생각했었다.


(중략)


젊은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를 사랑해 온 인간의 마음은 오래 신은 운동화의 속처럼 닳고 해진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어떤 빨래로도 그것을 완전히 되돌리진 못한다... 변형되고, 흔적이 남은 채로.. 그저 볕을 쬐거나 습기를 피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중략)


아버지는 얘기했다. 절대 단련할 수 없는 급소가 몇군데 있어. 그중 하나가 눈이야! 그중 하나가 눈이라고, 음악이 끝날 무렵 나는 다시 중얼거렸다. 이것은 너무나 불공평한 시합이다. 첫눈에 누군가의 노예가 되고, 첫인상으로 대부분의 시합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외모에 관한 한, 그리고 누구도 자신을 방어하거나 지킬 수 없다. 선빵을 날리는 인간은 태어날 때 정해져 있고, 그 외의 인간에겐 기회가 없다. 어떤 비겁한 싸움보다도 이것은 불공평하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후, 나는 잡지에서 오린 여배우의 사진 같은 걸 놓고 절대 자위를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아름다운 게 싫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런, 우두커니 선빵을 맞는 기분이 더러워서였다. 당신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그래서 뭐 어쩌라구요, 노래라도 부르는 기분으로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곤 했었다.


(중략)


인간들은 참 이상해요.

뭐가 이상해? 너나 나나 돈 벌면 안 저럴 것 같애?

요한이란 사람의 말에는 어딘가 모르게 뾰족한 것이 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늘, 할 말이 없게 만든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호리한 큰 키에 나이가 열 살은 많아 보였고 뭐랄까... 존 레논과 은행원의 중간쯤 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 상태가 나빠 보이진 않았는데, 그렇다고 확실히 그 사람 괜찮던걸? 할 수는 없는 부류였다. 즉... 한마디로 까다로운 인간이었다. 그와 가까워진 것도 무척 까다롭고 사소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세일이 끝나갈 무렵 잠깐 숨을 돌리며 휴식을 취할 때였다. 힘들지? 하며 다가온 그가 느닷없이 주스를 던져주었다. 모자 속의 땀을 닦고 나란히 벤치에 앉아 쪽쪽 주스를 빨아먹었다. 기어코 끝까지 빨자 팩이 찌그러지며 오그라들었는데, 정말 무심코 후 입김을 불어 풍선처럼 팩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휙, 휴지통에 골인을 시켰다. 느닷없이 합격, 하고 그가 말했다. 합격이라니,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끝까지 쪽 빨기만 하는 놈들은 믿을 수가 없거든, 그런 놈들은 대개 가지려고만 드는 놈들이야. 세상을 빨아먹기만 할뿐 채울 줄도, 채울 생각도 없는 놈들이지. 그런 의미에서 합격! 묵묵히 고객의 통장을 확인한 은행원 같은 얼굴로 그가 중얼거렸다.


(중략)


다들 한심해요.

뭐가?

저 경비만 해도 자기 구역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이 아저씨 왜 이러실까, 그런 게 눈에 훤히 보일 텐데... 그래도 허구한 날 히죽댈 수 있다는 게... 또 심심하면 음료수를 갖다 주곤 한다니까요. 어머, 고맙습니다 말은 하지만... 뭐, 실은 속으로 별꼴이 반쪽이야 하겠지만... 어제는 딱 한 모금 마시고 그 자리에 병을 두고 간 거예요, 나 참.

그런 얘길 할 때마다 요한은 거품이 인 맥주처럼 부글부글 웃음을 뿜어 냈었다. 

이봐 아미고, 진정하라고 진정. 아저씨는 그저 이쁜이가 좋았을 뿐인 거잖아. 누구나 그런 거라고. 너도 나도... 세상의 모든 아미고들은 이쁜이들을 좋아하게끔 만들어졌다고. 

아무리 그래도 뻔히 보이잖아요, 한두 번도 아니고...

글쎄 그런 거라니까, 지구 반대편의 여배우에 빠져 팬레터를 쓰는 게 아미고들의 운명이야. 이쁜 언니들 앞에선 어쩔 수 없다니까. tv에 나온 언니를 쫓아다니고, 함성을 지르지만 뭐 그 언니는 사랑해요 여러분... 하겠지만, 그 언니가 사랑할까? 아미고들이 아무리 히죽대고 음료수를 건넨다 해도... 그렇다고 어머 뭐 이런 것들이다, 별꼴이 반쪽이야 라고도 할 수 없는 거잖아? 

뭐예요, 그건 너무 바보 같잖아요. 

몰랐어? 모두 바보란 걸? 그래도 허구한 날 히죽댈 수 있는 게 아미고들이야. 그 언니들 생각하며 자위라도 하고, 찾아서 채널을 돌리고, 브로마이드라도 구해 책상 앞에 걸어두고... 아미고들은 그럴 수밖에 없어. 왜? 실은 가질 수 없는 거거든. 가질 수 없으니까 열광하는 거야. 세상의 걸들도 마찬가지야. 밥맛 경비가 건네는 음료수가... 도대체 고맙겠냐는 거지. 아무리 하녀라 해도, 어쨌거나 신데렐라가 왕궁에 가는 이유는 왕자님을 만나기 위한 거니까... 설사 시간이 지나고 꿈이 깨진다 해도 그 전까진 꿈을 꾸는 게 인간인 거야. 그래서 걸들도 열광을 하는 거야. 비명을 지르고 기절할 정도로 오빠를 외치고... 물론 오빠들도 고마워요, 또 여러분 사랑해요... 하겠지만 오빠들이 과연 걸들을 사랑할까? 마찬가지지. 실은 가질 수 없기 때문이야. 너와 나... 이런 아미고들과 걸들은 말이야... 그래서 좆밥이야. 세상의 좆밥들이지. 정말로 그런 오빠를 얻을 수 있는 언니들은 말이야, 또 그런 언니를 만날 수 있는 왕자들은 말이야... 서로에게 열광하지 않아. 왠지 알아? 시시하기 때문이지. 언제든 가질 수 있는 건 누구에게나 시시한 거니까. 뭐, 그래도 좋은 거야. 돈만 주면 뭐든 하겠다는 인간들이 널린 게 사실이고, 윙크 한 번 날려주면 페이를 지불할 인간들도 널린 게 사실이니까. 문제는 바로 아미고들과... 걸들이지. 가질 수 없는데도 허구한 날 히죽대는 거야, 만날 수 없어도 허구한 날 박수를 치고 와와 하는거지. 어머 왜들 이러실까 소릴 들어도... 하는 거야, 해서 저들에게 유리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거지. 그래서 세상은 12시 종을 울리지 않아. 마법이 깨지는 순간 일곱 난장이와 신데렐라 모두를 잃게 되니까... 아니, 실은 울릴 필요도 없는 거겠지. 애당초 마법은 존재하지 않았고, 아미고들도 걸들도... 이미 각성의 타이밍을 놓친 지 오래니까. 자, 호박을 마차로 바꿔줬어. 너에게도 이제 차가 생긴 거야. 이런 어디서 이런 드레스가... 너 참으로 몰라보게 예뻐졌구나. 하지만 생각해봐. 아미고인 너에게 차가 생겼다면 저들은 대체 얼마를 벌었을지... 걸인 네가 이정도로 예뻐졌다면 저들은 대체 또 얼마나 예뻐졌을지... 그러니 내버려두라고, 설령 마법을 만든 게 저들이라 해도 그 마법을 유지하는 건 다 같은 좆밥들이야. 세상의 종은 실은 매일 울리고 있어. 아무도 듣지 않을 따름이지. 봐, 보라구! 백화점에 들어와 있으면 왕궁에라도 온 줄 아는 게 좆밥들이니까. 안 그래 아미고?


(중략)



많이들 산다. 

난간에 팔을 기댄 채 요한이 한숨을 쉬었다. 누구라도 <많이들 산다>는 느낌이 절로 들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주소(住所)라는 점선으로 이어진 불빛과 불빛... 밤의 도시는 더욱 넓어 보였고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렇게나 남기고들 싶을까?

요한이 말했다. 

뭘요?

별로... 좋지도 않은 유전자를 말이야. 

몸에 좋지도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요한은 심하다 싶을 만큼 난간 밖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위험해요 형. 

뭐가?

그러다 떨어지겠어요. 

이게 위험한가... 음... 위험하군...

여전히 몸을 기울인 채 요한은 중얼거렸다. 그때 본 편안한 미소를 잊을 수 없다. 너무나 편안해 보였으므로, 자신의 미소를 제외한 모든 세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저기... 하고 내가 입을 열었지만 미소를 띤 요한의 중얼거림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공부 공부... 그러다 죽는 거잖아. 1등 1등... 그러다 죽어야 하고... 돈 돈... 그러다 죽는 거잖아.

그렇죠, 라고 대답하면서 나도 모르게 요한의 어깨를 움켜쥐어야 했다.

불쌍해,

하고 요한은 난간 너머로 내민 자신의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잠시 미소가 머물러 있던 그 영역에서 나는 격한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거... 말고는 없는 걸까?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말했다. 그 순간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단지 어떤 느낌에 이끌려, 움켜쥔 손에 힘을 가하며 그렇게 말했었다. 

새가 날고... 말이 풀을 뜯듯 인간은 돈 돈 하는 동물인 거예요. 

그러자 돈 돈 하고 요한이 중얼거렸다. 1등 1등 하고 나도 중얼거렸다. 차 차... 집 집... 더 더... 여자 여자... 건강 건강... 근무 근무... 진급 진급... 자식 자식... 오호 꽤나 하는데 하며 요한이 고개를 들었다. 난간에 나란히 몸을 기댄 채 마치 실성한 인간들처럼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를 이어나갔다. 힘 힘... 죽여 죽여... 상속 상속... 비교 비교... 이겨 이겨... 유행 유행... 지랄 지랄... 주여 주여... 좋아 좋아... 이익 이익... 투자 투자... 장수 장수... 새 거 새 거... 저축 저축... 확장 확장... 아멘 아멘... 아나따(あなた) 아나따... 잠깐 아나... 따가 뭐죠? 그런 게 있어.


(중략)


곧 시작된 세일과 함께, 정신없는 한 주가 지나갔었다. 70%, 90% 익어가던 은행잎과 더불어, 세일의 폭도 커져만 가는 가을이었다. 이익을 위해 재고를 처분하는 상술과... 어머 도대체 얼마를 이익 본 거야? 몰려들던 여자들의 물결을 잊을 수 없다. 분명, 이익을 본 것은 누구였을까. 

말하자면 
할인 자체가 눈가림이란 얘기네요? 

몰랐어?

어이가 없다는 듯 요한은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이 세상은 눈가림이야. 눈만 가려주면... 또 눈만 만족시켜 주면 지옥 끝까지라도 달려갈 바보들이지. 세상을 망치는게 독재자들인 줄 알아? 아냐, 바로 저 넘쳐나는 바보들이야. 독재를 하건 누굴 죽였건... 여당이 돼야 이곳이 삽니다, 제가 나서야 집값이 오릅니다 하면 찍어주는 바보들 때문이지. 세상은  잘 살겠다고, 더 잘 살겠다고 하는 놈들 때문에 망하는 거야. 

그렇잖아도 개발을 내세운 여당 후보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가을이었다. 어머니 안 계시니? 선거 전부터 문을 두드리던 아줌마들과, 삼삼오오 모여 집값이 오를 거라 좋아하던 동네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


(중략)


하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상관이 있든 없든, 또 누가 이익을 보았든... 퇴근 무렵의 주차장이나 옥외의 광장... 들소 떼가 지나간 벌판처럼 휑한 느낌의... 그래서 홀로 어느 고원에 선 것 같은 기분으로... 고원의 저편에선 개발을 하든 뭘 하든... 들소 같은 여자들과 백화점, 설사 모두가 이익을 봤다 쳐도... 역시나 결국 여당과 독재자에게 그 이익이 돌아간다 해도... 그해 가을을 살았던 사람들 중 누구보다 큰 이익을 본 사람은 <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랑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이었고, 세상의 가장... 큰 이익이었다. 천.문.학.적. 이.익. 이란 아마도 이런 걸 뜻하는 게 아닐까, 무렵의 나는 생각했었다. 그것은 묘한 경험이었다.


(중략)


모처럼의 휴일은 갑자기 우리가 젊다는 사실과, 이 세상이 지하주차장처럼 칙칙한 곳이 아니란 사실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다. 

그렇군, 

면도를 하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실은 젊었던 얼굴이, 마치 발굴된 화석처럼 거울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요한은 말했었다. 

세계라는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평생을 지하에서 근무한 인간에겐 지하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릴 해선 안 되는 거라구.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야.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순 없어. 그딴 소릴 지껄이는 순간부터 인생은 맛이 가는 거라구. 

이하동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중략)


그런, 그녀에게 그래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실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 번도 모리스 라벨과 밥 딜런을 좋아하고, 미셸을 좋아하고, 선인장 꽃과 더스틴 호프만을 좋아하는 여자애를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오빠, 나 오늘 이뻐? 

그래 이뻐.

토요일날 행사장에 와줄 거지? 

아니 못가. 흥 나 삐진다.

일이 있단 말이야. 

그래도 그날 안 오면 절교다.

한 번만 봐줘, 정말 집에 일이 있다니까.

일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너가 중요해. 

거짓말, 와주지도 않는다면서. 

미안, 내가 나중에 선물로 갚을게.

선물 살 돈 있어? 

있어. 

흥 다 필요 없어. 

왜그래또?

뭐가, 뭐가 왜 그래? 

이를테면 그녀를 만나기 전의 세계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아는 여자애들의 전부였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쉽고, 간편한 세계였다. 이뻐와 착해, 그리고 돈 있어로 모든 것이 해결되던 세계였으니까. 쉽고 쉬운 초급 영어의 페이지를 넘겨버린 중학생처럼, 그래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중략)


아마도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겨울이었을 것이다. 무엇을 해줄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보잘것없는 기억의 편린조차도 더없이 눈부신 순은(純銀)의 반짝임으로 떠오른다. 인생에 주어진 사랑의 시간은 왜 그토록 짧기만 한 것인가. 왜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보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왜 인간은, 자신이 기르는 개나 고양이만큼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왜 인간은 지금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망각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다시 키보드에 손을 얹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성공한 인생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변기에 앉아서 보낸 시간보다는, 사랑한 시간이 더 많은 인생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변기에 앉은 자신의 엉덩이가 낸 소리보다는, 더 크게... 더 많이 <사랑해>를 외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략)


오후의 거리를 기억해요. 돋보기를 통과한 듯 쏟아지던 볕과, 이제 다시는 납득할 수 없을 여자로서의 나 자신과... 너무나 선명했던 그 그림자를 잊을 수 없어요. 돌아오던 먼 길과, 돌연 이 세상에서 사라진 듯한 나 자신을 잊지 못해요. 자신보다 자신의 그림자가 더 아름다운 여자는... 그림자로서 세상을 살아야 해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나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여자예요.


(중략)


그 어디에도 색색의 조명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더없이 크리스마스와 비슷한 밤이었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서로를 간호하는 느낌으로 걸어가던 길고 긴 골목도 잊을 수 없다. 인간의 골목... 그저 인생이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 불과한 인간들의 골목... 모든 인간은 투병(鬪病) 중이며,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누군가를 간호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중략)


젊은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를 사랑해 온 인간의 마음은 오래 신은 운동화의 속처럼 닳고 해진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어떤 빨래로도 그것을 완전히 되돌리진 못한다... 변형되고, 흔적이 남은 채로.. 그저 볕을 쬐거나 습기를 피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중략)


인간들은 참 이상해요.

뭐가 이상해? 너나 나나 돈 벌면 안 저럴 것 같애?

요한이란 사람의 말에는 어딘가 모르게 뾰족한 것이 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늘, 할 말이 없게 만든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호리한 큰 키에 나이가 열 살은 많아 보였고 뭐랄까... 존 레논과 은행원의 중간쯤 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 상태가 나빠 보이진 않았는데, 그렇다고 확실히 그 사람 괜찮던걸? 할 수는 없는 부류였다. 즉... 한마디로 까다로운 인간이었다. 그와 가까워진 것도 무척 까다롭고 사소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세일이 끝나갈 무렵 잠깐 숨을 돌리며 휴식을 취할 때였다. 힘들지? 하며 다가온 그가 느닷없이 주스를 던져주었다. 모자 속의 땀을 닦고 나란히 벤치에 앉아 쪽쪽 주스를 빨아먹었다. 기어코 끝까지 빨자 팩이 찌그러지며 오그라들었는데, 정말 무심코 후 입김을 불어 풍선처럼 팩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휙, 휴지통에 골인을 시켰다. 느닷없이 합격, 하고 그가 말했다. 합격이라니,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끝까지 쪽 빨기만 하는 놈들은 믿을 수가 없거든, 그런 놈들은 대개 가지려고만 드는 놈들이야. 세상을 빨아먹기만 할뿐 채울 줄도, 채울 생각도 없는 놈들이지. 그런 의미에서 합격! 묵묵히 고객의 통장을 확인한 은행원 같은 얼굴로 그가 중얼거렸다.










주로 비주류적인 화법과 소재들로 주로 SF에 가까운 글들을 쏟아냈던 박민규님의 연애소설.

처음에 이 소설이 모 출판회사 블로그에 '연재' 된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의외라는 생각을 했었다.
첫번째로 '인터넷 연재' 라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두번째로 '박민규가 연애소설이라니' 라는 생각이 의외였다.
그만큼 약간은 저돌적인 소설들을 제대로된 방식으로(주로 문학상에 이름올렸던 작품들 위주로 발간) 집필했던 작가라 의구심마저 들었다.

역시나 
책을 펼치고 한동안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문체들(사랑한다던지 하는)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았지만
초반, 인트로(사실 아우트로)부분을 넘어가면서 부터 익히 알고 있던 박민규식의 화법과 문체 덕분에
후다닥 읽어버린 소설이다.

뭔가 신파적이고 애닳진 않지만
작가만의 스타일로써의 사랑 얘기에 중간중간 눈물을 흘릴뻔이 몇 번 있었고 가슴이 먹먹한 적도 몇 번 있었다.
못생긴 여자와 그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 이지만 
어김없이 
수박 겉핥듯, 세상에 대한 풍자와 조롱들은 기록되어 있다.
작가는 주인공들에 대해(못생긴 여자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이야기 하면서 '비현실적인 소설' 이라고 소설 맨 뒤, 
작가의 말에 적어 놓았지만 아마 지금 세상엔 비현실적인 소설이 맞겠다만
소설의 배경인 80년대 후반기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생각했다.
동전을 들고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건다거나 집에 아무도 없으면 연락이 안되던 시절이니까 말이다.

시대적 배경이라던지 공간적 느낌은
작가 본인이 직접 체험했던 시대이니 잘 표현할 수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놀랐던건
작가의 늘어난 화법이었다.
그간 단편집 '카스테라' 이후로 이렇다할 작품활동이 없던 와중에(종종 문학상을 타기도 했지만)
무언가 표현하는 방법이 일취월장해진 느낌이다.
소설을 읽을때마다 등장하던 은유적, 시각적, 감각적 표현들은
'어떻게 이렇게 표현해 낼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다음 소설이 어떤 장르의 소설이 될진 모르겠지만 역시나 기대가 된다.
책 잘 읽었습니다. ^^
덕분에 연애하고 싶어 미칠뻔했다고 작가에게 메일이라도 써서 보내고 싶다.


하지만 다만 정말 한가지 아쉬웠던건
영화의 '디렉터스 컷' 처럼 책 뒤켠에 '라이터스 컷' 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결말이 두개로 나뉘어졌다.
그 부분은 그냥 안보는게 나을정도로 작가가 미웠었다.
굳이 안넣었어도 괜찮았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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