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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Oct 10. 2016

good bye 20's

안녕 나의 20대

문득 고개를 올려보니 달력이 12월 한장 남았다.
 
2010년 아직도 공사중인 허름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대에 들어서면서
지금은 이름이 바뀐 대학 문턱에 발을 디디며
강산이 변하는 10년여 동안
시분초를 따질 수도 없는 무수한 일들이 지나갔다.
 
우리가 내는 등록금으로 자매학교 설비자금을 댔던 대학은


문학이랍시고 죽어라 기초만 다져주길래 다니는둥 마는둥 했고


덕분에 친구들과 룰루랄라 술만 빨며 지내서


교회는 아마 그때부터 등한시 하게 됐고


결혼이라도 할 줄 알고 친구들의 손가락질도 감내하며


뜨겁게 사랑했던 그시절의 여자친구는


핏덩이 같던 친구놈이랑 눈맞아서 둘이 손에 손을 잡아 증발했고


어쨌든 걔가 '넌 잘 할 수 있을거야' 라고 꼬셔서


2학년때 학교를 관두고 어울리지도 않는 재수를 해본거였고


어머니 아버지는 나만 놔두고 이혼을 하네 마네 하다가


결국 내가 OK사인을 보낸 탓에


역시 결국 쿨하게 헤어지셨고


군대가기전엔 무슨 깡이었는지


알바하던 스티로폼 공장에서 승낙해줘서


난생처음 신용카드를 만들어


덕분에 그 나이때 원없이 긁어봤고


맥도날드에서 알바할때는 내가 생긴게 굼떠보였는지


온갖 잡일만 시켰었고(나는 튀김 기름을 갈테니 넌 계산을 하거라)


군입대와 함께 돈 없고 빽없는 새끼들은 다 여기 온다며


강원도 최전방 선임들의 온갖 잔소리를 들었었고


주위엔 다 시커먼 남자새끼들 뿐이라 군생활이 더럽게 힘들었었고


gop올라가니까 진짜 전쟁나는줄 알았던 때가


세네번이 아니었고 말년 병장되니까 그런거 다 까먹었고


덕분에 쏙 빠졌던 살이 다시 쪘었고


사진 좀 찍어보겠다고 거금 주고 산 디지털 카메라는


여자친구가 지꺼 더 좋은거 산다고


나 군대간사이에 팔아치워버렸고


제대하고 나니까 왠지 앞이 캄캄해진거 같아서


아무 일이라도 찾았었고


그나마 음악이랑 좀 관련(?)이 있는 일을 찾다보니


인천 신나라 레코드점에 들어가게되서


'서태지 8집 나올때까지 여기에 뼈를 묻겠다' 라 포부를 밝혔었고


근데 거기에 김대린가 최대린가 이제는 이름도 기억도 안나는


대머리 대리새끼(라임이냐?)가


그곳이 군대인줄 알고 날 진짜 모욕적으로 갈궜었고


덕분에 난 그 젊은 나이에 그 게새끼한테


욕도 한마디 못하고 도망치다시피 그 일을 그만뒀었고


(그새끼 돌고 돌다 결국 거기서 다시 일하데?


한번만 걸려봐 씨발럼아 뒤져 아주)


거길 나오면서


꿈 전공 다 접고 정신 챙기고 열심히 살아 보겠다고


자취를 시작하면서 그리고 호텔 프런트 생활을 시작하면서


행인에게 금품을 갈취하듯 직원의 골수를 쪽쪽 빼먹는


용역업체의 횡포라는걸 처음 알게됐었고


(씨벌 무슨 월급 원금이 180만원이었는데


내 손에 떨어지던건 95만원이여)


호텔을 잠깐 쉴때 다녔던 무슨 마트 보안요원 일을 할때는


팀장 새끼가 보기에 내가 일을 빠릿빠릿하게 못하니까


근무한지 한달도 안되서 용인점에 가라길래


엿이나 까잡숴 라고 하고 그만 뒀었고


'아 이래서 어른들이 어릴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그랬나?'


라는 생각이 그때 딱 한번 들었었고


다른 호텔로 옮겨가서는


술과 담배와 같이 일하는 인간들이 선물해준


스트레스 덕분에 평생 앓지 않아왔던


두통이라는걸 살면서 딱 한번 느껴봤었고


(어이, 김대리 아직 이혼도장도 안찍고


같이 일하던 그 어린년이랑 놀아난다면서?)


본격적으로 일을 쉬면서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알바시장을


굴러먹다가 기껏 찾은 디자인 회사에선


디자인은 안시키고 제품제작만 좆나게 하다가


김사장 횽이 '아.. 생각해보니 너가 필요없는거 같아' 라고 해서


3개월 만에 퇴사됐고


또 이런저런 알바와 알바들을 전전하면서


참 이러다간 아무것도 안되겠다 싶어서


없는 돈을 끌어서 디카와 필카를 사서 사진을 찍었고


홈페이지질을 다시 시작했고


음악을 더 듣기 시작했고 책을 더 읽기 시작했으며


영화를 더 보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만난 내 인생의 마지막일것 같았던 여자친구는


바보같은 나를 참으로 많이 사랑해 줬고


되돌아보니 나는 정말로 바보짓만 했던것 같고


그래서 결국 헤어졌고


어느날 갑자기 주위에 있던 교회 동생들이


교회좀 다시 좀 나오라길래


예전에 살짝 발만 담궜었던 교회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고


왠일로 수련회를 다녀오면서 뭔가 은혜를 받은듯 해서


교회 사역에 동참했고 고맙게도 전도사님은


흔쾌히 날 끌여들여줬고 고맙게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형님 한분은


끝없이 도전을 주시고 훈훈한 마음을 나눠주셨고


그렇게 신나게 사람과 사람에게 휩쓸리고 일에 휘말리고


하다 2010년의 끝에 이르렀다.


 
지금도
어머니나 아버지께서는 말씀을 하신다.
남들 다 하는만큼 풍족하게 못남겨줘서
정말
미 to the 안

하다고.
그 말을 들을때마다 대꾸했지만
20대의 끝자락에 있는 지금도 똑같이 생각한다.
이렇게 건장한 체격과 건강한 몸을 주신게 오히려 감사하다고.
(덕분에 무슨 옷을 입어도 간지는 나요. 얼굴이 별로라 그렇지..)
 
여기에 적은게 다는 아니지만(왠지 안좋은것들만 적은듯한데?),
20대를 보내면서
참으로 다이나믹하게 지냈다는 생각이다.
정말 사는게 힘들어서 생을 이쯤에서 마감해야 겠다고 생각한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do you remember? '저는 여기까집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역사는 있듯이
세계 어딘가엔 나보다 더 힘들고 좋같이 사는 사람이
분 명 히

있을 거기 때문에 그래도 끈기를 갖고
여기까지 온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인생을 살면서
변하지 않는 생각이 딱 하나 있는데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렇게 아둥바둥 돈돈돈 하며 사는지,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인간이란 신께서 자유의지라는 아주 쓸모없는걸 주셨기 때문에
서로 질투하고 욕하고 헐뜯고 시기하고 죽이고 피해를 주고
못잡아먹어서 안달하고 깔아뭉개고 잡아쳐넣고
하는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사회고 세상이라는 무서운 굴레라고
어른들은 얘기를 하고, 했지만
난 그네들에게
'그걸 그렇게 만들어 놓은건 니네들이잖아?'


라고 반문해주고 싶다.
 
결론적으론
죽을때까지 꿈만 꾸는 몽상가로 남기도 싫고
현실에 타협하고 안주하면서 퍼지기도 싫다.
게다가 죽기는 더 싫다.
 
이제 20대는 끝나지만


이제 30대가 시작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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