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존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군 Mar 13. 2017

소란 01

"네가 ok 하면 우리도 그렇게 할게."

점심밥을 대충 라면으로 때운 뒤였다. 대기 1번으로 가까스로 들어간 대학은 휴강이었기 때문에 오후 여섯시까지 가야 하는 아르바이트 말고 그날 나의 일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전 열한시쯤 침대에서 일어나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늘 그랬듯이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끝내고 한숨 돌리고 있을 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부모님이 동시에 들어왔다. 겨울치고 퍽 따뜻했던 날씨였기 때문에 두 분의 옷이 그렇게 두꺼워 보이지 않았다.

"안 어울리게 영어를 쓰시고 그래요?"

잘 다녀오셨냐는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두 분은 날 안방으로 불러 앉혔다. 그리고 엄마 외투의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 종이 한 장을 펼쳐 내 앞에 내려놓으셨다.

"이게 뭔데요?"
"이혼서류. 도장만 찍으면 돼."

평소 사람 좋은 푸근한 인상이었던 엄마가 뭔가 작정한 듯 매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술이 입에 들어가기 전까진 늘 과묵한 아빠도 뭔가 안 어울리는 침묵으로 엄마와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엄마와 아빠가 나란히 있는 걸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어릴 적, 세 가족이 어딘가 길을 걷고 있을 때에도 늘 엄마와 나만 함께 걸었고 아빠 혼자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던 기억이다. 엄마에게 "왜 아빠는 항상 저렇게 혼자 앞장서서 걸어가?"라고 물으니, "앞에 뭐 위험한 게 있나 살펴보는 거야."라는, 예닐곱 살의 아들에게나 먹히던 우스갯소리로 날 알쏭달쏭하게 만들었었다.

"그래서, 그 결정을 지금 나한테 맡기는 거야?"

이윽고 각자의 변론이 시작됐다. 마치 평소엔 잘 걸어 다니지도 않으면서 선거 기간에만 길거리에 나와 자기를 찍어달라며 열심히 홍보를 하는 후보자들처럼. 하지만 지금 두 분에겐 그네들같이 함께할 든든한 패거리들이 없었다. 본인과 같은 색 옷을 입고 피켓을 연신 흔들어대며 춤을 추는 이들도,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스피커도, 받아도 한 번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길거리에 버리게 되는 작디작은 명함조차도.

"네 아비가 이혼하자고 하잖아. 내가 바람을 피길 했어 일을 쉬길 했어. 난 우리 세 식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번 살아보자고 이 악물고 버텼는데 이 집 산거 가지고 이혼하쟨다. 아니, 너 장가갈 때 이런 빌라라도 하나 손에 쥐여주려고 산 건데 그게 그렇게 잘못이니?"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랐다. 스무 살 아이들이 그렇듯, 대충 학교 다니면서 휴강 기간엔 집에 손 벌리지 않을 정도의 급여를 주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 바빴기 때문에.

"아니, 이 집 산 거랑 아빠가 화가 난 거랑 두 분 이혼하는 게 다 무슨 상관인데?"

연관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세 가지에 대해 내가 물었다.
이 집은 아빠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 샀다는 걸 그때 알았다. 어릴 적부터 다른 아빠들보다 유독 유기적이었던 우리 아빠의 근무환경 때문에 이 집에 오기 전까지 여기저기 이사만 일곱 번 정도 다녔고 학교도 여러 번 옮겨야 해서 살가운 친구들을 사귈 기회가 남들보다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빠는 아빠 이름으로 대출받은 게 그렇게 화가 나신 거고?"
"아니, 누가 대출받아서 이 집 산거 가지고 그러냐? 나한테 한 마디 언질이라도 해 줬으면 내가 이러냐고. 왜 나 몰래 도둑질하듯이 대출을 받아서 이 집을 덜컥 산 거냐 이거지."

집에 들어오고 나서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연신 담배만 피우고 있던 아빠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럼 정리해 보면 엄마는 어떻게든 세 가족 살아 보려고 아빠 몰래 아빠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 이 집을 산 거고, 아빠는 엄마가 아빠한테 한 마디도 안한 게 섭섭하셔서 이혼을 하시겠다고 벌써 두 분이 법원 같은 데도 다 다녀오시고 한 거야? 여기에 도장만 찍으면 이제 딱 갈라서는, 그런 거야?"

엄마 쪽에서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야, 난 할 만큼 했다. 너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 안 듣게 하려고 지금까지 산 거야. 딱 너 스무 살 될 때까지만. 본인이 성질이 나서 같이 살기 싫다고 하는데 뭐 어쩌겠어."

생각해 보면 그랬다.
이혼을 먼저 이야기할 사람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 아닌가? 아빠는 이렇다 할 직업 없이 늘 용역 사무실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엄마와 20년을 살아온 사람이다. 결혼하기 전에 가까스로 아는 사람에게 용접 기술을 배워 굶어죽게 하지는 않겠다며 엄마에게 프러포즈를 했다고 들었다. 젊은 시절, 늘 술에 절어 고주망태처럼 살던 아빠가 그때만큼 믿음직스러워 보인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마땅한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용역에서 용접을 하는 곳에 배치받기란 열 번 중에 한두 번쯤이고 나머지는 그저 허드렛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기 일쑤였다고 한다. 간혹 아는 사람의 일을 부탁받아 몇 달이고 출장 같은 걸 다니거나 공사 하나가 다 끝날 때까지 한 군데에 묶여 용접 일을 하던 경우에는 해당 임금이 들어오면 바닥이 나, 주머니에서 동전 소리가 날 때까지 흥청망청 쓰다가 미안함이 잔뜩 묻어있는 얼굴로 집에 들어오는 게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리곤 엄마에게 월급을 못 받았다느니, 사장을 잡아서 돈을 받아야 하는데 잠적했다느니 하던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보겠다고 엄마는 본인 명의로 대출을 받아 가면서 집안을 혼자 유지했었고 친인척들에게 싫은 소리를 해가며 그때그때 조금씩 도움을 받으며 생계를 유지해왔다고 한다.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그 아주 잠깐 사이에 나는 생각했다.
아빠가 내 앞으로의 삶에서 지워진 삶이 어떨지를. 불현듯 행보다는 불행이 눈앞을 가려왔다. 20여 년 동안 엄마를 괴롭혀온 존재를 지금 사라지게 할 수 있는 힘이, 그 권리가 나에게 과연 있는가. 나에게 남아있는 아빠에 대한 추억도 좋았던 기억보다 나빴던 기억이 많았다.

비가 참 많이 오던 고3 겨울, 내 손으로 선택해 간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3년 동안 배운 건 납땜질과 어떻게 매를 맞아야 덜 아픈지를 알아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문득 인문계 학생들의 교과 과정이 부러워, 무심코 수능을 보겠다고 담임선생님을 졸라 수능 대비 문제집을 과목별로 하나씩 사서 집에서 그 무수한 외계어들과 씨름하던 때였다. 집 전화벨 소리를 듣고 하나마나 했던 공부를 잠시 멈추고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저편에서는 빗소리와 다급하고도 한심스러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사거리인데, 너희 아버지 약주 드시고 쓰러져 있다. 모시러 올 수 있냐?" 어린 마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근처에 있는 우리 가족이 다니던 개척교회의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분은 차가 있으니까. 사정을 설명하고 목사님과 함께 교회의 봉고를 타고 현장에 도착해서 보니 비를 쫄딱 맞고 길에 누워있는 아빠가 보였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았던 후유증 덕분에 한쪽 다리가 불편하시던 교회 목사님은 나와 힘을 합쳐 아빠를 차에 싣고 우리 집까지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거실 한복판에 드러누워 춥다고 덜덜 떨던 아빠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목사님께는 죄송하다고 감사하다고 몇 번이고 인사를 드렸다. 곧 성인이 되던 때의 나였지만 창피함보단 막연함이 더 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사님을 불렀었던 기억이다. 그 당시 우리 집 근처에 살던 친척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아빠는 늘 술에 취하면(집에 들어오던 경우에만), 우리 엄마가 싫다고 했었다. 그 이유는 뚱뚱하고 예쁘지 않아서. 그래서 돈만 생기면 밖으로 나가 쓰기 바빴고 가족이라는 단어는 등한시하기 일쑤였다. 행여 취기가 사라지기 전에 집에 들어오면 엄마에게 손찌검은 기본이고 통 잠을 자지 않는 바람에 엄마와 내가 적잖이 고생을 했었다. 아빠에게 쌓인 스트레스와 울분을 엄마는 그대로 나와 음식에게 풀었고, 그때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엄마에게 매를 맞거나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그래서 가족 몰래 친구네 집에서 하루 이틀 신세 지다 집으로 돌아오는 식의 중, 고등학생 시절의 흔한 가출도,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운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하는 소소한 비행도 나의 머릿속엔 없었다. 아빠가 술을 먹고 귀가한 다음날엔 그저 눈치를 보며 하루를 순탄하게 잘 비껴나가기만 하면 됐었다. 대개는 그러지 못했지만.

머리가 조금 커진 다음엔 엄마에게 주정을 부리는 아빠를 향해 그만 좀 하시라고 엄마를 거들었다가 의자로 맞았던 기억도 있다. 엄마가 평온해야 내가 평온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이 기억이 눈앞을 스치자마자 나는 대답했다.

"도장 찍으세요."

얼마간의 정적.

"찍으세요. 두 분 뜻이 그렇다면야 난 갈라서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해. 아빠 때문에 지긋지긋한 인생을 산 엄마도 불쌍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홧김에 이혼을 생각한 아빠도 어이없어. 근데 말을 꺼낸 건 아빠라며. 난 찬성."

순간 멍하던 두 분은 이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셨고, 아빠는 벌떡 일어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엄마와 나는 그런 아빠를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 너희 둘이 어디 한 번 잘 살아봐. 내가 사라져 줄게. 나만 없으면 잘 산다 이거지? 그래, 어디 한 번 잘 살아봐. 나 찾지 말고."
"아니, 어디 가시려고요?"

황급히 자신의 물건과 옷가지를 여러 가방에 대충 쑤셔 넣는 아빠를 보며 내가 말했다. 아빠는 더 이상 아무 말없이 짐을 싸,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 웬일인지 엄마는 계속 울고 있었고 나는 '내가 과연 선택을 잘 한 건가'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그날 그렇게 아빠는 우리를 버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