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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생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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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Mar 29. 2017

소란 02

그 뒤 학교는 다시 개강을 했기 때문에 나는 지난했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학업(과 술)에 몸을 싣고 서서히 아빠를 잊어갔다. 아빠가 없는 삶은 아빠가 있던 삶보다 훨씬 나은 삶이었고, 아빠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불편함을 느끼기에 난 이미 너무 나이가 들어있었다. 그래도 가끔 아까의 술 냄새와 술에 적당히 취했을 때 꼭 사가지고 들어오시던 집 앞의 4만 원짜리 양념장어가 그립긴 했다. 아주 가끔.

어느 날 아빠의 빈자리가 더 이상 빈자리로 느껴지지 않았을 즈음 엄마가 작심한 얼굴로 운을 뗐다. 그날은 아마 내가 입영통지서를 받은 주의 금요일 저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 만나는 아저씨 있어."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엄마는 식당 일이 없던 토요일에도 종종 이른 아침에 밖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곤 했으니까.

"누군데? 뭐 하는 사람인데?"
"엄마 친구 소개로 만났는데, 버스 운전하는 아저씨야."
"술은 좋아해?"
"어. 그런데 너희 아빠만큼 좋아하진 않아. 아무리 마셔도 정신 멀쩡해."

엄마와 나에게는 어느 날부터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술을 마시는 사람과 마시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근데, 왜?"

의구심이 들어 내가 물었다.

"너 이번에 군대 가기 전에 한 번 만나보고 싶대."

나는 여전히 의구심이 가시질 않았다.

"나 보는 건 모르겠는데, 언제부터 만났는데?"
"너희 아빠랑 헤어지기 1, 2년 전부터."

조금 어이가 없어서 다시 물었다.

"그 아저씨 때문에 아빠랑 헤어진 거야?"
"너는 너희 아빠가 돈을 얼마나 안 벌어왔는지 잘 알잖아. 그 돈 가지고 어떻게 사니? 엄마는 성실한 사람이 좋아. 너도 남자니까 해 주는 말인데, 남자는 성실한 게 제일이야. 집에 돈 잘 벌어다 갖다 주고 가족한테 잘 하는 거. 근데 돈 잘 갖다 주면 그게 가족한테 잘 하는 거야. 너희 아빠 봐봐. 술을 먹어도 집에 돈은 갖다 줘야지."
"그래서, 그 아저씨는 성실한 거 하나 보고 만나는 거야?"
"응. 생긴 건 좀 못생겼어. 그래도 엄마한테 잘 하고 성실하고 그래."
"그 아저씨 만나면 행복해?"
"응, 행복해."

그다음 날 저녁, 나는 그 버스기사 아저씨를 만났다. 아빠가 술에 적당히 취했을 때 사 오던 집 앞의 그 장어구이 집에서. 아저씨는 자기가 엄마를 잘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군대에 잘 다녀오라고, 군대 가기 전에 얼굴 보고 인사라도 한 번 하고 싶어서 보자고 했다고 한다. 아저씨는 사람 좋아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남자였다. 나는 그날따라 못 마시던 소주도 몇 잔 얻어 마시고 엄마를 잘 부탁드린다며 분위기 좋게 인사를 마쳤다.
그리고 입대 몇 주 전에 엄마가 나를 불렀다.

"너 군대 있는 동안 이 집에 엄마 혼자 있잖아. 일도 힘들고. 그래서 2년 동안 엄마가 쓸 생활비랑 네 학자금 대출 남은 거 갚아야 하거든. 그래서 다른 데서 대출 좀 받으려고."
"그래, 엄마 마음대로 해. 근데 왜?"
"근데 그동안 너희 아빠가 돈을 안 벌어다 줬잖니. 우리 세 가족생활비를 엄마 혼자 충당하기 힘들어서 대출을 여기저기 받느라 이번에 새로 대출받을 곳에선 대출이 안된대. 그래서 보증인을 세워야 하는데 친척들도 아무도 안 서준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나 보고 보증 서 달라고?"
"응. 얼마 안 돼. 너 군대 가있을 동안 엄마가 쓰고 다 갚을 거야."
"얼마나 받으려고?"
"2,000만 원 정도."
"그래 알았어. 뭐 어떻게 해야 돼? 어디 은행 같은데 같이 가고 그래야 하나?"
"아니, 내일 거기에서 사람이 집으로 온대. 서류에 네 인감만 찍으면 돼."
"그래, 알겠어."

어디에선가 우스갯소리로 보증은 가족끼리도 서지 않는 거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지만, 가족이니까 무시할 수 없었다. 문득 엄마가 만난다던 버스기사 아저씨라도 세우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각자 나름의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나한테 부탁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입대 날이 조금씩 다가오면서 대학 동기들과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하나둘씩 만나며 군대에 갈 준비를 했다. 남들 다 그렇듯이 친구들과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며 지냈지만, 술을 마시면 늘 술에 절어있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 집에 귀가할 즈음엔 반드시 맨정신으로 들어갔다. 아들은 아버지의 그들을 따라간다고들 하지만 난 정말이지 우리 아빠를 닮기 싫었다. 살면서 '술이 당긴다'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아, 원체 술이 약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리 마셔도 잘 취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 번 생각해 봤다. 술은 유전이라고 하던데 내 경우엔 간이 소화를 잘 못 시킨다나? 아무튼 몇 잔만 마셔도 얼굴이 금세 빨개져서 어디서 누구와 마시던 혼자 술을 다 마셨다는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지만 아빠와 나의 주량이 비슷하다는 전제하에 아빠가 술에 취할 정도로 마시던 이유는 뭐였을까. 그냥 정말 엄마가 싫고 집구석이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희망 없는 삶이 싫어서였을까. 지금에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언제고 전화를 걸어보니 휴대폰 번호도 바뀌었다고 음성 메시지가 알려줬기 때문에.

"내일 아저씨가 태워다 줄 거야. 부대 앞까지. 그리고 중간에 외삼촌이랑 외할머니도 태우고 갈 거야."

엄마의 말이다. 그 즈음 나의 삶엔 친가 쪽 사람들과의 왕래는 이제 끊겼다. 아빠가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굳이 관계를 이어갈 필요가 있겠냐는 엄마의 의사에 따라서.
평소 입던 옷과 메던 가방을 메고 신던 신발을 신고 나갈 준비를 했다. 이윽고 엄마와 함께 아저씨의 차를 타고 외할머니 댁, 외삼촌 댁을 들러 강원도 인근 훈련소 근처에 도착했다. 근처 감자탕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저씨와 외할머니와 외삼촌은 이미 만난 적이 있어 보였다. 외가 쪽 사람들에게 군대를 간다고 인사를 하지 않았던 것과 외삼촌과 외할머니만 이 자리에 있다는 건 외가 쪽 사람들의 외골수 같은 성격 때문이리라.

외삼촌은 어릴 적에 가끔 놀러 가면 기타를 치며 재미있는 노래를 많이 들려주던 인물이었다. 외가 쪽 엄마네 형제들이 모두 6남매인데, 그중에서 외삼촌은 막내였고 앞서 태어난 다섯 명의 형제들 중에 단연 총명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섯 명의 형제들이 외삼촌의 학창시절만큼은 든든하게 지지해 주고 지원해 줬다고 한다. 당신들은 고등 교육이나 심지어 초등교육조차도 제대로 이수하지 못했음에도 성인이 되기 훨씬 전부터 학업을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집안의 가계와 외삼촌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꾸준히 도와줬다고 한다. 외삼촌은 음악을 유난히 좋아해서 각종 악기들을 두루 섭렵했었고 공부도 학급 내에서 단연 톱이었다고 한다. 진로 문제를 두고 평소 취향대로 음악 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딴따라를 하다간 그간 형제들이 베풀어준 은혜를 제대로 갚지 못할 것 같아서 음악은 취미로 두고 경영학과인가를 졸업하여 한국은행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실로 개천에서 용이 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런 것들보단 재미있고 유쾌해서 외삼촌을 좋아했었지만.

"남들 다 가는 군대니까 너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외삼촌이 말했다.
"우리 손주가 벌써 군대 갈 나이가 됐구나. 제대하면 얼른 결혼 준비하고 증손자 보여줘야 한다?" 외할머니가 말했다.
"아저씨가 엄마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엄마 걱정은 하지 말고 아저씨만 믿고 건강하게 잘 다녀와라." 아저씨가 말했다.
"어디 가서 이런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데려올 거야. 엄마가 아들 사랑하는 거 알지?" 엄마가 말했다.

여러 사람들의 격려와 위로를 뒤로하고 연병장이라고 불리는 훈련소의 한복판에 섰다. 연례행사처럼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크게 하고 작은 건물에 들어가 지급받은 군복과 여러 자질구레한 것들을 들쳐 업고 본격적인 훈련소로 향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기초 군사 훈련 따위를 마치고 자대라고 불리는 곳에 가, 2년여 동안 남들 하는 만큼만 굴렀다. 군대라는 곳은 특수한 보직이 아닌 이상, 그리고 특별한 사회적 경험이 없는 이상 사람을 '평균'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지 않는, 말 그대로 '인간 평균화'라는 말이 적합한 곳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눈을 뜰 때 나도 눈을 떴고, 다른 사람들이 잠에 들 때 나도 잠에 들었다. 훈련을 하라면 훈련을 했고 휴가를 나가라면 휴가를 나갔다. 더구나 군 복무 기간 2년 1주 중에 1년은 철책선에서 근무를 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약간 다른 환경이었지만 그 정도면 꽤 무탈하게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을 했다는 기억이다.

휴가 기간 동안에는 엄마의 요청대로 우리 집과 아저씨 댁을 왕래하며 보냈다. 문득 엄마에게 왜 아저씨 댁에 가서 지내야 하냐고, 엄마는 왜 아저씨 댁에서 지내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나 없는 집에 혼자 있기 싫어서 아저씨 댁으로 가서 살고 있다고 했다. 휴가 기간에 쓰거나 입을만한 내 옷가지들과 컴퓨터 따위들도 아저씨 댁에 옮겨놨다면서. 제대 날에도 아저씨 댁으로 오라는 엄마의 부탁에 별생각 없이 아저씨 댁으로 가, 군복도 갈아입기 전에 아저씨에게 술 한 잔을 받으며 축하를 받았다. 대학 동기들을 만나기 위해 슬슬 일어나 봐야겠다는 나를 막아선 건 아저씨가 웃으며 내민 흰 봉투였다.

"이게 뭔가요?"

의아해하는 내 표정을 보고 재미있는지 아저씨는 연신 좋은 웃음을 흩날리며 나에게 대답했다.

"너 제대했으니까, 한두 달 쉬라고 용돈 주는 거야."

군대를 한번 밖에 다녀오지 않은 터라, '군대를 다녀온 이들에겐 다들 이런 시간이 필요한 건가?'라고 생각하면서 그 흰 봉투를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아저씨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우리 아들놈한테도 그랬어. 원래 군대 제대하면 다 그러는 거야."

당연하지만 아저씨도 엄마처럼 이혼한 사람이었고 당연히 자식도 둘 있었다. 두 사람 다 내 손위였는데, 누나는 이미 결혼을 해 아이가 벌써 둘이었고, 누나의 동생인 형은 문신 새기는 일을 한다 들었다.
엄마는 "어른이 주시면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거야."라는 진부한 대사를 내게 건네며 아저씨의 혼에서 흰 봉투를 낚아 채 내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군대에서 매달 조금씩 남겨뒀던 통장의 월급으로도 당분간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학 동기들을 만나러 가는 길의 공중 화장실에서 확인한, 아저씨가 건네준 흰 봉투의 액수는 꽤 많은 편이었다.

스물다섯 살이 된 내겐 흰 봉투 안에 신권으로 빳빳하게 들어있던 그 50만 원이 뭔가 불미스러운 짓을 저지르고 받은 수고비 같은 느낌과 아버지를 이제 그만 잊으라며 받은 위로금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쓰기가 조금 그랬지만, 오후에 대학 동기들을 만나 저녁을 먹고 전역 기념으로 술을 한 잔 하고 나니 그런 의구심 따위는 존재한 적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제대하고 아저씨 댁에서 지낸지 일주일째, 저녁을 먹고 이제는 집에 가보겠다며 종종 놀러 오겠다고 아저씨께 인사를 드렸다. 내 짐은 차차 우리 집으로 옮겨가겠다며 그동안 감사했다고 또 한 번 인사를 드렸다. 엄마는 먼저 가서 집 정리를 해 놓으라고만 하고 본인은 아저씨 댁에서 계속 지낼 건지 우리 집으로 돌아갈 건지 모호하게 말을 흐렸던 기억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아저씨 댁과 우리 집은 버스로 몇 정거장이면 도달할 정도로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아저씨 댁에서 계속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에는 수집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돈이 생기는 대로 꽤 열심히 모았던 음반들과 만화책들이 조금 있다. 나름 같은 또래들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유니크하고, 어찌 보면 쓸데없는 취미지만 나에겐 취미 따위가 아니었다. '열린 글방'이라는, 한국에만 있는 변종 책 대여점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때도 꾸준히 만화책을 사서 읽었고, 내 나이 또래들이 들으면 뇌가 마비될 것만 같았던 국내-해외 뮤지션들의 음반도 꾸준히 구입했다. 한동안 또 음악과 만화에 파묻혀 살 생각을 하니 몹시 설레었다.

우리 집은 빌라 3층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빌라를 마주 보고 섰을 때 두 집의 안방 창이 정면을 바라보며 가운데에 계단이 있어, 현관문을 열면 입주자가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보편적인 모양의 바라다. 우리 집 위층에는 우리가 이사를 오기 전부터 같은 동 빌라 거주자들에게 소위 '미친년'이라고 불리는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안방과 보일러실 앞에 밖으로 나와있는 자신만의 빨래 건조대를 설치해서 사계절 내내 밤이고 낮이고 이불이나 카펫 같은 긴 종류의 빨래만 걸어두어, 우리 집 밖으로 향하는 모든 창의 3분의 1을 가려버리는 이상한 건조를 해댔다. 우리는 한때 가족이 번갈아가며 윗집에 올라가 항의를 했었지만 '우리 집에서 빨래를 넣어놓는 게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당신네들도 밖으로 빨래 널지 않느냐'라는 해괴한 소리를 해 대는 통에 그대로 포기하며 살았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그러고 있나 위를 올려다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아주머니는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 안방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았다. 무심결에 4층을 올려다본 거였지만 분명히 3층인 우리 집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동을 헷갈렸나라는 생각에 빌라를 빠져나와 건물 옆에 쓰여있는 동을 확인했다. 우리 집이었다. 순간 드는 생각은 아빠였다.

'아, 아빠가 돌아왔구나.'

죽었다 깨나도 아빠는 아빠니까. '이래서 엄마가 아저씨 댁에서 내가 집에 돌아간다고 했을 때 별말이 없었구나.' 여러 생각을 하며 계단을 단숨에 올라가 아빠를 놀라게 하려고 현관문 자물쇠에 열쇠를 꽂았는데 들어가질 않았다. '뭐지? 아빠가 자물쇠를 바꿨나?' 몇 번을 꽂아도 열쇠가 들어가질 않자 현관문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걸 눈치챘는지 집 안에서 누가 현관문 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세요?"

어떤 남자의 목소리. 아빠가 아니었다. 당황한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갈피를 못 잡은 채 대답했다.

"여기 사는 사람인데요."

적막.

"뭐라고요?" 현관문 너머의 남자의 목소리에 짜증과 어이없음이 섞여있었다.
"여기 사는 사람인데요, 잠시만," 내 말이 끝나기 전에 현관문이 열렸다.

모르는 사람.
모르는 가구들.
모르는 신발들.

"누구세요?" 반바지에 민소매 차림의 남자가 나에게 물었다.
"여기 살던 사람인데요." 당혹감에 이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네? 여기 우리가 사는데요, 작년부터." 반바지가 말했다.
"작년이요?"
"네." 무덤덤한 대답.
"아, 저, 몇 년 전에 여기 살던 사람인데요. 아니, 여기가 우리 집인데요, 대출받아서 샀던 집인데..."
"모르겠고, 저희는 주인집이랑 전세 계약해서 내년까지 살아요. 주인집에 전화해 보세요."

반바지는 내게 이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상황을 파악해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파악된 건 없다.

'엄마가 세를 준 건가?'
'아저씨 댁에 내 짐은 옷 몇 개랑 신발 하나랑 컴퓨터 밖에 없는데.'
'뭐지?' '뭐지?'

빌라를 빠져나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우리 집 뭐야?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소리야, 너 어딘데 지금." 의외로 차분한 엄마의 대답.
"우리 집 앞이야. 뭐야, 이거?"
"엄마가 지금 그리로 갈게. 거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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