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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Jun 06. 2017

목소리의 형태

피해자가 되어버린 가해자의 이야기

자신의 못난 부분도 감싸안고 앞으로 나아가는거야.












피해자가 되어버린 가해자의 이야기



어느날 전학 온 니시미야 쇼코라는 아이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

이미 학급 전체의 분위기를 주무르며 살던 이시다 쇼야는 무심한 마음으로 그녀를 매일 괴롭힌다.

결국 니시미야는 전학을 가버리고 '왕따' 의 가해자가 되어버린 이시다는 6년여 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다가

무턱대고 니시미야를 찾아가 용서를 구한다는 내용의 영화.



영화 목소리의 형태는 왕따의 가해자가 '일부러' 그럴 의도는 없었다는 걸 피력한다.

일단 초등학교 6학년때의 일이고 피해자인 니시미야는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하지 않은채 빈번히 생긋 웃고 마는게 전부다.

이시다가 그 시절에 니시미야를 괴롭히려던 감정은 '호기심' 과 '다름' 정도다.

그걸 니시미야도 아는지 보청기를 여덟번이나 잃어버리고 나서야 전학을 결심한다.


초등학생 시절, 이시다의 주변엔 니시미야를 괴롭히는 그를 돕는(?) 조력자도 있었고 알게 모르게 반 아이들 전부 니시미야의 편을 들어준 적은 없었다.

(딱 한 명, '사하라' 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금세 전학을 가버리게 된다)

전부 미필적 고의 혐의를 함구하고 흘러간 학창시절이었는데

누군가에겐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픈 사건이었고

결과적으로 가해자들은 6년이 지난 시점에도 발 뻗고 살지 못하게 된다.


이런것들에 굳이 정치적 해석을 하자고 달려드는 천치들은 차치하고

어린시절에 나도 모르게 무심코 뱉은 한 마디가 누군가에겐 큰 상처가 됐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일 수록 말을 조심하고 되도록 뾰족한 말들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나이를 먹을수록 다짐하게 된다.



목소리의 형태는 원작이 있는 애니메이션이지만 굳이 원작을 찾아보게되진 않을거 같다.



이 영화에서 건진건,

(영화의 주제와는 별개로)한없이 따사로웠던 어린시절에 대한 향수와

누군가를 좋아하면 생기는 두근대는 마음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

일본은 애니메이션이나 실사영화나 소설이나 이런 감정표현에 대한 연출이 정말 기가 막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연애' 라는 감정을 너무 경제적인 측면과 육체적인 관점에 큰 비중을 두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그동안 물질적인게 우선시되는 못된년들만 만나와서 그릉가?)


앞으로도 둘 다 무시하진 못하겠지만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다른 건 모두 필요없다는,

'사랑' 이라는 단어가 지닌 본질적인 시각에 초점을 맞춰 연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내가 진심으로 '사랑' 하는 대상이라면

내 마음이 그녀에게 알아서 반응하기에 배려해주고 이해해주고 둘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걷기만 해도 행복감이 느껴지지 않을까

라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생각이 들었다.


연애를 끊은지 2년이 넘어가는 시점에

'만날거면 진심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 라는 듯 뒤통수를 때리는 영화다.

(물론 영화의 주 내용과는 거리가 멀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예쁜 화면과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의 감정을 너무 잘 그려냈기에 이런 생각까지 저절로 들게 만든다)



아무튼 이 영화, 왕따의 이야기이지만 뭔가 애틋하다.












+

말을 하지 못하는 니시미야는 혼자 그림체가 다른 것 처럼 느껴질 정도로 너무 예쁘게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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