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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May 20. 2018

영화 버닝 후기

아프리카 부시맨들에겐 두 분류의 사회적 개념이 있대.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리틀 헝거는 말 그대로 단순히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이래.





재미만 있으면 난 뭐든지 해.





난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워요. 지저분해서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들. 난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거죠.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 여기에서 베이스를 울려줘야 돼요.





너무 가까우면 안 보일 수 있어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이창동 감독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손에 넣었을 때.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는 '종수(유아인)'. 우연히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살던 '해미(전종서)' 를 만나고 '너 나보고 어릴 때 못생겼다고 했다' 는 (지금은)성형해서 예뻐진 그녀와 섹스를 한다. 돌연 아프리카에 여행을 다녀오겠다며 해미는 사라지고 그녀의 원룸에 해미와 함께 살고있는 고양이 '보일이' 에게 밥을 주라는 임무를 받아든 종수는 해미가 없는 해미의 방에서 해미를 그리며 자위를 한다. 그녀가 귀국하던 날, 염증처럼 달고 온 '벤(연상엽)' 에게 이유모를 불안감과 불신, 그리고 열등감을 느끼는 종수는 해미가 사라진 이후 모든 탓을 벤에게 돌린다는 이야기.



이창동 감독이 8년여 만에 잡은 메가폰이 고맙게도(!) 젊은이들을 향하긴 했는데 그 사이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 가 낑겨있다. 그래서 더욱 이창동 스럽지 않고 그렇다고 무라카미 하루키 스럽지도 않은 희안한 하이브리드 생명체 같은 영화가 탄생했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이창동과 하루키가 요즘 젊은이들을 보는 시선 같기도 한 영화다. 원작 소설은 1984년에 발표된 단편이니 그렇다 쳐도 이창동은 각본에도 손을 대면서 취업난에 허덕이고 카드값에 시달리면서도 모든 걸 다 훌훌 던져버리고 그놈의 힐링 좀 한답시고 또 다른 카드값을 늘려만 가며 끝내는 현실에서 말 그대로 도망치고 말아버리는 젊은이들을 이야기한다. 그 중점에 원작의 '모호함' 과 '은유(메타포)' 가 있다. 그래서 영화는 끝날 때 까지 확답을 하지 않은채 어중간하게 결말을 맺는다. 종수가 선택한 벤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물증과 확신을 만났을 때 앞 뒤 잴 것 없이 행동에 옮긴 것은 어찌보면 무책임한 결말일 수도 있다. 열린 결말까지는 아니고 종수가 믿는 걸 몸소 실천 한 것 뿐. 종수가 맞는지 틀린지는 관객의 몫이긴 하지만.



영화 버닝은 개봉하기도 전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굉장히 많은 작품이다.


칸에서의 흥행이 그 첫 번째요, 두 번째는 스티븐 연의 욱일기 논란(하트 하나 눌렀다가 호감형 배우가 한 순간에 나라를 배신한 매국노가 되었다), 그리고 유아인의 군입대-페미니스트 논란이다. 이 모든 걸 차치하고 영화를 있는 그대로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썩 많지 않은 대한민국이긴 하지만 어찌됐든 그네들의 세계에서 마음껏 먹고 마시고 취하는 계층의 인간들이라 딱히 관심은 없다.



영화에서 입소문이 유독 많았던 전종서라는 여배우는 내가 보기엔 매력이 1도 없다.





각본과 감독직을 모두 맡은 이창동 감독이 잘못 계산한 건지, 아니면 원작 소설이 워낙 옛날 작품이라 그런지 해미는 이런류의 예술영화에서 우리가 익히 보고 들어왔던 여배우의 모든 클리셰를 그대로 답습하는 어이없는 캐릭터다. 노을을 보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 둘 앞에서 뜬금없이 가슴을 드러낸채 춤을 추는 장면이나 알듯 모를 듯 시 같은 대사를 치는 모든 것들이 너무 한심해서 답답할 지경이었다. 이 부분은 하루키의 모든 장편소설을 섭렵한 나의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익숙함 때문일 수도 있겠는데, 실제 스크린(그것도 한국 영화에서)에서 살아있는 존재로 마주하니 치가 떨릴 정도로 뻔하디 뻔한 여자 캐릭터로 보였다.



대신 스티븐 연이 아닌 '연상엽' 의 존재는 꽤 굉장했다.






영화 '옥자(2017)' 에서 어설픈 한국말로 코믹함을 보여줬던 연상엽은 영화 버닝에선 엄청나게 능숙한 한국말로만 대사를 친다(테이크를 몇 번이나 끊어갈 지언정). 그리고 친절한 듯 냉소적인 듯 타인에게 딱히 선을 긋지 않는 태도 또한 그의 선한 마스크와 잘 어울려, 영화의 주축이 되는 중심점 같은 역할을 잘 해냈다.




유아인이 연기한 종수는 정말이지 끝내줬다.





문예창작학과를 전공한 아마추어 작가로서 삶을 살아내며 글을 쓰곤 한다는데 실제 글을 쓰는 장면은 딱히 많이 나오지 않고 시종일관 어눌하고 답답한 모습의 종수를 연기하는데 늘 열을내고 폼만 잡고 악다구니를 쓰는 캐릭터만 보다가 이런 역할을 맡은 모습을 보니 '연기 참 잘한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벤이 종수에게 말한 비닐하우스의 존재는 실제 비닐하우스 인지 아니면 그가 태우는 떨(마리화나)인지 그것도 아니면 인간을 의미하는 건지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영화가 끝이난다.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결말이고 스토리였다. 개인적으로 요딴 의뭉스러운 결말을 지닌 영화를 정말이지 혐오하는 편이다. 이런 은유나 모호함으로 치장된 영화들은 종종 칸같은 예술영화 시상식에 초대되거나 진출하거나 상을 받기 마련인데 이런게 예술이라면 개나 소나 영화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하는게 맞다는 생각이다. 딱히 예술영화나 소규모 자본이 투입된 영화들을 욕하는 게 아니다. 확실히 정답을 보여주지는 않으면서 의심스러운 상황이나 장치들을 깔아놓으며 믿으라고 보라고 해놓고 돌연 엔딩 크레딧을 올려버리는 버닝 같은 영화를 싫어할 뿐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와서 원작 소설을 읽어야겠다 생각이 들어 교보문고 바로드림으로 신청해 놨다.


원작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믿음을 실행에 옮기지 않은 채, 결말이 아예 열려있다고 한다. 차라리 그런 엔딩이 나았다는 생각이다. 이창동 감독은 곡성이 부러웠던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좀 많이.

(심지어 촬영감독은 영화 곡성의 홍경표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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