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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발의 오르페우스 - 필립 k. 딕

by 노군

진흙발의 오르페우스

무한자
보존 기계
희생양
포기를 모르는 개구리
갈색 구두의 짧고 행복한 생애
참견꾼
유모
쿠키 할머니
존의 세계
화성인은 구름을 타고
그녀가 원한 세계
머리띠 제작자
기념품
참전 용사
재능의 행성
전쟁 장난감
진흙발의 오르페우스

작가노트
옮긴이의 말











근 3개월여 만에(...) 읽은 필립 k. 딕의 단편선, 진흙발의 오르페우스.

늘 하는 이야기지만 필립 k. 딕의 작품들은 장편 보다는 단편이 더 빛을 발한다. 북미의 미드 시리즈인 '어메이징 스토리' 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지만 그야말로 '어떻게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감탄과 놀라움의 연속인 필립 k. 딕의 단편들. 장편들을 읽다보면 필립 k. 딕의 약점인 '긴 호흡을 요구하는 장편에선 죽을 쑤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필립 k. 딕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겐 언제나 단편들을 권하고 이 글을 읽는 sf덕후가 될 당신 역시 장편 보다는 단편들을 읽음으로써 그와 더 친해지길 바란다.

일례로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를 제작할 당시 인터뷰에서 "'PKD(필립 k. 딕의 줄임말)' 의 팬들에겐 굉장히 불만 투성이인 영화일 수 있다. 우리는 그가 주조해낸 미래상의 이야기에서 극히 일부분만 떼어내어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라고 밝힌 바 처럼 소재와 소스, 그리고 이야기에 대한 아이디어는 필립 k. 딕의 단편들에서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고 장편에서는 이야기를 더 길게 끌어갈 재주가 없는건지 아니면 약물복용의 기복에 따라 집필하는 텐션이 각기 달라서 엉망진창인 건지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야' 하는 감상을 자주 하게 된다. 그의 장편을 읽다 보면 말이다.


아무튼 여전히 필립 k. 딕의 책을 내주는 고맙고 감사한 현대문학에 속해있는 폴라북스 임직원(엥?) 님들과 출판을 결정한 그들의 노력과 선택에 애정과 존경을 가득 담아 깊은 헌사를 보낸다.







진흙발의 오르페우스는 일전에 읽었던 필립 k. 딕의 단편집,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폴라북스)' 와 겹치지 않는 작품을 선정하는데 공을 들였다고 한다.

%22https%3A%2F%2Fblogthumb.pstatic.net%2F20140720_166%2Frealnogun_1405863429942eymjP_JPEG%2FNaverBlog_20140720_223708_00.jpg%3Ftype%3Dw2%22&type=ff120"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 필립 k. 딕 출판사 '현대문학' 속에 들어있는 '폴라북스' 에서 2011년 부터 2013년까지 필립 k. 딕(이하 pkd) 의 소설... realnogun.blog.me



그렇다 해도 아주 예전에 영세한(?) 출판사에서 왜 발행했는지 통 이유를 모르겠는 작은 분량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는 단편집들과 몇 개씩 중복되는 작품들이 있다고 해도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낸 폴라북스의 선택에 다시 한 번 멋지다고 말해주고 싶다.


옮긴이의 말을 보면 되도록 유명하지 않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필립 k. 딕의 단편들을 골라 담아냈다고 하는데 내가 한 번 읽어본 것 같은 '전쟁 장난감' 말고는 거의 다 처음 보는 필립 k. 딕의 단편 작품들이어서, 매 작품을 읽을 때 마다 sf의 성찬을 음미하듯 한 편 한 편 아끼고 맛있게 잘 즐겼다.

내가 (아마도)90년대에 알게된 필립 k. 딕의 글들과 2018년에 읽은 그의 단편들의 차이는 전혀 없었으며 어디하나 촌스럽지도, 시대에 뒤떨어지지도 않은채 자신만의 텍스트로, 그리고 그만의 무드로 꾸준히 새로움을 이야기하는 글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단편집 되시겠다.

sf장르를 아직도 '판타지' 섹션에 꽂아넣는 멍청한 서점 직원들이나 사이언스 픽션을 두고 허무맹랑한 만화같은 이야기라 치부하는 몇 몇 꼰대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듣도보도 못한 소재들로 이번에도 나를 감동시키고 감격시켰다. 물론, '어메이징 스토리' 에 딱 어울리는 소소한 sf들도 여럿 있었으나 지금 당장 영화로 제작해도 손색없을 전무후무한 하드sf 들도 여럿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sf작가는 내게 필립 k. 딕이 시작이자 끝이며 그보다 더 위대한 사이언스 픽션 장르 전문 작가는 아직 보지 못했다. 폴라북스는 앞으로도 영원히(!) 그의 숨겨져 있는 단편들을 골라 단편집으로 꾸준히 내 주었으면 좋겠다(더불어 필립 k. 딕의 전기도 함께).


아래는 각 단편들에 대한 짤막한 감상들이다.










무한자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행성을 찾아 떠난 우주인들이 지구로 귀환하던 도중 방사선에 노출되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외계인의 형태로 '진화' 한다는 이야기. 어릴 적 부터 ufo를 타고 지구를 들락거리는(?) 외계인이라 부르는 존재들은 사실은 미래의 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늘 했었는데 그 이야기를 절반 정도 맞춘(?) 작품이다. 우주에서 벌어지는, 무한히 오픈된 공간에서의 공포와 미지의 광선에 쏘여 인간에서 다른 존재로 진화 한다는 이야기는 sf장르에서 간간이 쓰이는 장치이다. 다만 그 모든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영화들이 함축되어 있는 이 소설이 1953년에 발표된 걸 기억하자.


"솔직해 지자고.
우리는 강렬한 방사선에 직격당한 괴물 같은 암세포들이야.
인정하자고.
우리는 인간이 아니야.
더는 인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무한자 23p




보존 기계

필립 k. 딕은 1928년 12월 16일에 태어나 1982년 3월 2일에 사망했다. 청소년기에 2차 세계대전을 직간접 적으로 경험한 셈이다. 그런 그에게 세계전쟁이라는 사건은 그의 소설에 여러 형태로 살아남아 뿌리박히게 되었는데 이 '보존 기계' 는 전쟁중에 사라져만 가는 전 세계의 유명한 예술품들, 음악 작품들 등을 보존 하기 위해 살아있는 생명체로 변환하는 기계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서 '기계'란, 동물의 생존력에 기대, 음악(예를 들면 바그너의 교향곡 악보)이나 예술품을 동물로 치환하는 기계를 뜻한다. 역시나 동물 특유의 생존 본능에 의해 보존을 하기 위해 창조된 동물들은 각기 원하는 대로 진화하게 되고 그에 상응하는 소동이 이뤄진다는 내용.


음악을 생물로 변환할 수 있다면,
발톱과 이빨을 지닌 동물로 만들 수 있다면,
음악은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보존 기계 47p




희생양

지구에서 생존하고 있는 인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생물(특히 곤충)들이 '신' 이라 여겨지며 인간들을 학살하기 전에 인간 하나를 희생양 삼는다는 이야기. 특히 거미가 인간의 친구로 등장하는 지점이 귀엽고 재미있다.



"한 10억 년 전 까지만 해도 그들(개미)은 지구를 꽤나 잘 경영하고 있었어.
사실 인간은 다른 행성에서 온 존재라네.
어디냐고? 나도 모르지.
인간은 이곳에 착륙해서 그들이 훌륭하게 경작해놓은 지구를 발견했다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지."

-희생양 67p




포기를 모르는 개구리

'개구리 통로' 실험을 하는 한 대학 교수. 통로 출구 쪽에 역장을 만들어 놓고 입구 쪽엔 열을 가한다. 뒤에서 불어오는 열기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개구리는 역장에 의해 한 번 뛸 때 마다 크기가 작아져, 결국 제논의 역설인 '움직이는 것은 사실 정지해 있는 것과 같다' 는 명제를 손수 증명해 보려 라이벌 동료 교수를 개구리에 이어 통로에 집어 넣어 버리고 거기에 들어간 교수는 역장에 의해 결국 원자 크기로 작아져 버린다는 이야기. 이 단편을 보고 당연히 마블의 '앤트맨' 이 떠올랐다.


그는 계속해서 뛰고 또 뛰었다. 얼마나 뛰었는지도 잊어버렸다.
그는 바위 가장자리에 서서, 다시 훌쩍 몸을 날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계속, 계속, 절벽 아래로, 흐릿한 불빛 속으로.
바닥이 없었다. 그는 계속 떨어지기만 했다.

-포기를 모르는 개구리 85p




갈색 구두의 짧고 행복한 생애

'생명 활성기' 라 불리는 발명품으로 온갖 무생물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한 박사. 제목 그대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된 갈색 구두는 자신의 짝인 여성화를 찾아 떠난다. 앞서 나왔던 '보존 기계' 의 주인공들이 똑같이 등장해, 연작 에피소드 같은 느낌의 과학 소설.


"이제 글렀어." 그가 말했다.
"생명 활성기가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지. 법칙 자체가 틀렸으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짜증 충분의 법칙 말일세. 당연한 소리지만."
"그게 뭔데요?"
"이 법칙의 착상은 이런 식으로 찾아왔다네. 어
느 날 해변의 바위에 앉아 있는데, 내리쬐는 햇볕이 지독할 정도로 덥더군.
나는 꽤나 불편한 기분으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
순간 내 옆에 있던 조약돌 하나가 자리에서 몸을 뒤척이더니,
그대로 꿈틀거리며 기어가지 않겠나, 태양열 때문에 짜증이 나버린 거지."
"정말로요? 조약돌이요?"
"그 즉시 짜증 충분의 법칙의 영감이 내게 찾아왔다네.
이게 바로 생명의 기원인 게야.
아주 먼 과거에, 무생물 한 조각이 뭔가에 제대로 짜증이 나서 분노를 가득 품은 채로 기어가기 시작한 거지."

-갈색 구두의 짧고 행복한 생애 93p




참견꾼

차원 포털을 열고 미래에서 무언가를 꺼내올 수 있는 '국자'. 정치과학위원회에서는 일종의 속임수를 써서 국자를 익히 알고있는 용도가 아닌, 미래상을 보는 카메라로만 사용한다. 폐허가 된 미래를 본 주인공들이 시간 자동차를 만들어 시공을 초월해 미래에 가, 왜 세계가 멸망하게 됐는지 관찰하는데, 기묘한 진화를 이룬 나비 무리에게 미래의 인류가 전멸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고 현재로 돌아온다. 그 돌아온 '현재' 의 시간 자동차 안에는 나비의 고치들 투성이였다. 우리가 익히 아는 시간 여행에 대한 이야기이고 결말이지만 현재가 변하면 미래도 변한다는 공식은 똑같이 존재하며 결국 시간 자동차로 인한 시간 여행 덕분에 '현재' 에서 '미래' 의 인류 전멸이 시작된다는 이야기.


"자네를 이해할 수가 없군.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국자' 를 사용한다니.
자네가 미래에서 물건을 건져 올리면
자동적으로 현재에 새로운 요소를 추가하게 되는 셈이지 않은가.
그것 때문에 미래가 바뀌게 된다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변화의 순환을 시작하는 걸세."

-참견꾼 111p




유모

인간의 시중을 드는 로봇 '유모(nanny)' 에 대한 이야기. 의도적으로 유모 로봇 끼리 전투(...)를 벌이고 보다 더 나은 사양의 유모 로봇을 권장하는 개발사의 이야기를 보고 얼마전 배터리 게이트 덕분에 주가가 곤두박질 쳤던 애플이 떠올랐다.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떤 가전제품이든 수명이 있기 마련이고 유기적으로 생동하는 것 같은 스마트폰, 컴퓨터 같은 제품군은 신규 시스템 업데이트나 버젼업 서비스를 받으면 새로 발매될 기업의 신제품에 비해 '(기업들이 뿌린 업데이트에 의해)의도적으로' 성능이 낮아진다는 사실.


"내 말 잘 들어." 톰은 이를 악 물고 말했다.
"매번 더 큰 제품을 내놓잖아. 원하는 게 그거지?
매년 새로운 모델이,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고 나오는 거야.
너희도, 다른 회사들도...
서로를 파괴하기 위해 더 강력한 장비를 장착한 내니를 만드는 거라고."

-유모 147p




쿠키 할머니

과자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접근해(?), 자신이 직접 만든 쿠키를 먹이는 대신 할머니는 젊음을 되찾는 다는 이야기. 우리가 알고 있던 '헨젤과 그레텔' 이나 잔혹동화 같은 이야기로, 소년의 '탐식' 을 이용하는 뱀파이어 같은 소재가 참 재미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우아한 곡선이 눈에 들어왔다.
손톱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머리카락도,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이 목선을 따라 드리워졌다.
그녀는 자신의 뺨으로 손을 옮겼다.
주름살은 사라지고, 탄력 있고 부드러운 피부가 손가락을 맞이했다.

-쿠키 할머니 163p




존의 세계

'발톱' 이라 불리우는 존재들에게 지구를 내어주고 달에 숨어 사는 인류. 존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둔 주인공은 아들이 자폐증에 가까운 질병을 앓고 있다 생각하지만 알고보니 미래를 보는 예언자 같은 존재였다는 이야기. 기계에게 패배하여 시공간을 넘나드는 인간들의 필사의 생존을 다룬 작품이다. 시대적 안정을 찾을 희망을 보았을 때, 인류가 당연히 저지르는 '기계' 들에 또 다시 기대려 하는 지점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 상황이 역사의 일부가 된 것은 아닐까?

-존의 세계 207p




화성인은 구름을 타고

제목 그대로 화성에서 구름을 타고 지구로 내려오는 화성인들에 대한 이야기. 그저 황폐해진 화성을 떠나 지구에 평화롭게 정착하고 플 뿐인 화성인들을 가차없이 죽여대는 지구인들의 이기적인 마음을 재미있게 잘 그려냈다.


"대충 이 삼 년 정도야. 예전처럼 자주 오지는 않지.
수백 마리가 구름처럼 떼를 지어서 화성에서 흐러온단다.
전 세계로... 마치 낙엽처럼."

-화성인은 구름을 타고 225p



그녀가 원한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중심은 오직 나' 라는 발상에서 시작한 소설. 그 곳에서 일개 주변인이나 필요인이 되어 휘발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고있다. 마치 영화 트루먼쇼(1998)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주인공에게 몸소 실천하는 여자 주인공이 매력있다. 존재 자체의 모호성이라는 공포를 다뤘다. 앞의 내용들을 전복시키는 후반부의 반전 또한 매력적.


"그렇다면 나 또한 수많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셈이로군요.
여기에 약간, 저기에 약간, 내가 필요한 위치에 따라서요.
이를테면 지금 이 세계에서 여기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이 필요로 할 때 짠! 하고 등장하기 위해서
25년 동안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거지요."

-그녀가 원한 세상 245p




머리띠 제작자

정신감응자에 대한 소설. 정부가 개개인의 사생활에 간섭하고 한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를 통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으스스한 소재의 이야기이다. 군체의식과 집단지성을 소유하고 있는, 후천적 정신감응자들이 '돌연변이' 로 까지 여겨지며 그에 대항하는 '머리띠' 를 착용하면 정신스캔이 불가하다. 세상을 씹어 삼킬 것 같은 힘을 소유했던, 마다가스카르 수소 폭발로 발생한 단일 집단이었던 정신감응자들은 생식불능이라는 처참한(?) 엔딩을 맞는다.


"대부분의 정신감응자들은 자신들이 자연이 점지한 인류의 영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정신감응 능력이 없는 인간은 열등한 종족인 거죠.
정신감응자들이 인류의 다음 단계라고, 호모 수페리오르 라고 생각합니다.
우월하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는 것도 당연하다는 거지요.
우리를 위해 모든 결정을 내려주겠다는 겁니다."

-머리띠 제작자 285p




기념품

인구와잉과 환경파괴로 황폐해져 가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은하를 발견하러 떠난 윌리엄슨. 지구의 기술은 나날이 발전해, 마침내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난 윌리엄슨의 후손들이 뿌리내린 곳을 300년만에 발견했다. 하지만 하나의 지성체 덩어리가 된 지구인들에 비해 중세시대의 환경과 사회를 고수하려는 윌리엄슨의 후손들을 가차없이 죽여버린다는 이야기. 또 다시 지구의 역사를 반복하기는 싫다는 지구측 사람들의 의견이 참 재미있었다. 소설의 제목이 된 '기념품' 이 등장하는 엔딩씬도 매우 인상적.


"중계 센터가 왜 모든 행성에 보편적인 수준을 유지하려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로저스가 물었다.
"제가 알려드리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로, 인간이 지금까지 모아들인 방대한 지식을 다시 얻어내기 위한 실험이 중복 발생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시간낭비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미 발견이 되었는데도, 우주에 퍼져 있는 수많은 다른 행성들에서 그 발견을 제각기 따로 하려고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수천 개의 행성 중 하나에서 습득한 정보는 그대로 중앙 중계 센터로 전달된 다음,
다시 전 은하계로 퍼져나갑니다.
중계 센터는 여러 경험을 연구하고 골라내어 서로 모순되지 않고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 전송합니다.
중계 센터는 인류 전체의 경험을 일관선 있는 구조로 변환하는 겁니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뭡니까?"
"중앙 통제를 통해 보편적인 문화를 유지하면, 전쟁이 벌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윌리엄슨도 인정했다.
"우리는 전쟁을 제거했습니다. 그 정도로 단순한 일이었지요.
우리는 고대 로마제국처럼 동질성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은하계에 사는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입니다.
모든 행성이 같은 정도로 문화를 향유하고 있어요.
질투나 시기의 온상이 되는 문화의 변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념품 305p




참전 용사

지구인과 '물갈퀴' 라고 불리우는 금성인들 간의 전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한 노병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틈만나면 자신의 무용담을 꺼내들기 일쑤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지구인 의사 한 명은 그에게 들은 모든 말들이 앞으로 50년 뒤에 벌어질 지구의 운명임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금성인들과의 전쟁을 아예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군의 핵심자에게 전달하지만 지구 군인들은 금성인들과의 미래에 있을 전쟁에서 승리할 열쇠를 지니고 있는, 예언자나 다름없는 노병, 데이비드 엉거를 붙잡아 전투에서 승리할 방법을 들으려 한다는 이야기. 금성에서 서서히 지구로 옮겨오고 있는 금성인들과 지구인들의 갈등, 그리고 군사력과 정치가 개입된 이 짧은 단편은 충분히 장편 소설로 분량을 늘리거나, 바로 극장에 걸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짜임새 있는 구성을 지니고 있다. 실제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받았던 억압 같은 지구인들의 금성인들에 대한 차별, 후반부에 가서야 드러나는 반전요소는 sf의 탈을 쓴, 범 계몽적인 단편이 아닐 수 없다.



뻣뻣하게 긴장된 채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이블린 커터의 바로 옆 사무실 벽에 걸린 달력에는
2169년 8월 4일이라는 날짜가 박혀 있었다.
만약 데이비드 엉거가 2154년생이라면 지금 그는 열다섯 살의 소년일 터였다.
그가 2154년에 태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낡고 누렇게 뜨고 땀자국이 가득한 신분증명서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전쟁통을 헤치고 나온 서류 위에.

-참전 용사 337p




재능의 행성

'돌연변이(mutant) 와 능력이 발현되지 않은 '뮤트(mute)' 계급에 대한 이야기. 문자 그대로 마블의 엑스맨들이 떠오르는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돌연변이들의 능력은 정신감응자, 예지능력자, 부활 능력자, 염동력자, 원격 조종자, 시간 여행자, 그리고 영화 엑스맨에서도 나온 바 있는 모든 능력자들의 능력을 무효화 시키는 능력을 지닌 사람 까지. 거의 마블이 필립 k. 딕의 이 소설을 베낀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력있는 뮤턴트 캐릭터들이 즐비한 작품이다.


"첫 사례지만, 비슷한 사람들이 계속 등장할 겁니다.
정신감응에 대한 방어능력뿐이 아니겠지요.
모든 종류의 초능력에 면역력을 가진 생물들이 등장할 겁니다.
우리 사회에 네 번째 계급이 등장한 겁니다.
반초능력 계급이죠.
결국 언젠가는 나타날 능력이었습니다."

-재능의 행성 417p



전쟁 장난감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어디선가에서 읽은 것 같은 필립 k. 딕의 단편(아마 이전에 발행된 짧은 분량의 단편집에서 일 것이다). 가니메데인들이 지구에서 판매할 수 있는 장난감들의 판매허가를 감독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기지를 점령하는 미니어쳐 요새와 군인 장난감 뒤로, 지구인들이 가치있게 여기는 게임을 다룬 '모노폴리' 를 역으로 이용한 가니메데인들의 게임이 어느새 지구인들(특히 어린 아이들) 에게 영향력을 떨치게 된다는 이야기. 하이라이트로까지 가는 지점들이 꽤 인상적이다. '에이 뭐 별 거 아니었잖아?' 하는 순간에 지구인들의 마음 속에 깊숙히 뿌리내려지는 가니메데인들의 프로파간다같은 메시지가 너무 흥미롭다.



"어쩌면 위장 전술일지도 몰라." 와이즈먼이 말했다.
"주위를 분산시키기 위해서 말이야. 다른 뭔가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직관적인 생각이었지만, 정확하게 무엇일지는 짚어 말할 수 없었다.
"거짓 미끼인 셈이지. 다른 작전을 진행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저렇게 복잡한 거야. 의심을 사도록.
그 목적을 위해 저걸 만든 거라고."

-전쟁 장난감 475p




진흙발의 오르페우스

타임머신 기능으로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에게 현재의 인류가 '뮤즈(영감을 주는 자)' 가 된다는 이야기. 이 소설은 필립 k. 딕 자신을 비아냥 거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타임머신이라는 소재를 이토록 흥미롭게, 그리고 소설을 살아있는 유기체 처럼 만든 이가 또 있을까. 예전에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신' 에서 주인공들이 독자의 존재를 눈치채는 말같지도 않은 엔딩으로 책 6권 분량을 한줌의 잿더미로 만드는 일을 했었는데 아마 본작을 읽고 작품에서 장난을 친게 아닐까 싶다. '신' 에 비하면 이 짧은 분량의 단편이 훨씬 위대하고 읽을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필립 k. 딕 본인이 작품에 직접 등장하는, 그의 몇 안되는 소설로써 시종 유쾌하고 즐겁게 읽었다. 왜 '진흙발의 오르페우스' 가, 이 단편집의 타이틀이 됐는지 알 것 같은 소설.

참고로 제목에 쓰인 '진흙발' 이란 성경 <다니엘서>에서 등장한 표현으로 ,예언자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는 대목에서 등장한다. 금으로 된 머리와 은으로 된 가슴과 황동으로 된 허벅지를 가진 오아국도 결국 진흙으로 만든 발 때문에 무너질 것이라는 뜻으로,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결점을 의미한다.


"과거로 돌아가면 미쳐 날뛰는 고객들이 너무 많거든요.
얼마나 많은지 알면 놀랄 겁니다.
자신이 힘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온갖 변화를 만들려고 드는 거지요.
전쟁이나 기아나 빈곤 따위를 없앤다든가, 뭐 그런 거 있잖습니까.
역사를 바꾸려 드는 겁니다."

-진흙발의 오르페우스 4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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