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일상

전세집을 알아보다가 발견한...

by realnorth

고요하고 적막한 가운데, 해야 할 일들은 나중으로 미뤄 둔채 산책을 즐기는 일은 내게 더 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러한 시간들은 대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발견하고 확인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확인하는 시간들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너무 바쁘다는 핑게로 나는 이런 시간들을 일부러 도외시 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해야 할 일들에 쫓겨 삶에 대한 평범한 감각들을 놓아버렸다.나는 마치, 너무나 먼 곳으로 유배되어 도무지 다시는 정권을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패망한 왕조의 왕처럼, 삶의 의미를 내려놓고 그저 하루하루에 쫓겨다니고 있었다.


나는 오늘 이사갈 집을 알아보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서울 시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아무런 목적없이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그저 하염없이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만 했더라면 좋았을 뻔 했다. 아마도 그랬다면, 나와 어머니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떤 인생이 좋은 인생인지, 그 시절 우리가 무엇을 즐거워했는지에 대해 목적없이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시간을 보낼 겨를이 없었다. 나는 사방 좌우로 몇 미터짜리 방인지를 살펴야 했고, 가격이 적당한지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타인이 저만의 규칙으로 이곳저곳에 늘어놓은 낯선 가재도구들이 나의 집중력을 흐렸지만, 나는 이를 이겨내고 가격과 편리성을 따져야 했다. 우리는 시간이 없었다. 현재의 거주자가 습관처럼 흐트려뜨려 놓은 가재도구로부터 그들이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에 대해 살피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다. 나는 그보다, 이 집이 우리의 거주목적에 적당한지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

눈앞의 목적에 집중하지 못하고 흐리멍텅한 마음가짐으로 부질없는 잡생각을 끝없이 해대는 것이 나의 오랜 습관이라면, 내가 그럴때마다 남몰래 눈치를 채고는 내 눈앞에 현실을 소환하는 것이 어머니의 오랜 습관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집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들을 물어왔다.


나는 겉으로는 어머니의 질문에 대답을 해나가면서도, 내심 다른 일들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나는 우리가 이사가게 될 지도 모르는 집에 들어서서는, 그 집 주인의 인상을 살폈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저 잡동사니들은 그의 삶을 어떤 식으로 윤택하게 만들어줄까. 그는 행복한가.


나는 이런 생각들을 내려놓지 못한채, 집을 보는게 아니라 집주인의 삶을 훔쳐보고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대여섯살 정도 되어보이는 꼬맹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갑자기 찾아온 손님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했다. 녀석은 우리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큰 목소리로, "나는 이제 피아노 연습을 해야겠다" 라고 외치고는 평소 자신이 가장 자신있어 할 것이 분명한, 어떤 피아노 곡을 아주 빠르고 반복적으로 연주해댔다. 그녀석은 특히 자신이 자신있어하는 대목을 유독 반복적으로 연주했다. 녀석은 어머니와 내가 도무지 대화를 나눌 수 없을 정도로 피아노를 쳐댔다. 낯선 사람들에게 안녕이라는 말을 건네기에는 부끄럽지만, 어쩐지 친해지고 싶고 반가운 마음에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피아노를 참 잘친다는 낯선이의 칭찬이 목말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집에서 마주친 아이들은 맑은 눈망울로 빤히 고개를 쳐들고는,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들에게 직접적인 호기심을 드러내 보였다. 나는 슬쩍 바라본 집 주인의 표정으로부터 그들의 삶과 일상을 유추하고 싶었다. 나는 어렴풋이 가물거리는 그 집의 가재도구들로부터, 그들이 어떤 삶을 어떻게 영위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어떤 집에는 가족 사진이 걸려있었다. 가족 사진은 아마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촬영된 것으로 보였다. 가족사진의 가운데 뒤쪽으로, 가족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가장 멋진 모습이 어색하게 박제되어 합성되어 있었다. 아마도 가족들은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가족사진을 너무 빤히 쳐다보는 것이 예의없는 행동인 것 같아, 다시 집주인 여자의 표정을 살폈지만 내가 가족사진을 쳐다본것을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말없이 주인 여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잘 지내고 계셨나요?

저는 저대로, 제 어머니는 제 어머니대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처음 뵙는데 안부를 묻는다는게 좀 이상하지만, 그래도 당신의 안부가 궁금했습니다.

저는 오늘 당신의 표정에서 옅은 걱정과, 자녀들을 사랑하는 깊은 마음을 봤어요.

당신은 어딘가 공허해하면서도 현실 앞에서 마음이 바빠보이네요.

집 잘 살펴봤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내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일상을 서로에게 지긋이 보여주고, 또 한편으로는 설명하면서, 우리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런 희망을 확인했던 것이 이미 너무 오래전의 일인 것만 같다. 집을 알아보는 일은 사실상의 실패로 끝이났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집을 살피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런 종류의 희망을 확인하는 데에 마음을 다 써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굴도 알지 못하던 우리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다는 희망, 우리는 늘 누군가의 말벗이 되어줄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했으니, 곧 좋은 매물이 나타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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