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휴가만 내면 화려한 하루가 될 줄 알았지?

by realnorth

# 오래된 기억

어떤 기억들은 아주 오래도록 남는다. 좋았던 일이건 좋지 않았던 일이건, 오래도록 기억되는 사건이나 상황들은 그저 오래되기만 하면 행복하게 느껴지는 걸까? 가끔 오래된 일들이 문득 내게 말을 걸어오는 날이면, 나는 길을 걷다 말고 잠시 어떤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우연히 떠오른 오래된 기억은 때때로 내게 어떤 질문을 하곤 하는데, 나는 그 상황에서 어떤 입장을 정리하거나, 어떤 대답을 하고는 그 대답에 걸맞는 표정까지 지어내는 셈이다. 어쩌면 회사 로비를 지나치며 나를 우연히 보게 된 직장 동료들은 그런 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혼자 있는 것 같은데 눈앞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표정을 지어보이니까 말이다.

오래된 나의 기억속에는 남들도 그렇듯이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들이 뒤섞여 있는데, 구태여 그게 무엇인지를 구분해가면서 설명하는 것은 오늘 밤의 나에게 그리 큰 도움이 될것 같지는 않다. 우연히 길을 지나다가 이 글을 보게 될 여러분에게도 그렇고.


# 멈춰있는 시간

오늘 나는 회사에 가지 않았다. 하루의 일과에 쫓겨,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처럼 생각해보지 못하는 날들을 보내왔는데, 막상 휴가를 내고 아무것도 하고있지 않으니 어쩐지 난감했다. 사실 오늘 딱히 휴가를 내야하는 이유같은건 없었다. 내겐 그저 잠시 동사무소를 다녀올 여유 정도만이 필요했다. 동사무소를 다녀오고나면, 지금 직장에서 보내주고 있는 교육과정에서 내준 숙제를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가을 날씨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게을러서인지, 아니면 공부에 대한 부담감과 남들보다 잘해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압도되어서인지 정작 공부는 하지 못했다. 나는 다만 오늘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기만 했다.

일주일 가까이 걷지 못해 빼빼 마른 빨래들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이 낮잠을 자는 내 발가락을 간지럽힐 때 즈음 아내에게서 문자가 왔다. 밥은 잘 차려먹었는지, 일은 잘 해결됐는지 등을 묻는 사소한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니 아내는 내게 사소하지 않은 것을 이야기한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역사라던지, 어떤 분쟁지역에 관한 이야기라던지, 먹거리에 대한 의심과 불안이라던지, 더이상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던지, 최근 조명되고 있는 5.18의 진실에 관한 것 말이다. 아내는 내게 늘 무얼 먹었는지, 무얼 먹고싶은지, 자고싶은지, 아니면 본인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던지 하는 이야기만을 해온다.

이런게 생활인걸까? 어쩌면 나는 오늘 아주 오랜만에 생활이란걸 해봤는지도 모르겠다. 낮잠을 자고, 늦게 일어나서 빼빼 마른 빨래들을 발견하고는 개어서 정리하고, 저녁을 준비하는 온전한 생활 말이다.

우리 동네에는 아이들이 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다니는걸 본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오늘 낮에 동네를 돌아다녀보니, 우리 동네에는 아이들이 꽤나 많이 살고 있었다. 저출산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쩌면 나는 내 생활로부터 유리된 채, 닭장같은 사무실에서 나를 유기하고 있었던건지도 모른다.


# 읽을거리를 찾는데 실패하고, 쓸거리를 찾는데에도 실패하다.

다늦은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컴퓨터를 켜고 앉았다. 사실은 오늘 아침 일찍 켜놓았던 컴퓨터다. 공부를 하려고 켜놓았지만, 나는 자리에 오래 앉아있지 못했다. 무언가 읽고 싶어서 인터넷 뉴스를 뒤적이다가, 어떤 연예인이 성매매로 입건까지 되었음에도 그걸 루머로 일축하며 재기에 나섰다는 기사를 보았다. 또 어떤 연예인은 도박과 거짓말로 문제가 되어 퇴출되었는데, 곧 재기하기 위해 얼굴을 비추는 모양이었다. 사실 연예인이 무슨죄를 지었건 그게 크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어떤 인간이든 죄는 지을수 있고, 그 죄값을 한 인간으로서 잘 받으면 그만이다.

죄값을 치렀다면 누구든 재기할수 있는거 아닐까. 우리는 연예인에 대해 너무 관심이 많고, 지나치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일상적 도덕과 건전한 사회에 대한 논의는 자꾸만 뒤로 밀린다. 도덕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적다. 어쩌면 우리 동네에 어린아이들이 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내가 사는 집이 그저 얼마정도 나가는 자산으로만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오래도록 독서를 게을리 했기 때문인지, 나는 마땅한 읽을거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읽을 거리가 마땅치 않으니, 쓸거리를 찾게 됐다. 결국 나는 쓸거리를 찾아 오래된 기억들을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그땐 왜 그랬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그땐 왜 그랬을까"라고 묻고는, 하나같이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에 실패한다.


# 공복감으로 애써 인사하기.

읽지 않으면, 쓸것도 없다. 생각하지 않으면, 읽어도 쓸데가 없다. 읽지도 쓰지도 않고 생각만 하면, 잘못 생각하기 쉽다. 사고하지 않으면 지루한 글을 써댈 뿐이다. 나는 최근 몇년간 읽지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을 즐겨하던 시절의 나는 늘 헛헛하고 공허했다. 그런데, 더 이상은 읽지 않는 지금의 지금의 나 역시 헛헛하고 공허하긴 매한가지다. 어쩌면 나는 이제 공복감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공허감 속에서 그저 하루하루 주어지는 것들에만 단순하고 익숙하게 시간을 보내버리는 것. 어쩌면 공허와 맞서 싸워봐야 이길수 없다는 것을 나는 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깨달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잘 알기위해 노력하고, 그 사람이 행복할수 있도록 내가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게 사랑이라면, 공허함 속에서 괴로워하기 보다, 공허하지만 그 공허함과 함께 살아가려고 노력하는게 옳은 것 아닐까. 어쩌면 공허하기 때문에 공허하지 않도록 작고 가치있는 생활을 만들어가야 하는게 아닐까.

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해대는 아내처럼, 어쩌면 나는 우리동네에 살아가고 있는, 예전에는 내가 그 존재조차도 알지 못했던 아이들을 향해 웃어주어야 하는게 아닐까. 그냥 그렇게, 별것도 아닌 일상속에서 공허를 잊고 세월을 보내야 하는게 아닐까.

낮잠 속에 발가락을 간지르는 저 빼빼마른 빨라들 사이로 시간을 보내는게,어쩌면 그게 인생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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