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매원(古梅園) 먹에 대한 나의 이야기
일본 몽벨(montbell) 매장에서 아웃도어용 지필물 세트를 보고서는, 나름대로는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물론, 일본은 소리글자가 아닌 뜻글자를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현대식 캘리그래피가 아닌 전통식 서예에 우리나라보다 더 관심이 있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속에서 지필묵과 함께 풍류를 즐길 줄 아는 기성세대도 캠핑과 백패킹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 캠핑과 백패킹을 주로 즐기는 젊은세대도, 지필묵과 함께 풍류를 즐길 줄 아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어느 쪽이 되었던, 이제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일본을 추월했다는 안일했던 생각을 반성하게 만들고, 낭만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되었다고 생각했던 내게는 큰 충격을 주었던 물건이었다.
지필묵(紙筆墨)은 전통적인 동양 서예나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세 가지 기본 도구를 의미한다.
지(紙): 종이. 주로 한지(한국 전통 종이)를 의미하며, 서예나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얇고 질긴 종이
필(筆): 붓. 서예나 동양화에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도구
묵(墨): 먹. 물에 녹여 사용하는 검은색 잉크로, 주로 먹물로 만들어진 고체 형태의 먹을 갈아 사용
이 세 가지 도구는 동양의 서예와 화법에서 매우 중요한 재료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들이다. 서예(書藝)라 함은 붓과 먹을 사용해 한자나 한글 등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전통적인 동양의 글씨 예술을 말한다.
영어든 한글이든 소리글자를 주로 사용하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폰트(Font)라는 단어로 가볍게 해석이 되기도 하겠다. 글자를 쓰는 예술행위라 불리는 서예는 폰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서예는 뜻글자인 한자 문화권에서 주로 발달을 했고, 예전에는 서예의 기량이 필자의 지식과 뜻, 생각이나 철학 등을 간접적으로 대변하기도 했다.
만년필 등 펜은 서양에서 일찍이 사용되어 왔고, 그 필체를 평가하거나 즐길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들은 소리글자를 언어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 속에 들어있는 내용이 필자의 뜻을 전달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글의 모양새보다 글의 내용을 신속하게 전달하는 담백한 서양의 문화가 실용주의를 일찍이 추구하게 만들었고, 동양보다 빠른 문명의 발달을 이룰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는 심지어 한글이 창제되고 난 후에도 우리말의 많은 부분이 한자에 어원을 두고 있어 불과 수십년 전 까지 한자를 꾸준히 사용해왔다. 따라서, 필묵(筆墨)을 주로 사용했던 동양에서는 글을 쓰는 마음가짐이 서양의 그것과는 달랐다.
한자는 뜻 글자이다. 동양의 문학은 서양의 그 것보다 절대적 길이가 짧은 것이 많다. 대신 하나의 글자에 많은 것을 포함했다. 필자의 지식뿐만 아니라, 감정, 정서, 감성, 기질 등 하나의 글자라 할 지라도 글자의 선택과 그 글자의 필체를 통해 많은 것을 표현하고, 느낄 수 있었기에 폰트를 쓰는 행위를 동양에서는 예술로 여겨왔다.
필묵은 사용하기가 불편하기 그지없다. 뚜껑만 열거나 잉크만 채워 사용하는 펜과는 달리 무거운 벼루와 먹, 물을 담을 연적을 가지고 다녀야 하고, 잘 마르지 않는 붓도 챙겨다녀야 한다.
그러나, 벼루에 물을 담아 먹을 사용해서 먹물을 갈아 만들때, 그 농도와 색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으며,
펜보다 부드럽고 굵은 붓은 글자의 굵기, 크기, 획을 긋는 속도를 통해 그렇게 표현되는 힘과 고집, 피어나는 향까지 하나의 글자에 필자의 뜻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기에, 우리는 그 것을 서예(글 서, 書, 예술 예, 藝)라고 부른다.
서양의 문서처럼 효율적이고 직설적인 의사전달방식이 아니지만, 서예작품을 보면 글자를 쓰기 위한 준비과정, 글자를 쓰는 자의 자세, 글자를 쓰는 자의 지식과 철학, 글자를 쓰는 자의 감정과 감성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랬기 때문에, 선비문화가 발달하였고, 물질보다 정서적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한석봉의 글보다 한석봉의 글씨에 더 관심이 있다.
그의 필체만 동경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필체속에서 느껴지는 그의 생각과 철학 등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수려하기 때문에, 그의 글씨를 포괄적 관점에서 예술로써 동경하고 있으며, 그의 글은 명작(名作)이라 불리지 아니하고 명필(名筆)이라 불리고 있다.
그는 서예작가셨다. 한국에 몇 명 남아있지 않는, 초서를 구사할 줄 아셨던 서예작가셨다. 그리고, 그는
글자를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으셨던 선비이셨다.
그는 삶을 마치 서예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며 사셨기에 가족들이 힘들 때도 많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그 정신과 철학이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는 점은 존경받아 마땅한 예술가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더이상 뜻글자인 한자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자연스레 서예의 가치가 대중으로부터 답답한 유교의 산물로 평가절하되고, 찾는 사람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필묵은 전문으로 취급하는 오래된 화방이나, 서울의 인사동에 가지 않는 이상 더이상 파는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일본에 가면 곳곳에서 지필묵을 파는 곳을 종종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고품질 제품들은
일제가 많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를 그렇게 싫어하시던 분이 일본에 간다고 말씀을 드리면, 꼭 사오라고 하신 것이 한국에서는 저렴하게 구하기가 힘든 고품질의 5성짜리 고매원 먹이었다. 그래서, 고매원 먹을 보면 자연스레 그가 생각이 나고, 그토록 검소하게 사셨던 그가 왜 지필묵에는 돈을 아끼지 않으셨는지가, 도쿄의 화방에 가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도쿄 신주쿠에 있는 세카이도(Sekaido) 라는 화방에서 필묵을 구경하였다.
붓도 털의 재질, 크기 등 다양한 종류가 있기에 한 번씩 만져보고 촉감을 느끼는데 시간이 제법 걸린다.
묵, 즉 먹이 있는 코너에 왔다. 세카이도 화방 3층에 오면 약 1/4이 먹이 전시되어 있는 코너이다. 저렴한 먹은 진열대에 전시 되어있고, 고가의 먹은 잠금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유리 진열대 안에 전시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현대식 공정으로 만들어 지는 먹은 1) 공업용 송연(소나무 그을음)이나, 다른 탄소재료들을 모은 다음, 2) 아교와 섞어 고화시킬 전처리를 한다. 그을음과 아교가 혼합된 것을 3) 틀에 넣고 건조시키면서 압축과 성형이 이루어지며, 4) 숙성과정을 거치게 된다. 최근에는 먹을 만드는 공정이 기계로 자동화가 되어, 먹을 만드는 5) 장인의 관찰과 관리가 생략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먹은 그냥 먹물을 만드는 단순한 돌덩어리인줄 알았는데, 먹의 품질을 결정함에 있어 최소한 다섯가지의 변수가 있다고 한다.
고매원에서 제작되는 먹은 1성에서 5성까지 그 품질에 따라 나누어 지는데, 4성과 5성이 고급먹으로 취급이 되고, 특히 5성짜리 고매원 먹은 먹중에서는 마치 샤넬과 같은 명성을 가진 명품이라고 한다. 내가 방문했던 그 날도, 5성짜리 고매원 먹은 단 두 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먹의 품질과 선택을 결정하는 요소는
발색: 등급이 높을수록 더 진하고 선명한 발색을 보임
점성: 고급일수록 점성이 좋아 붓에 먹이 잘 묻고, 선이 더 매끄럽게 나옴
질감: 높은 등급일수록 먹의 질감이 부드럽고 농담 표현이 잘 됨
용도: 낮은 등급은 연습용으로, 높은 등급은 중요한 작품 제작에 적합
라고 한다.
품질: 가장 기본적인 등급의 먹
특징: 보통 서예 초보자나 연습용으로 사용됨, 발색이 고급 먹에 비해 덜 진하고, 먹의 점성이 약간 떨어질 수 있음
용도: 일상적인 연습이나 일반적인 글씨 쓰기에 적합
품질: 1성보다는 높은 등급으로, 발색이 조금 더 뛰어남
특징: 서예 중급자나 연습용으로 많이 사용되며, 먹의 질감이 좀 더 부드럽고 발색이 안정임
용도: 연습과 더불어 실전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임
품질: 중상급 먹으로, 발색이 더 깊고 선명함
특징: 발색뿐만 아니라 먹의 농담 표현이 잘 나타나며, 서예나 동양화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
용도: 중급 이상의 서예가나 작품을 만드는 데 적합함
품질: 고급 먹으로, 발색이 매우 진하고 선명함
특징: 붓에 먹이 잘 묻어나고 농담 조절이 우수하며, 먹의 질감이 매우 부드러움
용도: 서예가들이 실제 작품을 제작할 때 많이 사용함
품질: 최고급 먹으로, 먹의 질감, 발색, 점성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남
특징: 발색이 매우 선명하고 오래 유지되며, 먹의 질감이 매우 부드러워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고, 또한 농담 표현이 매우 풍부함
용도: 전문가 수준의 서예가나 중요한 작품 제작에 사용됨 - 전문가는 5성을 찾는다는 말임
그래서 그는 늘 5성의 먹을 사오라고 말씀을 하셨고, 5성이 어떤 수준인지를 알지 못한 나는 5성의 먹이 재고로 있는 곳을 찾을 수가 없어서 4성짜리를 사다드리며,
먹이 다 똑같은 먹이지 4성이던 5성이던 둘 다 고급라인인데 큰 차이가 있겠어?
라고 생각하며, 4성먹 제일 큰 사이즈를 사다 드렸었다.
그는 작품활동에 그 먹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생각이 복잡하고 마음이 산만하실 때 마다 먹에서 풍겨나오는 묵향만 맡으셨다고 한다. 그 때는 아까워서 못 쓰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10년이나 지나서야 깨닫게 된다.
고매원 먹의 4성과 5성 간의 품질 차이는 미세할지 모르지만, 그 차이가 미적, 감각적 경험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평가된다. 3성과 4성 간의 차이도 물론 크지만, 4성과 5성의 차이는 장인 정신과 재료의 미세한 차이, 숙성 기간의 극대화에서 발생하는 차이가 크다는 점에서 다르게 평가된다고 한다.
4성은 3성에 비해 더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숙성기간도 길어 질감, 향, 색감이 깊어지며, 질감과 밀도가 균일하여 농도와 색이 더 선명하다고 하지만, 그 차이가 4성과 5성과의 차이에 비하면 오십보백보라고 한다.
반면, 5성은 가장 엄선된 최고급 송연과 아교를 사용하고,이 미세한 품질의 차이가 최종 결과물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또한 5성은 4성에 비해 오랜 숙성기간을 거치고 재료의 순도에서도 큰 차이가 난다고 한다. 색감도 훨씬 더 깊고 맑으며, 묵향도 한층 고급스럽고 발향이 잘되지만 우아하게 은은해서, 중요한 작품이나 전시용 작품에 적합한 최상의 먹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장인의 수작업에 의해 만들어 지고, 품질을 떠나 만들어지는 방식과 명성이 예술적 가치까지 지니고 있기에,서예가들에게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고 한다.
3성과 4성의 가격차이는 미미하지만, 4성과 5성의 가격차이는 하늘과 땅차이였다. 결국 난 격에 맞지 않는 물건을 사드리고서는 10년동안 비싼먹 아까워서 못쓰신다고 자위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연습용으로 쓰기엔 아깝고, 작품에는 사용할 수 없는 애매한 4성짜리 먹을 사와서,묵향만 즐기시는 용도로 사용하셨던 것이었다.
결국 나는 똥멍청이였다. 받는 사람은 목적에 맞지 않는 물건을 받았는데, 주는 사람은 제대로된 선물로
효도했다고 생각했던 똥멍청이였다. 참고로, 그 때 4성짜리 먹 가장 큰 것이 15,000엔 정도 했었다. 당시의 나에겐 큰 돈이었고, 당시의 화방에서 가장 비싼 먹이었기에, 제대로 샀다고 생각했다.
잠겨있는 유리 진열대 안에 딱 두 개 남아있는 고매원 5성 먹을 보러 직원분께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드디어 찾았다. 그토록 찾았던 고매원 5성 먹.
처음에 잘 못 본줄 알았다. 왼쪽에 있는 49,500엔 짜리 먹은 가장 사이즈가 큰 고매원 5성 먹이고, (내가 샀었던 4성짜리 먹과 같은 사이즈) 오른쪽에 있는 16,500엔 짜리 먹은 사이즈가 가장 작은 고매원 5성 먹이다. 가장 작은 사이즈는 가장 큰 것에 비해 크기가 1/3정도 되는 것 같다.
고매원 5성 먹 제일 작은 것이 고매원 4성 먹 제일 큰 것 보다 비싸다는 소리다.
향을 주로 맡으셨다고 하니, 나도 그 분 댁에 갈 때 마다, 내가 사다드린 4성짜리 커다란 먹의 묵향을 종종 맡고는 했다. 그 냄새를 기억하고 떠올리며, 5성 먹의 뚜껑을 열고 시향을 했는데, 향의 우아함, 은은함, 발향거리, 발향세기 등 적어도 향에 있어서 4성 먹과의 차이가 제네시스와 소나타간의 차이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향은 갈아 없어져 사라지지 않는 이상 영원히 날 향이기 때문에, 욕심내서 큰 것을 사고싶었지만, 휴대를 하는 것도 생각해야하고, 무엇보다 큰 것은 너무 비싸서,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아직까지 내 그릇이 여기까지인가보다. 제일 작은 것을 샀다. 하지만, 작아도 발향도 강하고 색깔도 매우 곱다.
나도 그 분 처럼 마음이 심난하고 생각이 복잡할 때 마다 꺼내서 향을 맡으며, 심신을 안정시키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며 삶을 살아볼 예정이다.
또 누가 알 것인가, 언젠가 나도 서예를 취미로라도 하게 될 지. 그리고 작품을 내게 될 지. 그림은 휴대할 수 없는 예술품이지만 고매원 5성 먹은 휴대할 수 있는 예술품이니 언제든 쵸콜렛처럼 꺼내먹을 수 있다.
일본어 번역기를 돌려보니,
이 먹은 유채씨앗으로 만든 기름으로 그을음을 만들었고, 농묵(진하게 갈아낸 먹물)과 담묵(연하게 갈아낸 먹물)의 차이는 먹통에 표시가 되어있긴 한데, 농묵은 아주 짙고 깊은 검정색으로, 가장 어두운 검정색이라고 하고, 담묵은 회색빛이 돌지만, 차가운 느낌의 검정색이라 차분한 색깔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고 한다
또한, 직사광선, 열, 습한곳은 피하라는 안내문구와 갈아낸 먹물은 장시간 보관 시 변질이 되니 최대한 빨리 사용하라는 안내가 되어있었다.
나의 정서적 애착물건이 생겼는데, 그 애착물건은 향이 참 좋고, 휴대가 가능한데다가, 그 가치가 예술품의 가치라고 하니, 비싸지만 참 잘 사온 물건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리고, 무지했던 10년 전의 내가 너무 원망스럽지만, 이 먹만 가지고 있으면 늘 같이 있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 오히려 좋다.
향이 참 좋고 차분하며, 몸에 은은하게 잘 베일 것 같으니, 일본 여행가실 때 하나 사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