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공공기관 직원의 경력 딜레마
물경력
씁쓸한 단어입니다.
AI에게 물어보니 물경력이란 실질적인 경험이 부족한 "속이 비어있는"경력이라고 합니다. 경력의 속이 비는 경우는 개인의 나태함에 의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의 성실함이나 노력여부에 상관없이, 지금의 조직에서는 가치가 있을지 몰라도, 직업시장에서는 가치가 없어서 생기는 것 일수도 있습니다.
독점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력의 경우 대부분 그러할 테고, 공공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그것도 대부분 그러할 테지요. 특히 기술직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지금 몸 담고 있는 이곳 외에는 갈 곳 없는 경력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수도산업, 전력산업, 우편산업, 국방산업 등 산업 전체가 국유화되어 민간사업체가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산업분야의 경우, 이곳에서 아무리 뛰어난 기술직 관리자라 할지라도, 민간시장으로 나가면 그의 지난날은 물경력이 되고 말지요(전문적인 분야를 연구하는 분들은 예외겠지만요).
정부는 거대하고 단일하기 때문에, 그곳에서 좋은 관리자가 되려면, 한 보직에서 근무를 오래 하기보다, 여러 부서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 경력개발의 정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좋은 관리자가 되기 위해 많은 변화를 수용하면서 겪었던 여러 분야에서의 다양한 경력은, 민간시장에서는 숙련된 보유기술이 없는 물경력으로 인식이 되기도 하겠지요.
이거 니거잖아. 니가 "전문가"잖아.
제가 가장 듣기에 거부감이 드는 말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이 것이 제 것이고 제가 전문가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부 및 공공기관들은 직접업무들은 대부분 외주를 주고, 실무자들은 기술직이라 할지라도 그 외주용역 계약을 관리하는 기술"관리직"인 경우가 많습니다. 실질적인 경험이 쌓이는 업무들은 외주업체가 수행하니, 관리자들은 외주업체에게 정보를 의존함과 동시에, 외주업체를 통제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지요. 그래서, 의사결정과 불확실성에 대한 책임을 지기 때문에 업무의 통제권한이 있을지언정, 직업업무에 대한 전문성이나 숙련도는 외주업체가 훨씬 더 높기 마련입니다. 결국 대부분의 문제는 외주업체를 통해서 해결하는데, 기술"관리직"인 제게 감히 "전문가"라니요. 외주업체가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데리고 다닐 걱정인형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어쨌든, 직접업무를 오랫동안 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기술"관리직"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 직업시장에서 공공기관 출신들은 "특정분야 경력직"이라기보다 "일반 관리직"으로 분류가 될 텐데, 이 것이 다른 말로 "물경력"이더라구요. 물론, 직급이 높고 인맥이 뛰어난 고위관리직의 경우 영업력을 기대하며, 채용되는 경우도 있고, 전관예우로 협력업체에 한시적 임원급으로 채용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그럼, 직장을 옮겨보지 그래?
일부 산업은 한국에서도 직업시장이 유연해져서, 이직이 자유로워졌다고 합니다. 이직은 더 높은 직책, 경력개발, 연봉 인상 등을 도모하여 자신의 삶과 직업의 질을 향상했을 때 성공적인 것이지요. 단일산업, 단일회사에서 대부분의 직접업무를 외주용역을 통해 수행했고, 그 보직조차 주기적으로 변경했던 기술분야 일반관리직의 직업시장에서의 가치가 어떻게 평가되는지 모르고 싶습니다. 이곳저곳 경력직 채용공고를 보면서 "난 무엇에 경력이 있는 사람이고, 장착되어 있는 쓸만한 기술들은 무엇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농도 높은 자기효용감을 느꼈던 적이 언제였더라 싶더라구요. 직업시장은 많은 분야에서의 경력만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같은 운동장이 아니니까 호환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숙련된 전문능력이나 실무경험이 동반되지 않으면, 민간분야 직업시장에서는 상업적 가치는 없는 것이었어요.
혹자는 이야기하지요, 눈을 낮춰야 한다구요. 어쩔 수 없는 경우엔 그래야겠지요. 그런데, 이 나이에 어느 산업으로 새로 들어가야 할지 정하는 것도, 동종기업과 경쟁경험의 부재로 어두운 세상물정에 대한 리스크도 이직에 있어 동기부여와 자신감으로 작용하지는 않기에, 가지도 있지도 못하는 교착상태에서 고민만으로 시간을 보내고 계신 공공기관 근무자분들이 더 계시리라 생각해 봅니다.
벗어나고 싶어도 마땅한 돌파구를 찾기 어려운 곳이 공공분야의 산업이고, 그렇기 때문에 안정적이어야 하고, 자연스럽게 연공서열이 중요시되고, 그래서 누군가는 견디기 힘들어하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역설적이게도, 안정성 덕분에 가지게 된 여섯 달의 휴직이긴 하지만요.
대학동기들은 더 좋은 직장을 찾아 이직을 수 회 하기도 하는 동안, 나름 열심히 살았음에도, 제가 서게 된 이 바닥은 선택지가 매우 한정적이라 직장을 옮기기가 참 어렵습니다. 한 순간의 선택으로 안정성과 맞바꾼 야생에서의 생존근육을 어떻게 다시 길러내야 할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민을 다시금 해보며, 오늘의 글을 갈무리합니다.
공공분야에서는 의사결정에 정치적 요소가 많이 반영되며, 그 요소들이 주기적으로 변화하기에,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등 근무함에 있어 고충의 결이 민간기업의 그것과 결이 다르기도 하지만, 이 것이 경험이 축적된 공공기관의 인력들을 쉽게 대체하지 못하는 방어막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AI가 도입이 되면, 의사결정에 정치적 요소의 반영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AI가 그렇다는데요?"라는 말이 각종 감사에서 의사결정의 면죄부가 된다면, 공공분야 인력들의 직업가치가 한순간 툭 떨어질 것 같다는 망상이 오늘 밤 고민을 더 깊게 만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