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하브루타요?유대인의 하브루타요?
제가 하브루타를 처음 접한 것은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7년 전의 일입니다. 처음 학부모가 되어 “우리 아이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질문을 품고 여러 방법을 찾던 중, 우연히 ‘하브루타’라는 단어를 만났습니다.
그때 구입한 책이 바로 《초등학교 1학년 하브루타부터》입니다. 유대인들의 학습법이라고 하기에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펼쳐든 책에는, 질문을 만들고 서로 묻고 답하는 낯선 방식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책을 읽고 아이와 함께 적용해보려 하니 너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책 한 번 읽고 끝이 났고, 하브루타는 제 일상에서 멀어져 자연스레 잊혀졌습니다.
몇 년이 흘러 교회에서 점심시간, 권사님이 성도들과 함께 그림책 하브루타를 진행하시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권사님께서 저에게 “하브루타가 뭔지 아세요?”라고 물으셨을 때, 저는 아는 체를 꽤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참 부끄럽습니다. 단편적인 지식만으로 아는 척을 했던 제 모습이 말이지요.
결국 권사님의 권유로 ‘하브루타 독서토론’, 줄여서 ‘하브독토’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이성준 목사님, 박정희 권사님을 비롯한 여러 하브루타 하베르들을 만나게 되었지요. 제가 참여한 첫 책은 《자녀교육 혁명 하브루타》이었습니다. 원래 첫 책은 《부의 여덟 기둥》이었지만 두 번째 책부터 시작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쓸모있는 교육》, 《역사의 쓸모》, 《데일리루틴》까지, 한 해 동안 네 권의 책을 함께 하브루타로 읽었습니다.
하지만 11월에는 합창단 활동으로 인해 바쁜 시기를 보냈습니다. 밀양 합창제, 정기 연주회 등 연습이 많아지면서 하브루타와 연습시간이 겹치게 되었고, 어쩔수 없이 하브독토는 잠시 쉬게 되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계속 모임을 이어갔지만, 저는 잠시 물러나 있었습니다. 그러다 올해, 강영안 교수님의 《생각한다는 것》으로 다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하브독토는 인상 깊은 문장을 나누고, 그 문장에서 질문을 길어 올리고, 여러 질문들 중 가장 깊이 있고 핵심적인 질문 세 가지를 고른 후, 그것을 놓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구조로 진행됩니다. 여기에 이성준 목사님의 하브루타 철학과 경험이 중간중간 녹아들어 하브루타의 본질을 일깨워 줍니다.
목사님은 미국 유학 시절 유대인 사회에서 하브루타 문화를 접하고는 “가슴이 뛴다”는 감정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브루타에 가슴이 뛴다.” 부모님께 그렇게 고백하고는 그 이후로 하브루타 교육에 헌신하고 계신 목사님은, 늘 말씀합니다.
“하브루타는 질문이 중요합니다.”
그리고는 "하브루타란 무엇인가요?" 라는 물음에 이렇게 되묻습니다.
“한국의 하브루타요? 유대인의 하브루타요?”
그 질문은 곧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하브루타’는, 어쩌면 유대인의 교육법이 낳은 단편적인 외형—즉, 겉모습과 성과만을 좇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30%, 아이비리그 진학률 30%, 강남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이러한 수치에만 주목하며 그 배경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놓치는 것은, 하브루타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수면 위에 드러난 하브루타의 ‘열매’만을 보며 그것을 따라하지만, 정작 수면 아래 깊이 잠겨 있는 유대인의 전통과 철학, 그리고 삶의 방식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기반을 이루는 하브루타의 첫 번째 본질, 바로 ‘텍스트의 힘’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토라, 즉 모세오경과 탈무드를 공부합니다. 그것도 하루나 이틀만 하는게 아닙니다. 학교에서 일과시간에 토라와 탈무드를 읽고 외우고, 하브루타로 서로 나누며 암송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유대인들이 하브루타를 특별한 프로그램처럼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하브루타는 DNA에 새겨진 문화이며, 호흡처럼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입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우리는 “저 사람들이 하브루타를 하고 있구나” 하고 인식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그렇게 구분 짓지도 않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텍스트를 나누고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주고받습니다.
그들은 열두 살이 되기 전까지 모세오경과 탈무드를 배우고 익히며, 암송하고 체화합니다. 그리고 열세 살이 되면 ‘바르 미츠바’라는 성인식을 치릅니다.
머리에 유대 전통의 둥근 모자를 쓰고, 두루마리 형태의 성경책을 펴들고, 아이와 어른이 함께 말씀을 읽고 나누는 이 의식을 통해 아이가 이제 ‘말씀과 재정’을 책임지는 진짜 성인으로 인정받는다고 합니다.
그 성인식 때, 가족과 친지들이 아이에게 적지 않은 재정을 모아줍니다. 그 액수가 우리 돈으로 6천만 원에 이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돈을 스스로 관리하게 합니다. 즉, 말씀과 재정 모두에서 자립을 선언하는 겁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유대인의 교육은 그 시작부터 다릅니다. 그들은 공부란 결국 언어를 익히는 일이며, 언어의 정점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수학, 과학, 국어, 영어 할 것 없이 결국은 언어의 구조를 익히는 것인데, 그들이 익히는 말씀은 가장 고차원적인 언어이지요. 유대인 아이들은
"이 고차원적 언어를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접하고 익히고 났더니 낮은 차원의 언어로 이루어 진 세상공부가 쉬워졌다" 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이 대목에서 성경 말씀을 한 구절 인용하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언 1:7)
이 말씀을 ‘여경지근'이라 부르기도 하신다는데, 실제로 그런 사자성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공부의 시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목사님은 한 영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대인 고3 학생의 인터뷰였는데, 그 학생의 시간표는 놀라웠습니다. 오전 4시간 동안은 학교 정규수업이 아니라 오직 토라와 탈무드를 공부하는 시간이었고, 오후에야 일반 과목들을 공부한다고 했습니다. 그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대학을 위해 하루 종일 공부하는데, 오전 시간을 전부 말씀 공부에 할애하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
그 학생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아깝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학문의 근본이기 때문에, 이 시간이야말로 진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유대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믿음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바로 텍스트의 힘이었습니다.
말씀이라는 고차원 언어를 익힘으로써, 그들은 인생과 학문의 근본을 붙잡습니다. 하브루타는 단순히 질문과 대화의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기반을 형성하는 텍스트, 곧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하는 문화에서 출발합니다.
이 문화야말로 유대인의 하브루타가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자, 우리가 배워야 할 공부의 출발점 아닐까요?
하브루타의 나머지 본질로 수직문화, 가족문화, 관계의교육, 정체성의 교육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는 기회가 앞으로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그 때를 기약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