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온다

우리가 응답해야 할 목소리

by 리얼팔


소년이 온다. 한강작가의 소설이 저를 참 많이 울립니다. 이럴 줄 알고 이리저리 피해 다녔지만 무언가가 저로 하여금 기어이 책을 읽게 만듭니다. 저에게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위험을 감내하며 떠나는 대단한 모험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여행이 끝난 후 또 얼마나 지독한 몸살을 앓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책과 저자가 일으킨 커다란 폭풍이 잠잠해 진 무렵에 홀린 듯 뭔가에 이끌려 저만의 폭풍우속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처음에 화자는 동호를 너라고 칭하며 보고 느낀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개해 나갑니다. 화자의 이야기 속에서 묘한 처연함과 슬픔이 느껴지기 시작하고,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그것은 더욱 커져갑니다. 너라고 부르는 2인칭 화법과 담담하게 이어지는 화자의 이야기가 읽는 이로 하여금 왠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너라고 부르는 존재가 동호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합니다. 독자는 불현듯 놀라며 갑작스럽게 증폭되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무기력하게 노출됩니다.


어렴풋이 비슷한 서사방식으로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영화 식스센스 입니다. 영화 말미에 주인공의 클로즈업 된 표정과 그 동안의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스쳐가며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동안 자신이 품었던 희망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림을 느끼며 절망하는 주인공을 보며 왠지 모를 깊은 슬픔을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식스센스는 친절하게 관객의 슬픔을 달래주며 마무리 짓습니다. 주인공이 죽음을 받아들이며 남겨진 이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결말로.


소년이 온다는 다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속에서 독자는 정성껏 벼려진 칼날에 베이듯 더 큰 아픔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 갑니다. 자신의 죽은 몸위로 다른 사람의 죽은 몸이 쌓이며 이어서 자행되는 존엄성의 훼손을 무기력하게 작은 목소리로 신음하듯 들려주는 이야기는 점점 호흡이 거칠어 지다가 다시 담담하게 이어집니다. 그래서 더욱 시리고 아프게 독자를 몸서리치게 합니다.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의 말미에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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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가장 비극적인 장면, 동호 어머니가 사투리로 죽은 아들에게 살아 있는 형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대목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지만, 그 말들 속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체념해버린 듯한 건조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투리의 말투, 감정을 억누른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 소설 전체를 가로지르는 가장 깊은 비극의 정점을 만들어주었습니다.


큰형은 왜 동호를 데리고 나오지 않았느냐며 작은형을 몰아붙입니다. 작은형은 서울에 있었던 형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며 맞받아칩니다.

결국 두 형은 서로를 부여잡고 몸싸움을 벌입니다.


그 장면은 단순한 다툼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슬픔이 흘러넘쳐 어딘가로 터져버린 몸짓이었고,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이 만들어낸 절규였으며, 무너져 내린 마음이 마지막으로 붙잡은 것이 서로였던, 그런 처연한 포옹이었습니다.


핏줄로 묶인 형제는 그 피보다 더 진한 슬픔의 끈에 단단히 얽혀 평생 서로를 원망하고, 또 원망하면서

울고, 다시 울며, 때때로 그렇게 땅에 구르듯 엎치락뒤치락 살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져 버린 것입니다.


그 장면을 읽으며 저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작가는 과장된 수사도 눈물 짜내는 문장도 없이 그저 어머니의 사투리 한 마디 형제들의 몸싸움 한 줄로 말로 다할 수 없는 인간의 비극을 온전히 전해주었습니다.


작가는 광주항쟁 당시 희생자들의 증언과 사진, 그리고 참혹한 기록들을 보며 살아남은 자로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감정과 죽은 이들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담기지 않았다는 느낌에서 소설의 서사가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소년이 온다를 읽고 며칠을 울고 나서야 저는 이 글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뭔가를 말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한 시대의 비극을 목격한 슬픔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잊지 않아야 할 이야기, 우리가 응답해야 할 목소리가 지금도 여전히 동호를 통해 들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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