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나누기 :
이번 『생각한다는 것』 3장을 읽으면서 , 가장 먼저 나온 내용은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의 이야기 입니다.
121페이지에 나오는 짧은 문장에 저는 자그마한 탄성을 내었습니다.
“시몬 베유는 세례를 받지도 않았고, 교회에 나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했고, 그분을 따라 살기로 결심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와! 이게 가능한 일일까?”
준파이퍼님께서는 이를 두고 “최초의 '가나안' 성도”라며 꺼꾸로하면 "안나가" 로 유쾌하게 풀어내셨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과연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저자는 벨기에 유학 시절 어렵게 찾아낸 개신교 교회를 다녔던 시절을 회상하며
“차갑기 짝이 없는 교회였다.”라고 묘사하면서
예배는 있지만 따뜻함은 없는 교회, 형식은 있지만 사랑이 사라진 공동체. 그런 교회에 참석하는 것은 신앙의 성장에 도움을 주지않얐다는 개인적인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저자는 시몬 베유와 벨기에 교회의 사례를 통해 이렇게 묻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모두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가?”
“반대로,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준파이퍼님은 "제도 교회의 소속이 중요하다 중요하지않다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공동체로 모이게 되지만 공동체를 다닌다고 해서, 곧바로 예수를 따르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도 동시에 담고 있다"라는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SK회장님은 149페이지의 팔복 구절을 짚어 주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팔복이 예수님의 성품이라고 하니, 처음엔 조금 과한 해석 같기도 했는데 가만히 읽어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이 말씀들은 단지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삶의 방식, 곧 살아 있는 성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준파이퍼님이 여기에 덧붙여 설명해 주었습니다.
팔복은 삶의 양식이며, 성령의 열매는 그 양식이 맺는 열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성화(聖化)란, 결국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이 성품이 내면에 자리 잡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실천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그동안 제가 기도하며 실천하고 있던 팔복 만다라트가 생각났습니다.
매일 하나의 항목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예수님의 성품을 조금씩 따라 살아가보려는 그 노력이 이 책의 흐름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큰 힘을 얻었습니다.
124페이지에서는 사도신경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령 강림 후, 열두 사도들이 각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러 흩어지기 전 한 자리에 모여, 각자 한 줄씩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다는 전승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두 개의 고백이 모여 오늘날의 사도신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내용을 처음 알았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매주일 예배 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고백하던 그 사도신경이,
사도들이 흩어지기 직전 나눈 마지막 신앙의 언어였다니요.
그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베드로, 요한, 바울, 안드레… 그들이 한 명씩 입을 열어 고백하고, 복음을 들고 각기 다른 땅으로 나아갔을 그 순간.
저는 지금도 그 고백을 잇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제 입술의 고백이 더는 가벼울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후반부에 준파이퍼님께서 던진 질문에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질문에 대한 쉽사리 답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중심 사상이 무엇일까요?”
“사랑”, “이웃 사랑”같은 단어들이 떠오르겠지만, 준파이퍼님은
“예수님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공적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셨지만, 단지 윤리적 사랑의 본보기가 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의 삶,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를 소망하며,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살아가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나라의 질서를 이 땅에서 배우고 익히며 실천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첫번째질문: 성도는 직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당신은 어떤 성도인가요?
‘성도는 직분이 아니라 정체성이다’라는 말에 이어 던져진 질문은 이랬습니다.
“당신은 어떤 성도인가요?”
이 질문 앞에서 써니님은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면을 꺼내 놓았습니다.
“저는 말을 잘 안 듣는 성도 같아요.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하나님을 안다고 하기도 뭐하고, 모른다고 하기도 애매한 그런 지점이 있잖아요.”
이 고백에는 오래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자기성찰의 무게가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듯하지만, 정작 ‘아는 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 그 괴리 앞에 서 있는 써니님은 ‘성도’라는 말 자체가 어렵고 부담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예전에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나는 목사보다 성도가 되고 싶다’고 하신 적이 있었어요. 그 말에 정말 감동을 받았는데, 저는 그 ‘성도’라는 말이 아직도 어렵습니다. 나는 정말 성도라 할 수 있는가, 스스로 묻게 돼요.”
써니님은 또 하나의 경험을 덧붙여주었습니다. 목사님이나 교회 리더들이 집사, 권사, 장로 등의 직분에 익숙하다 보니, ‘성도’라고 불릴 때 오히려 기분이 상하거나 서운해하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다고요. 그 이야기를 접하면서 오히려 자신은 성도라는 이름을 감히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구별된 삶을 살지 않으려고 할 때도 많아요. 그런 제 자신을 보면 부끄러워져요. 그래서 성도라는 말이 저에겐 더 어렵게 느껴져요. 제가 그 이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이는 부족함,
하나님 앞에 서기보다 ‘성도답게 보이려는’ 모습에 갇힐 때의 두려움.
써니님은 그 모든 내면의 진실을 숨김없이 꺼내어 보여주셨고, 그 솔직함이 오히려 우리 안의 공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써니님의 말씀을 들으며 저 역시 마음이 울렸습니다. 저도 ‘성도’라는 말 앞에서 머뭇거려 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 머릿속에는 두 부류의 성도가 떠올랐습니다.
첫째는 회심의 순간이 명확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 예수님의 부활 이후 변화된 제자들, 그리고 우리 교회의 부목사님 같은 분들이죠.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180도 회심했으며,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의 사랑 앞에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목사님도 15년 전, 튀르키예 안디옥에서 갑바도기아까지 600km를 여행하며 한 책을 읽다가 “하나님, 저 같은 자도 사용하시겠습니까?”라는 기도를 드리고 인생을 선교사로 드리셨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어느 순간 ‘전과 후’가 확실히 나뉘는 분들입니다.
둘째는 서서히, 천천히, 그러나 끝내 변해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유다 같은 인물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늦은 나이에 거짓말을 하고, 야곱은 속임수로 형의 장자를 빼앗았고, 유다는 요셉을 팔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실수와 허물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가셨습니다.
저는 이 두 번째 부류에 더 가깝습니다.
매일 실수하고, 넘어지고, 연약함을 고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어서려는 사람.
그래서 저도 써니님처럼 생각합니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성도’라는 말이 과분하게 느껴지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면, 그 자체가 은혜요 자격이다.”
결국, 성도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빚어가시는 사람입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향하는 자.
넘어졌을 때 부끄러워하며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자.
그런 우리가, 성도입니다.
비록 부족하고 더딜지라도, 매일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다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SK회장님께서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대화에 들어왔습니다.
“이전과 이후가 명확한 성도, 그리고 점점 변해가는 성도... 리얼팔님이 말씀하신 그 구분이 참 좋네요. 그런데요, 대부분 우리는 후자 아닐까요?”
그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극적인 회심을 경험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 속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죠. 하루아침에 새사람이 되는 사람보다는,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며 점점 빚어지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SK회장님께서도 그런 과정의 사람임을 겸손히 인정했습니다.
그는 이어 성도라는 이름을 둘러싼 우리 시대 교회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성도라는 개념을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그냥 ‘괜찮은 이름이다’라는 생각을 해왔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교회에서 ‘성도’라는 말이 서운한 호칭이 돼버렸다는 걸 알게 됐죠.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으로 불리던 분이 은퇴하고 나면 ‘성도님’이라 불리우게 되는데, 오히려 그걸 기분 나빠하시는 거예요.”
그 말에 모두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성도’는 원래 누구보다 근본적이고 복된 호칭인데, 교회 안에서마저 계급의 가장 아래단처럼 인식되고 있는 현실. 그 현실이 때론 슬프게 느껴집니다.
SK회장님은 이 문제의 뿌리를 이렇게 짚었습니다.
“15년 전쯤 어느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요. 한국 교회 안에서 직분이 계급처럼 작동하는 건, 유교적 사상의 잔재 때문이라고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이게 전부 계급처럼 굳어져 있어서, ‘성도’라는 가장 복된 이름이 오히려 서운한 호칭이 되어버렸다는 거죠.”
이런 배경을 접하면서, SK회장님은 교회 직분을 부르는 문화 자체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저도 생각했어요. 직분은 일을 맡기기 위해 주어진 건데, 왜 우리는 그걸 서열처럼 생각할까? 목사님도 성도고, 우리 모두 성도인데...”
그는 ‘성도’라는 호칭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성도라는 이름은 사실, 하나님이 주신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정체성을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하자면, 그게 바로 ‘성도’ 아닙니까?”
두 번째 질문 :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저는 ‘광채’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 빛이 났고,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옷과 얼굴이 밝게 빛났던 장면처럼, 그리스도인의 특징 역시 빛나는 내면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 빛은 단지 외모나 표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에 나오는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심령과 성품, 마음이 회복될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광채는 억지로 연출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서 ‘복사되어 나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일 때,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복이 흐르고 빛이 퍼져나오는 것 같습니다.
SK회장님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변화’**라고 명확히 말했습니다. 그 변화는 단지 감정이나 일시적인 결단이 아니라, 삶의 중심축이 바뀌는 변화였습니다. 특히 “받는 사람에서 주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고백은, 진정한 이타성의 회복을 보여줍니다.
“예전에는 누가 밥을 사면 나도 사야 인간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줍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제가 준 그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 그 은혜가 돌아오더라고요.”
이 말 속에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복음의 진리를 몸으로 살아낸 그리스도인의 삶이 묻어납니다. 단지 행동의 변화가 아니라, 가치관의 변화, 관계의 방식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SK회장님은 주일을 지키는 삶을 그리스도인의 외형적 특징으로 꼽았습니다. 세상은 일요일을 쉬는 날로 삼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날’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닙니다.
“이사야 6장에서,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예배당에 앉아 그분의 임재를 기대합니다. 저는 현실주의자지만, 그 장면을 상상하며 일찍 도착해 묵상하는 것이 저의 예배 준비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출석’이 아닌 예배의 구별됨, 곧 마음과 시간, 공간의 거룩한 분리를 삶으로 실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SK회장님의 이 고백에 대해, 저는 깊은 공감을 표현하며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회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구별됨’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시간을 구별하고, 마음을 구별하고, 물질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들이구나.”
이 응답은 ‘주일 성수’라는 외형적 행위가 단지 율법적인 지킴이 아니라, 거룩함을 실천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통찰로 이어집니다. 마음, 시간, 물질이라는 삶의 세 가지 중요한 자원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 말했습니다.
이 흐름을 따라, 준파이퍼님이 하브루타 교사로서 흐름을 정리하며 구별됨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주었습니다.
여러분, 이 구별됨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히브리어로 ‘코데시’라고 합니다. 거룩은 단순히 도덕적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서 세상과 분리된 상태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헌신하는 건 헌신이 아닙니다. 상식입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당연히 그렇게 살게 됩니다. 그것은 억지로 짜내는 헌신이 아니라, 기쁨으로 드리는 자발적 순종입니다.”
이 말씀은 곧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거룩함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이며 상식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그래서 눈에 띄지 않더라도, 깊이 있고 견고한 중심, 하나님께 드려진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진리를 다시금 새기게 됩니다.
세번째 질문 : 당신은 어떤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나요?”
준파이퍼님께서는 하브루타의 본질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하브루타는 방법론이 아니라 삶의 양식입니다. The way of life. 단순히 책을 읽고 질문을 던지는 것을 넘어, 생각하고 토론하고 성찰하는 태도,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과도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158페이지의 본문 구절을 함께 읽었습니다. 써니님께서 낭독해주신 이 문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녀야 할 관계성과 긴장감을 절묘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믿음의 형제자매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서로 돌보고 서로 관심 갖고 서로 세워가며 애써야 합니다. 비록 현재 만족할 수 없는 삶의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부르신 그 소망에 기대하고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읽고 생각하고 모색하고 숙고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자세를 한순간도 흩트려 놓을 수가 없습니다. 논쟁을 위한 토론, 논쟁을 위한 논쟁이 아니라 영적으로 서로 세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토론하고 논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하브루타의 정신이자,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에 대한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저의 삶의 자리를 구체적으로 나누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부모님의 아들이고, 두 아이의 아빠이자 회사의 임원이자, 교회의 집사이고 찬양팀 싱어이기도 합니다. 짧은 시간에 스무 가지가 넘는 역할을 생각해 냈어요.이 것도 아주 일부분에 불과할 거에요”
그 수많은 역할들 속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는 삶, 그러나 어느 순간 문득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것이 정말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일까?’ 하는 물음이 스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도달한 결론:
믿지 않는 사람이 저를 보면서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삶.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아닐까요?”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곧 팔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내면화하고 실천하는 삶이 곧 그리스도인의 방식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써니님께서는 이 날의 질문—“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요?”—을 받고 한참을 망설였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오늘 질문이 제게는 너무 어렵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그 말은 단지 어려움의 표현이 아니라,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된 정직한 응답이었습니다.
써니님께서 붙잡은 문장은 책 속 바로 위에 있던 문장이었습니다.
“온 힘을 다해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노력하되,
온 힘을 다해 주님의 권능과 지혜와 은혜에 완전히 의존해야 한다.”
이 문장을 읽으며 써니님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현실적인 고충을 나누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은 예배 하나 제대로 드리는 것도 쉽지 않은 시대예요.
신앙을 지키는 게 너무 어렵고, 예배 시간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도 너무 힘이 들어요.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누군가는 전심으로 예배하고, 누군가는 멍하니 지나가고…
저 역시, 그 사이에서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써니님은 신앙을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마음을 지킨다는 것, 그건 생각보다 더 어렵고, 그래서 더 훈련되어야 하는 거구나… 깨닫고 있어요.”
삶의 방식이란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고 방향을 고수하느냐의 문제임을 말한 셈입니다.
한편 SK회장님이 질문을 조금 좁혀 “써니님은 어떤 꿈과 소망을 품고 사시나요?”라고 되물었을 때, 써니님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소망을 나누어주었습니다.
“크게 대단한 꿈은 없지만… 그냥, 제가 하는 일이나 제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아, 나 저 사람 때문에 교회를 한 번 가보고 싶다’ 그런 마음을 품게 되면 좋겠어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제 오랜 소망이었어요.”
그러나 이 꿈은 막연하거나 환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향기를 내뿜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써니님은 이미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그게 얼마나 어려운 꿈인지 실감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더 많이 배우고, 더 정직하게 제 마음을 들여다보며 살고 싶어요.”
이 고백은 질문의 무게에 눌리지 않으면서도,
그 무게를 고스란히 품은 채 걸어가려는 한 그리스도인의 조용한 결심처럼 들렸습니다.
SK회장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라는 질문 앞에서 한 사람의 믿음이 세대를 건너 어떤 방식으로 전해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며 나누어주었습니다.
저에게는 큰 소망이라기보다도, 한 가지 분명한 꿈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 손자, 손녀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믿는 것입니다.”
SK회장님은 늦은 나이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처음엔 아내가 더 믿음 안에서 잘 서 있었다면 자신도 더 일찍 예수를 따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솔직히 고백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을 탓이나 후회로 돌리기보다, 그것이 오히려 남은 시간을 더욱 의미 있게 살아야 할 이유로 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주려 했지만, 아이들이 성장해 각자의 가정을 꾸린 후엔 내가 이끌 수 있는 선을 넘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손주들에게 집중하고자 합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과 루틴 전체를 바꾸게 만든 신앙적 결단이었습니다.
“손자 손녀들에게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로, 저는 요즘 성경공부를 하고, 말씀을 깊이 연구하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전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질문하고,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하브루타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성준 목사님의 교수법을 배우고자 독서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매주 빠짐없이 정해진 루틴 속에서 말씀을 연구하고 아이들과의 소통을 위한 지혜를 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루틴은 단순한 시간표가 아닙니다. 그분의 신앙 고백이 담긴 시간의 구조입니다.
“새벽에 조깅을 다녀오고 나면, 오전 시간엔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을 공부합니다.
오후에는 교회 일을 보고, 필요하신 분이 있으면 심방도 갑니다.
하루 일과가 대충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목적에 따라 짜여져 있습니다.”
그렇게 짜인 루틴은 단순한 시간표가 아니라, 하루를 말씀과 공동체로 정리해주는 질서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조용한 헌신의 형식이기도 합니다.
준파이퍼님은 이 고백에 깊이 공감하며 말했습니다.
“루틴은 처음엔 내가 만들지만, 나중엔 그 루틴이 나를 도와줍니다.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에너지를 절약하고 삶의 질서를 만들어주는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SK회장님이 걷고 계신 이 길은 ‘손주들에게 신앙을 유산으로 남기기 위한 일상의 헌신’이며,
그 삶의 방식을 지탱해주는 힘은 말씀과 공동체, 그리고 질문하는 하브루타의 힘이었습니다.
그분의 꿈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깊이, 그리고 단단하게 삶 속에서 다져진 고백이었습니다.
“제 삶의 방식은, 그 아이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매일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 아이들이 예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지금 제 삶 전체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그 말씀이 너무도 조용했기에, 우리는 더 오래 그 울림에 귀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살아내야 할 삶의 방식이라는 확신을 함께 품게 되었습니다.
생각은 깊어졌고, 마음은 조금 더 단단해졌습니다. 『생각한다는 것』 3장은, 그렇게 우리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