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성품 닮아가기

by 리얼팔

당신의 기도제목은 평안하십니까?


평소 제가 가장 많이 드리는 기도 제목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떠오르지만, 단연코 가장 자주 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해 주세요.”

또는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기도는 제 삶의 자리마다, 자녀를 향한 마음마다 늘 흘러나오는 간절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질문이 제 안에 피어올랐습니다. 과연 나의 삶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 기도가 응답되어서 나의 삶이 바뀌게 되는 체험을 실제로 한 적이 있는가? 정직하게 말하자면, 저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깜빡이도 켜지 않은 채 갑작스레 끼어들게 되면, 겉으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제 마음속은 이미 전쟁터입니다. 온갖 나쁜 보복의 시나리오를, 아주 치밀하게, 순식간에 다 저질러 놓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삶의 매 순간, 여전히 이와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도대체 왜 이렇게 나는 예수님을 닮아가지 못하는가?”라는 자책과 회의가 고개를 듭니다.

오늘 아침, 이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도는 했고, 변화는 기대했지만, 정작 그 변화가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질문 앞에 저는 멈춰 섰고, 다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뇌는 아주 인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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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500원짜리 동전 앞면에 있는 학의 머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지?”

우리는 그 동전을 살면서 수천 번, 아니 어쩌면 수만 번쯤 봤을 겁니다. 그런데 막상 떠올려 보려고 하니, 도무지 감이 오질 않았습니다. 정말 아리송했습니다.

그래서 확인해 봤습니다.

학의 머리는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 이후로는, 누군가 “학의 머리는 어느 쪽을 향하고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이제는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이요.”라고요. 이 일을 겪고 나서, 한 가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어떤 사물이나 사실에 대해서 그냥 무심코 지나치게 되면 그걸 아무리 많이 보고, 많이 겪는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제대로 인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뇌의 구조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들은 한 강연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뇌는 ‘인지 구두쇠’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정보를 받아들일 때 아주 인색하다고 합니다. 꼭 필요한 정보가 아니면, 금세 흘려버리고, 곧잘 잊어버리는 것이 뇌의 기본적인 속성이라는 것이죠. 이 단순한 500원짜리 동전의 경험 하나가 우리의 뇌가 얼마나 절약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지를 참 인상 깊게 보여주는 사례가 된 것 같습니다.


뭔가 대단히 귀중한 것을 획득한 기분 : ft, 메타인지


이런 면을 저의 기도생활에 적용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매일 반복적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님 닮게 해 주세요. 예수님 닮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알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 기도가 너무 두루뭉술하게 들려옵니다.

정작 구체적인 무엇인가 없이 그냥 습관처럼 흘러나온 기도였던 것이죠.

그래서인지, 저의 삶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저는 문득, 뭔가 대단히 귀중한 것을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잃어버린 열쇠를 찾은 것처럼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메타인지라는 것이 작동한 것입니다. 하브루타를 알게 되고, 메타인지의 가치를 깨닫게 된 이후부터는 ‘모른다’ 또는 ‘모르는 걸 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 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실제로 이 메타인지가 작동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무언가를 모르고 있거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그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되면, 그 무언가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될 가능성은 거의 100%에 가깝게 커지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엇을 모르고 기도했는지를 자각하는 순간, 비로소 그 기도의 방향도, 내용도, 삶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오늘 처음으로 조금 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닮기를 원합니다?”


매주 주일 성수를 통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또 성도들 간의 교제를 통해 말씀에 대해 나누고, 성경 묵상도 꾸준히 하고, 묵상 에세이도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의 삶에서 변화가 더디게 일어나는 이유는 기도를 구체적으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는 구체적으로 하라는 말을 참 많이 들어왔습니다. 저 또한 항상 들어왔던 말이었지만, 그 “구체적”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사실은 잘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예수님을 닮기를 원합니다”라는 기도. 저는 이 기도를 아주 구체적인 기도라고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니, 그것은 너무도 추상적인 외침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말 자체가 기도문으로 쓰기엔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너무도 큰 개념이고 큰 범주를 대략적으로 지칭하는, 아주 스펙트럼이 넓은 기도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인 기도 제목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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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아침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이라는 게 과연 어떤 것일까? 이걸 먼저 알아야겠다.’

예수님의 성품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한 가지씩, 한 가지씩 구체적으로 알아가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말씀을 통해서 그것들을 찾아내야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성품들 가운데, 매일의 기도에서 한두 가지에 집중하는 겁니다. 마치 500원짜리 동전 위의 학의 머리를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정확히 알게 되었듯이, 이제는 예수님의 성품 하나하나를 직접 확인하며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이 생겼습니다.

“아, 예수님의 성품에 이런 것들이 있네.”

물론 찾는다고 해서그 모든 성품을 다 찾아낼 수는 없겠지만, 세 개도 좋고, 네 개도 좋습니다. 일단 구체적으로 찾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품이라는 게 이런 게 있구나” 하고 그 성품들을 정리한 다음, 그때부터는 그 중 하나를 정해 “오늘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겠다”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물론,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당장 나의 삶이 확 바뀌는 걸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우리 삶에서 변화는 아예 없거나, 아니면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영성 바로미터


그렇다면 예수님의 성품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찾아낼 수 있을까요? 이 질문과 연관해서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읽었던 소설 한 권이 생각났습니다. 책 제목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입니다. 오래돼서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기억나는 건 주인공이 어느 날 자기 삶 속에서 ‘내 삶이 길을 잃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예수님의 삶을 자기 삶에 투영시켜 삶을 회복하고자 시도합니다.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예수님이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하셨을까?”를 끊임없이 성찰해 보고, 그대로 실천해 나가는 이야기였죠. 하지만 저는 그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했습니다. 읽어가는 동안 주인공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을 거야”라고 느낀 후 행하는 모든 행동이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선택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물질적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면서 수십만 장을 발행했던 신문을 예수님의 가치관에 비추어 ‘불의하다’고 판단하고는 온갖 수고와 위험을 무릅쓰고 전량 회수해 폐기한 후,새롭게 다시 출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그 당시의 저에게는 너무 비현실적이었고, 제 상식과는 너무도 큰 괴리가 느껴졌습니다.

아마 그 책을 읽은 것이 10년 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이제 막 아내를 만나 교회를 출석하게 되긴 했지만 믿음이 아직은 연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그 괴리감은, 지금은 아마 느끼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중간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 몇 가지는 분명히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성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달라지고 변화되고,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이 그 변화의 정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책을 읽으며 여전히 "너무 이상해. 너무 괴리감이 느껴져.” 이런 느낌이 든다면, 그건 제가 아직 예수님의 성품을 닮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하나의 지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라도 그 책을 다시 꺼내서 끝까지 읽으며 내 삶과 예수님의 성품 사이의 거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항상 책장에 그 책이 꽂혀 있는 걸 볼 때마다 “저거 한번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부터 이 글을 완성하기 위해 계속 이 글을 읽고, 쓰고, 고치고를 반복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이 생각은 이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계속 제 안에 머물러 있겠지요.그리고 이 글을 마침내 완성하고 난 다음에는 드디어 그 책을 다시 꺼내 읽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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