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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숲 Mar 09. 2020

Mom's call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을 테니까

3월의 산문 #5

"아들, 밥은 먹었나?" 

"김치 다 먹었제? 뭐 필요한 거 있나?"

"밖에 나갈 때는 마스크 꼭 하고 다니고"


몇 번의 전화를 엄마와 나누더라도 늘 하는 이야기는 비슷하다. 딱히 전할 말은 없다. 날씨는 어떤지, 건강은 한지, 점심은 맛있게 먹었는지, 꼭 아프면 병원 가라고. 나는 밥 잘 챙겨 먹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귀찮음 섞인 말투로 대답한다. 그러다 전화가 끊기고 나면 친구와의 카톡이 더 재밌고 인스타 게시물에 달린 댓글이나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한참 폰을 만지다 배가 고파 냉장고 문을 열면 엄마가 보내준 김치와 반찬들이 냉장고를 차지하고 있고 나는 당연스레 엄마가 보내준 쌀로 밥을 지어 그럴듯한 밥상을 차린다.  


내가 알아서 다 한다니까

단골 멘트. 밥 챙겨 먹으라는 말, 운전 조심하라는 말, 여행 가서 조심하라는 말, 감기 조심하라는 말,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냐는 말. 엄마의 말이 잔소리만 같을 때 이제 나도 다 컸다고 신경 안 써도 된다며 하는 나의 말. 무슨 말을 해도 괜찮다는 말. 별 거 아니라고. 엄마 뒷바라지 없이도 나는 괜찮다고. 그러니까 걱정 좀 하지 말라고. 나도 이제 내 할 일은 다 할 줄 아니까. 그럴 줄 안다고 생각하니까. 


나와 엄마의 스물다섯

엄마가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다. 포항의 시골에서 외할머니의 소중한 딸로 태어났다. 70년대 시골에서 국민학교 시절을 보냈다.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어 했다. 엄마의 눈에 국어 선생님은 선생님 중에서도 가장 많은 걸 알고 배움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따듯해 보였다고 한다. 중학교가 끝나자 외할아버지는 단호했다. 엄마에게 더 이상의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엄마는 언니와 부산으로 갔다. 온천장 근처의 작은 집. 통근버스에 몸을 맡기고 양산에 있는 공장을 가면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들을 보내며 일을 했다. 엄마의 일터는 금성이었다. 한 달 동안의 업무가 끝나고 나면 노란색 봉투에 든 돈을 만질 수 있었다. 엄마는 대부분의 돈을 고향에 보냈다. 어린 엄마는 자신의 노동으로 번 돈을 가족의 경제에 보탰다. 나보다 더 어린 나이였다. 스물다섯의 나는 여기서 엄마의 잔소리에 관한, 엄마의 이야기에 관한 글을 끄적이지만 스물다섯의 엄마는 결혼을 했다. 

엄마의 건강을 걱정하며 엄마와의 산책을 귀찮아한다.

"엄마, 내가 나이가 몇인데.."

"80 먹은 할머니 눈에도 60 먹은 자식이 도로 나갈 때는 걱정되는 법이다. 아들아!"  


엄마가 걱정을 좀 덜했으면 좋겠다. 가끔은 내 용돈보다 엄마의 옷을 사는데 돈을 더 많이 쓰면 좋겠다. 아프면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큰돈을 써가며 건강검진을 받았으면 좋겠다. 엄마도 좋은 카페에 가서 맛있는 커피를 종류별로 마셔봤으면 좋겠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 대신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식탁 위에 올렸으면 좋겠다. 옛날에 많이 할 수 없었던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해외여행을 가서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 했으면 좋겠다. 악기도 배웠으면 좋겠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했으면 좋겠다. 엄마도 엄마의 엄마에게 가서 집밥 먹고 싶었다고 어리광 부렸으면, 나처럼 그냥 하루 종일 유튜브를 보며 누워서 놀 수 있었으면, 엄마에게도 엄마로서의 시간보다 영희 씨의 시간이 더 많았으면...


Mom's call

엄마의 언니가 허무하게 일찍 먼 여행을 갔을 때 엄마가 더 이상 엄마의 엄마를 볼 수 없게 됐을 때 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엄마의 최근 전화에서 잠긴 목소리에 나는 혹여나 어디 아픈 건 아닐까 하는 생각밖에 못했다. 엄마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영희 씨를 잘 모른다. 잠긴 목소리에 엄마에게 "무슨 일 있어?"라는 말 한마디도 건넬 줄 모른다. 그러면서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엄마의 삶에 붙어살고 있는 중이다. 


엄마가 더 이상 엄마라는 존재를 갖지 못하게 됐을 때 나는 이기적 이게도 내 생각을 했다. 엄마가 오랫동안 누나와 나의 엄마로 남아줬으면, 내가 조금 더 넉넉히 돈을 벌 수 있을 때까지 그래서 엄마에게 더 좋은 걸 해줄 수 있을 때까지 건강해줬으면 하고 말이다. 엄마가 친구들에게 내 이야기를 자랑스레 할 수 있을 때까지 건강했으면...


"엄마의 꿈은 뭐였어?"

"엄마는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더라"


엄마의 전화, 엄마와의 산책, 엄마와의 이야기. 나는 여전히 집밥 먹고 싶다고 칭얼거릴 엄마가 있다. 엄마는 이제 그럴 엄마가 없어져버렸다. 인생의 따듯함 중 하나가 엄마에게서 사라졌다. 그 빈틈을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조금 채워줄 수 있었으면.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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