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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숲 Feb 04. 2020

대학의 의미

과거의, 지금의, 미래의

 

  어쩌면 우리에겐 다들 이런 기억 하나쯤은 잊지 않을까 싶다. 수능을 치기 전 9월의 고등학교. 3학년 교무실에서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각 대학의 자료를 보며 수 계산에 돌입한다. 어떤 학교를 지원할지 어떤 학과를 지원할지, 더 높은 가능성이 있는 곳은 어딘지 끊임없이 살핀다. 그렇게 손에 쥐어진 6개의 카드를 가지고 수험생들은 자신들의 지난 19년 인생을 결정할 눈치싸움을 한다. 어디 비단 이게 고등학교만의 풍경인가. 수많은 학생들이 들락날락 거리는 학원가 역시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을 보냈다는 자랑스러운 플랜카드를 만들기 위해 바빠지기 일쑤다.


  공대가 취업이 잘 된다니까


  5년 전 나의 입시가 떠오른다. 나 역시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교무실을 왔다 갔다 하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그러한 것처럼 친구들 역시 나에게 입시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때 나는 겉으로는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했다. 살면서 중요한 건 행복이라는 말을 반쯤 농담으로 던지며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나는 기필코 더 좋은 대학에 가기를 희망했었다. 모순적이지만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19살짜리 고등학생에게 더 좋은 학벌로의 진입, 더 멋져 보이는 간판을 가지는 것은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가온 11월, 결과적으로 나는 내 인생 가장 망친 시험을 수능에서 보았고 그때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 동안은 여태껏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었던 걸까 하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분명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하고 다녔는데 막상 허망한 결과가 나오니 내 인생의 전부는 곧 수능이었다는 걸 여실히 깨닫고 만 것이었다.

  고등학교 3년을 다니면서 어른들로부터 귀가 닳도록 들은 말이 있었다. “공대가 취업이 잘 되니까 관련 학과를 노려서 가면 좋다.” 세뇌가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 일말의 관심이 있어서였을까. 잘은 알 수 없으나 내 꿈은 고등학교 3년 내내 기계공학과로 진학을 하는 것이었고 어떻게든 고3 입시에 유리해 보려고 ‘자동차 엔지니어’라는 막연한 꿈을 생활기록부에 적어었다. 그땐 그렇게 적어내는 것이 입시에 유리한 일인 줄 만 알았다. 또 이렇게 차근차근 내 인생의 첫 방향을 잡아가는구나 싶었다. 그때까지 만해도 학교와 학원에서 하는 ‘교육’은 내게 절대적이었고 두말 할 것 없이 내 꿈과 진로를 결정하는 방식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언론정보학과에 다니고 있다. 주변의 친구들이 숫자에 파묻혀 살고 그래프와 역학 등을 다루는 것과는 다르게 언론학을 배우며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와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때의 나는 내 진로와 꿈에 얼마나 확신했었는지. 대학을 가기 위해, 성적을 높이기 위해 공부한 것은 도대체 누굴 위해서였는지. 내가 중심인 꿈을 꾸었던 것인지 아니면 선생님이, 학교가, 사회가 바라는 꿈을 그렸던 것인지 말이다.        


  우리의 교육은 어떤 과정을 걷고 있나


  2018년 5월이었다. 당시 나는 대전의 한 카메라 감독 밑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대전 MBC와 대전광역시교육청에서 홍보영상과 캠페인을 만들고 싶다는 의뢰가 들어왔었다. 촬영 당일, 여느 때와 같이 교실에 들어가 장비를 놓고 위치를 확인하며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귀여운 명찰을 한 초등학생들이 앉아있었다. 그 아이들의 명찰에는 자신의 장래희망이 적혀있었다. ‘법의학자’, ‘기계공학기술자’, ‘정당대변인’, ‘앱 개발자’. 조금 낯선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요즘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바로 접한 세대이고 최소한의 아날로그도 접하지 않은 세대라고 백번 생각해볼지라도 과연 초등학교 6학년 되는 아이들이 써 낼 법한 장래희망 같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의 10년 남짓 되는 인생에서 부모님과 선생님이 환상에 젖은 ‘직업’을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이라는 귀여운 이름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학부모 인터뷰였다. 엄마와 함께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가 책장 앞에 서 있었다. ‘저 커다랗고 까만 건 뭘까?’라는 눈으로 여자아이는 카메라를 쳐다봤다. 그런데 촬영이 시작되고 모니터에 비치는 학부모의 인터뷰 내용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학교의 프로그램이 아이들로 하여금 직업의 꿈을 갖게 하고, 진로를 찾아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것 같아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고작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이런 말을 하다니. 10살도 채 안 된 학생을 옆에 두고 진로니, 직업이니 그런 어른들의 가치를 들이밀다니. 어머니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말을 하게 만드는 그리고 이런 홍보영상을 찍는 우리의 공공기관과 우리의 언론이 문제였다.

  그렇다. 그저 교육을 직업으로서만 생각한 것이다.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기본적인 가치와 공동체 속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방식, 타인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등의 모습들은 볼 수 없었다. 또한 아이들이 자유로운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수업의 비전도 없었다. 진로와 직업이라는 것 따위를 벌써부터 알려주고 있었고, 공부를 해서 성적을 잘 맞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성적을 잘 맞은 아이는 단숨에 ‘모범’생이 되었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나머지’가 되고 있었다. 익숙했다. 불현 듯 그 뒤편에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한국의 정규교육을 받은 우리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소위 말하는 기성세대들이 지금에 와서 말하는 것과는 분명 사뭇 다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방황을 겪고 있고 취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그러는 사이 지난 12년의 세월동안 우리를 밤늦게까지 공부 시킨 어른들은 이제 와서 ‘창의’를 외치고 ‘인성’을 논하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 낸 교육의 틀 안에서 학생들은 오늘도 삶에 대한 가치와 창의적인 표현 같은 것들은 터득하지 못한 채 바쁘게 살아가는데 말이다. 그저 영어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풀며 밤을 지새우고 있는데 말이다.  


  교육도 결국은 빈익빈 부익부


  고향친구 중에는 고려대학교를 다니는 친구가 있다. 한 번은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다. 처음 가 본 고려대 근처의 대학가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우리가 아는 서울의 거리와는 다르게 제법 한적한 모습이었다. 그날 약속 자리에는 내 친구의 친구도 있었는데 둘은 고려대에서 전자공학(세부적으로는 이름이 더 길지만 큰 범주로는)을 전공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옆 친구의 부모님이 대학 강단에 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영어도 많이 접하고 내 주변의 공대 친구들이 역학공부를 힘들어하는 것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심 확실히 ‘SKY’ 학생들은 공부의 측면에서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뒤의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먼저 말해두고 갈 게 있다. 결단코 좋은 대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의 노력과 열정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또한 무조건적으로 질투하는 것 역시 아니다. (나 역시 어떤 누군가에겐 대단한 노력을 한 사람이며 가지지 못한 결과를 가진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산다) 나는 지금의 순간에 다다르기까지 그들이 땀 흘린 시간을 인정한다. 또한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노력파’들의 의지를 알고 있다. 내가 문제가 된다고 여기는 건 시스템이다. 지금의 세태를 돌아보건대 과연 이 친구들이 이 과정까지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든든한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 아래 한 번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며 공부를 했고 그 이전에는 입시라는 전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경쟁적으로 선수학습을 했을 테다. 어느 누구의 자식들처럼 대학논문의 제1저자나 연구실에 들어가지는 않았더라도, 다들 학구열이 넘쳐나는 학군에서 남부럽지 않은 과정을 밟으며 지금에 도달했을 것이다. 누구나 누려야 할 교육의 권리가 ‘빈익빈 부익부’라는 자본시장의 논리 위에 있는 것을 씁쓸히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이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잘못된 건 아니다. 나 역시 미래에 가질 경제적 여유를 내 자식에게 충분히 쏟고 싶다. (그러나 결코 경제적 여유를 내 자식의 경쟁적인 교육에 쏟아 붓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문제는 이런 개인적인 것들이 아니다. 어긋나버린 전체의 틀. 그게 현재 우리가 가진 문제이다. 사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어디가고 없는 채로 고달픈 쥐어짜기가 밤새 이루어진다. 학생들에게 대학 입시 배치표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는 학과들을 추천하고 있거나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지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어 안달 나 있다. 미래에 대한 청사진 없이 우리의 교육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눈앞에 5년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당장 다가올 미래가 아닌 100년이 넘는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사회가 공통으로 지녀야 할 가치교육 위주의 시스템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은 고스란히 우리 다음세대에게 전달될 것이며 똑같이 경쟁에 매몰된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장 먼저 돌아볼 것은 자기 자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이제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자. 우리는 SNS에서 만큼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보는가. 우리의 배움이 살아 움직이는 강의실에서 인터넷 세상만큼 열정적인가. 더 많은 인생의 경험과 학문의 수준에 도달한 교수님들이 앞에서 열띤 주장을 펼치고 배움을 나누어도 집중해서 듣는 사람은 절반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뒷자리 구석에서 잠을 자거나 수업이 언제 끝날지 기다리며 핸드폰을 만지기 일쑤다. 던져진 질문은 민망하게 공중에 떠다니며 답해줄 누군가만을 찾고 있을 뿐이다. 학생들이 답하기를 교수님은 목이 타게 기다린다.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대학을 다니는 학생으로서, 시민을 위하는 것이 언론이라고 배우는 학생으로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취업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놀지 말라는 소리도 아니다. 청춘을 즐기는 것은 젊음의 특권이고 취업은 자본주의 시대에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다만 취업이라는 것에 매몰돼 학점이라는 숫자에 허우적거리거나 스펙을 위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어떤 일을 할지 상상하고 꿈을 위해 묵묵히 또 부끄럽지 않게 나아가야 한다.

  내가 언론정보학과에 와서 들은 말 중 가장 울림이 있었던 말이 두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끊임없이 틀리고 다르게 보라”였다. 공대에선 성공률이 99%에 달하여야 한다. 정확한 숫자와 규격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곳에선 그게 아니다. 나와 다른 이의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느껴야 한다. 시험문제를 틀릴 수도 있으며 생각의 오류에 빠질 수도 있어야 한다. 겉보기에는 이상해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없이 발전하는 것이다. 틀리는 게 무섭고 남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것 같아 두렵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치열하게 하는 공부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까짓 거 격렬히 틀려보고 부딪히며 경험해 보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음에도 우리는 지레 겁을 먹고 침묵하는 것일 수 있으니 말이다.

  두 번째는 “길을 가다 떨어뜨린 편지를 누가 읽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쓰라”였다. 살다보면 꽤나 부끄러운 행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모의 그늘을 보호막 삼아 음주운전을 일삼는 사람도 있으며 아무 이유 없이 타인을 깎아 내리는 익명의 사람들도 존재한다. 우리는 그들과는 달라야 한다. 언론은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고 배웠다. 또 언론이 충성해야 할 대상이 시민이라고 배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끄럽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 되어 위선을 일삼는 게 아닌 진심으로 내가 하는 일이, 내가 하고 있는 이 공부가 타인에게 위로와 즐거움을 줄 수 있게 해야 한다. 길을 가다 마주한 어떤 이가 우리의 지난날을 무심코 돌아보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만들어 가야 한다.

  다시 한 번 돌아보자. 우리는 우리의 수업에서 어떠한가. 그저 편안함에 안주하는 것은 아닌가. 타인의 열정을 헐뜯지는 않는가. 실로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하지는 않았는가. 이제는 작은 것에 애걸복걸할 것이 아닌 더 나은 개인과 사회가 되기 위해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게 우리가 대학에 다니는, 대학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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