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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숲 Apr 08. 2023

나의 '동기' 부여

동기(同期), 그리고 동기(動機)

갑자기 조금 부끄러웠다. ‘내가 뭐라고? 내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그랬던 거지?’ 제천의 찬 바람이 얼굴과 목덜미를 때렸지만 그보다 더한 부끄러움이 깊은 곳에서 일렁거렸다. 사건은 은별이의 글을 보면서부터였다.


우리 저널리즘대학원에는 작문 수업이 있다. 커리큘럼상 나 같은 PD지망생은 듣지 않고 주로 기자 지망생 친구들이 듣는다. 다양한 작문 주제가 나오곤 하는데, 그때마다 많은 친구들이 괴로워한다. 마감의 압박, 어떻게 써야 할지 의문스러운 작문 주제와 방법, 그 모든 걸 간신히 해 내고서 듣게 되는 선생님의 날카로운 지적. 결코 쉬운 수업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난 내 수업이 아니어서 그런지 동기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늘 흥미를 느낀다(다음 학기가 되면 나도 고통스럽겠지만…). 


이번 작문 주제는 타인을 시각으로 관찰하기였다. 열심히 제천역에 가 한 할머니를 관찰했다는 은별이의 글을 읽게 됐다. 

“음… 난 이 첫 문단이 좀 까끌까끌한 거 같은데? 이걸 약간 부드럽게 바꿨으면 좋겠다. 그리고 뭔가 마지막에 좀 허무하게 끝나는 거 같아. 오히려 너희 할머니 이야기를 썼으면 그 이야기로 쭉 가봐도 되지 않나? 어차피 결말은 너의 주관적 상상이 들어가도 되니까.” 

은별이의 글을 꼼꼼히 읽고 난 후 내가 뱉은 말이었다. 내 딴에는 좀 더 나은 글이 될 수 있도록 해 준 말이었다. 그런데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내 말이 도움이 아니라 간섭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은별이를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이 친구가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있다는 건 안다. 누군가를 돕고 싶어 하고, 세찬 바람을 맞이한 사람에게 포근한 담요가 되는 기사를 쓰고 싶어 하는 친구란 걸 안다. 자신만의 장점과 강점으로 조금씩 성장하고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친구에게 내 얕고 섣부른 판단이 자칫 해가 되지 않을까, 한편으론 걱정됐고 다른 한편으론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은별이만 그런 게 아니다. 이곳엔 나에게 없는, 그리고 나보다 더 나은 시선과 강점이 있는 친구들이 모여 있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껴 공부를 위해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온 승연이 형이 있고, 중국에서 대학까지 마치며 어쩌면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꿈을 위해 도전하는 준영이가 있고, 다른 동기들의 엄마뻘이지만,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공부에 도전하는 옥주쌤이 있다. 나와 가까운 PD반 동기들 외에도 자신의 부족을 채우며 여태껏 삶을 살아온 대환이형, 섬세하고 다정한 예나, 꼼꼼하고 정의로운 벼리, 체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재호, 수많은 경험을 가진 다연이 누나, 불의에 가슴이 타는 혁규까지, 16명의 기자 지망 동기들도 자신만의 매력과 재능으로 이곳에 있다.


지난 몇 년간 미래를 생각할 때면 불안이 많았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 ‘이렇게 하면 PD라는 그 무언가가 될 수 있을까?’ 그럴 때면 2019년 봄의 내가 떠오르곤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처음으로 공부가 재밌었다. 나 혼자 꾸역꾸역 무언갈 하는 게 아니라,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준 게 부모님이었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준 내 은사님을 뵌 해였고, 지금까지도 멋진 형들이라고 느끼는 영원이 형과 동훈이 형을 수업 때 본 해이기도 했다. 그때의 정말 사소했던 시간이 아직도 내게는 직업과 꿈을 향한 원동력과 동기부여로 남아 있다.


지금 함께 공부하는 이들이 잘 됐으면 좋겠다. 물론 나도 그들 덕에 잘 됐으면 좋겠다. 잘 된다는 게 마냥 언론사에 입사하는 것만은 아니다. 삶이 더 나아졌으면 좋겠고, 각자가 원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능하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내가 나의 동기들에게 간섭이 아닌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들에게 힘을 보태고 나는 그들로부터 2019년과 같은 원동력을 얻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게 새로운 의미의 ‘동기 부여’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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