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기대
대학원생이 됐다. 2월 말 한 방송국의 입사 시험에서 최종 탈락을 겪으며 준비했던 저널리즘 대학원에 들어왔다. 일반 대학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이 언론인 양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학이라는 학문의 탐구보다 기자와 PD로서 알아야 하고, 갖춰야 할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면서 언론사 입사 시험을 통과하는 데 목표가 있기도 하다. 쓰고 보니 ‘언론사관학교’라는 별칭을 붙여도 좋을 듯싶다. 하여간, 아직은 적응과 과제라는 두 물결에서 나름 균형을 잘 잡고 있다.
이곳에 들어오려던 가장 큰 이유는 ‘동료’와 함께하고 싶다는 점이었다. 혼자 도서관을 드나들며 나를 따라다닌 불안은 ‘지금 이 길이 맞을까?’ 하는 의심이었다. <아랑>을 뒤지며 정보를 찾고 나름의 분석을 해도 미래는 불안하기만 했다. 이렇게 해서 입사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지, 나는 얼마큼 노력하고 있는지, 이 방법이 어렴풋하게 꿈꿨던 ‘좋은 제작자’가 되는 방법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럴 때마다 카톡과 인스타는 나를 더 괴롭혔다.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은 번듯한 직장을 구했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행복한 데이트를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나는 어딘가 허황된 꿈을 좇으며 궁상맞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꿈이 초라해지기 전에, 내 의지가 약해지기 전에 함께 꿈을 향해 가는 동료를 곁에 두고 싶었다.
모든 만족에는 이상하게 새로운 불안이 생기기 마련인 걸까. 며칠 전, 문득 나의 실력이 ‘뽀록’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계기는 동기들의 칭찬이었다. 그저 웃자고 한 말인데, 지난 시절에서 터득한 얄팍한 배움이었을 뿐인데, 동기들의 칭찬이 있었다. 물론 동기들의 칭찬이 100% 진심이 아니란 걸 안다. 가벼운 격려나 인사치레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큰 기대가 조롱으로 바뀌는 걸 고등학교 시절 경험해서인지 누군가의 칭찬은 불안의 기폭제가 되곤 한다. 때론 첫인상이 안 좋길 바라기도 한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고 실망을 걱정하지 않으면 나 역시 조급해지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런데 기대가 커질수록 내 작문이, 내 기획안이, 내 생각이 볼품없어지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워진다.
방송제작론 수업의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무한도전> 초창기에 사람들이 걱정했어요. 저거 6개월 뒤에 소재 고갈되면 어떡하지? 그때 김태호 PD가 그러더라고요. “그때 가서 생각하죠 뭐. 일단 이번 주 아이템만 생각하게요.” 이번 주만 생각하는 게 김태호 PD의 방법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예능이라 해도 손색없는 <무한도전>의 PD는 내부의 불안과 걱정을 그렇게 잠재웠다. 물론 그가 천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한테는 해당 사항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의 말에 내 불안을 꺼뜨릴 힌트를 찾아본다.
오늘을 거치며 내일은 완성될 뿐이다. 다음 달을 걱정하며 오늘을 써 봤자 이룰 수 있는 건 없다. 심지어 다음 달을 위해 열심히 걱정한들 다음 주가 되어 필요 없어지면 나의 오늘은 의미가 없어진다. 물론 하루하루가 최고일 순 없다. 작문도 기획안도 그럴 수가 없다. 심지어 나는 특출 나게 재능 있는 편이 아니기에 더더욱이나 그렇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오늘 주어진 일을 충분히 고민하며 완성하는 것뿐이다. 깨지고 부서지며 세공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엔 호평에 기뻐하고 어느 날엔 혹평에 쓰라리기도 할 테다. 누군가의 조롱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날이 오면, 가벼운 비웃음 한 방으로 무찌르자.
미완성의 나를 갈고닦아 PD로서의 날을 세심하게 다듬어 나가는 과정이다. 일상의 모든 불안을 지울 순 없다. 사실 불안해서 이곳에 오기도 했고, 이곳에서도 작은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 불안엔 자유가 동반한다. 지금의 나는 무엇이든 이야기하고 실현할 수 있는 오늘이 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자유가 아니다. 오늘만, 이번 주만 생각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자유다. 내게 주어진 이 자유로움과 함께 불안보다 더 큰 기대를 2년간 쌓아보려 한다. 기대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