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수 피해의 현장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도 걸음을 재촉하며 출근길에 나섰다. 거리엔 비가 퍼붓고 있었다. 거센 폭포를 닮은 굵은 물줄기가 하수구로 곧장 박혔다. 신발은 얼마 안 가 몽땅 젖어, 걸을 때마다 ‘찰박’ 소리를 냈다. 비는 위가 아닌 앞에서 나를 때렸다. 그 덕에 정수리 대신 얼굴을 막아야 했다. 카톡. 팀장이었다. “오늘 1시간 늦게 출근해라.” 황급히 집으로 발을 돌렸다. 찝찝한 출근 버스를 피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누웠다.
2020년 7월. 나는 대전의 한 방송국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다. 저널리스트로서의 무언가를 얻을 거란 기대를 갖고 시작했다. 애석케도 일은 실망의 연속이었다. 내 업무는 ‘어그로’였다. 방영된 프로그램을 클립 별로 잘라, 썸네일을 만들었다. 인터넷 밈을 주워 와 하루 5개 안팎의 썸네일을 기계처럼 만들었다. 인턴에겐 현장도 없었다. 가끔 스튜디오 촬영이 있었지만, 준비가 전부였다. 장비를 옮겨 나르거나 영상을 잘라 관심을 끄는 게 인턴 생활의 전부였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사람들과 지내다 하루를 끝내는 일상이었다.
어느덧 1시간이 지났다. 텅텅 빈 버스를 타고 회사로 갔다. 평온했던 침대와 달리 창문 밖은 물난리였다. 특히 강이 불다 못해 넘쳐 있었다. 회갈색 강물은 길게 뻗은 자전거 도로와 푸릇한 잔디밭을 집어삼킨 상태였다.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카톡. 또 팀장이었다. “2층에서 옥상 카메라 좀 조종해라.” 옥상엔 넘쳐흐르는 강을 볼 수 있는 카메라가 있었다. 2층으로 달려가 카메라를 조종했다. 강물을 비추며 유튜브에 실시간 폭우 소식을 전했다.
수 시간을 카메라를 조종하며 현장 사진을 유튜브에 중계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수십 만의 사람이 시청하고 댓글창은 끊임없이 올라갔다. 재밌었다. 어깨도 올라갔다. 대전 사람들은 다 내가 비추는 폭우 현장을 본다는 착각이 들었다. 한 거라곤 카메라 조종뿐이었지만,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매일이 이런 뿌듯한 일로 가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가 사그라들자 유튜브 라이브를 종료했다. 내 할 일은 다 했다. 얼른 퇴근해 집에서 따뜻한 저녁을 먹고 싶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뉴스를 틀었다. 우상단에 ‘속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5층짜리 빌라 단지와 소방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가랑비 사이로 서너 대의 보트가 지나다녔다. 흰 민소매와 반바지 차림의 시민은 비에 젖은 채로 보트 위 소방대원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뉴스는 곧이어 현장을 연결했다. 노란 우비를 쓴 기자가 한 손엔 마이크를, 다른 한 손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침수 소식을 알렸다. 상공에서 바라본 주택 단지가 화면에 나타났다. 회갈색 물이 주택을 집어 삼켰다. 십여 대의 차가 머리만 내밀고 있었다. 섬이 된 그곳을 빠져나오기 위해, 또 구하기 위해 수십 명의 사람이 엉켜 있었다. 다른 뉴스를 찾았다. 온통 정림동 다세대 주택의 피해 소식이었다. 100명이 넘는 주민이 구조대의 손길을 기다렸다. 주택 2개 동이 침수 피해를 입어 당장 오늘부터 주민들이 머물 공간이 없었다. 순식간에 100명이 넘는 사람의 저녁 식탁과 침대가 사라졌다.
온종일 현장엔 기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저널리즘은 하루아침에 살 길이 막막해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전하는 일이었다. 나의 온종일은 무엇이었나. 찝찝한 비를 피해 포근한 침대로 도망쳤다. 폭우를 중계하며 즐거웠고, 뿌듯함을 넘어 내친김에 자랑스러웠다. 그리곤 할 일을 다했다며 저녁 메뉴를 궁리했다. 나의 저널리즘은 딱 그 정도였다. 카톡. 다시 팀장이었다. “오늘 집에 일찍 들어가라.” 다시 뉴스로 시선을 옮겼다. 긴박한 리포트 소리가 가득했다. 화면 아래, ‘정림동 다세대 주택 28세대 침수... 50대 사망’이란 자막이 지나가고 있었다. 따뜻한 저녁도, 포근한 침대도 잠시 미루기로 했다. 아직 비는 멈추지 않았다. 나의 저널리즘을 다시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