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길다고 생각하나,
짧다고 생각하나

서른 살의 시작

by 리얼숲

블라인드를 걷어 올렸다. 먼바다에서부터 달려온 햇빛이 거실에 쏟아졌고, 깔린 어둠이 흩어졌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 식탁 위에 둔 자리끼를 들이켰다. 차갑지 않았다. 미지근한 온도에 다시 침대에 누워도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빛이 스며들었고 물을 들이켠, 어떤 서른 살의 시작이었다.


몇 주 전, 대학원 종강 날 오전이었다. 두 친구에게 무심코 "인생은 길다고 생각하나, 짧다고 생각하나"라는 끝없는 질문을 던진 적 있다. 각각 철학과 국문학을 전공했다. 살아온 인생을 담아 나름의 말을 꺼내는 그들의 답을 듣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다. 때마다 바뀌는 내 생각은 구태여 꺼내진 않았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질문을 들은 한 교수님은 대학원의 모두에게 말을 남겨주셨다.


"다가올 날들을 생각하면 인생은 길고, 지나간 날들을 생각하면 인생은 짧다."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사람일 수도, 사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어떤 끝에 다다른 과정과 결과로 삶을 기억할 수 있다. 저마다 다르지만, 각자의 기억 속 삶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꺼내 놓고 말하자면 끝도 없지만, 아무도 오랜 시간을 들여 들어주지 않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다가올 날들을 생각하며 떠올리는 나의 20대는 공간을 파고들며 이야기를 남겼다. 고민과 방황이, 결정과 다짐이, 시련과 성취가, 두려움과 주저가, 그리고 선택과 노력이 떠오른다. 마땅히 잘나지도, 이룬 것도 없는 삶임에도 다행히 곳곳에 핀 행복 덕에 보잘것없진 않다고 느낀다.


제각기 다른 이들의 삶에 남은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그들 스스로는 별 것 없는 삶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곳곳에 남긴 꽃과 같은 행복 덕에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동시에 말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 뭇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더 낫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그런 말들을 하고자 한다. 세상과 사람을 취재하고, 사실과 이야기를 발견해 전달하고자 하는 일을 하려 한다. 그 일이 외면받는 이들을 조명하고 불합리한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는 소위 공익에 아주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란다. 비록 지금 당장이 아닐지라도, 가장 크고 멋진 곳이 아니더라도 그러고 싶다.


생애 처음으로 김광석을 들었던 적이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에 태어난 아이가 서른이 되었으니, 어느새 그가 떠난 지도 서른 즈음이 되었다. 사람은 떠났지만, 목소리가 남았다. 목소리가 남았으니 아직 가수 김광석은 사람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며칠 전 나의 꿈을 먼저 실천하던 두 언론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시간이 달랐을 뿐, 같은 공간과 같은 교수님 밑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걸 배웠다. 뒤늦게 찾아본 그들의 삶엔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남긴 기사와 다큐멘터리가 남았다. 추운 겨울, 더 이상 그들의 남은 꿈을 볼 수 없게 됐다. 다만 그들이 남긴 기록이 있어 아직 그들이 우리 곁에 남아 있음을 느낀다.


새해 첫날,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틀었다. 어떤 가수의 목소리만큼 어떤 음악가의 피아노 선율이 듣고 싶었다. 몇 해 전부터였다. 새해 처음으로 듣는 노래가 그 해를 결정짓는다는 농담 같은 유행이 퍼졌다. 딱히 그 유행을 좇은 적은 없지만, 올해는 거기에 동참해보려고 한다. 차분하고 아름다우며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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