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억들
질문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때론 아무 생각도 않던 그 사소한 질문들 속에서 누군가의 인생이 살며시 드러나곤 한다.
여름날의 파리처럼 언제나 귀를 맴도는 엄마의 기억을 길어 올려본다.
1962년. 엄마가 태어난 곳은 포항의 한 시골이었다. 마을은 집집마다 농사를 지었고, 더러 소를 키우는 집도 있었다. 엄마의 엄마는 그 시골보다 더 골짜기에서 시집을 왔다. 무려 7남매의 장남에게 시집을 왔다. 매일 시어머니와 남편은 물론, 그 동생 여섯의 삼시세끼 밥을 챙겨야 했다. 그러면서도 외할머니는 자녀 여섯을 두셨다. 딸 셋, 아들 셋. 엄마는 그 힘든 집안일을 해내면서도 마음 놓고 자신의 그릇에 흰쌀밥을 못 푸던 외할머니가 기억난다고 했다. 어린 엄마의 마음엔 '엄마를 돕는 착한 딸'이 첫 장래희망이었다.
걸어서 약 40분이 걸리던 국민학교에서 엄마는 두 번째 꿈을 꾸었다. 바글바글하던 교실엔 꾀죄죄한 애들이 많았다. 시골에서 부모님의 농사를 돕느라 새까맣게 탄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세상을 알려주는 존재였다. 어린 엄마의 눈엔 그게 좋아 보였다고 한다. 공부도 하고 학생들과 대화도 나누며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일이 너무 좋아 보였다. 유달리 기억나는 문학 작품은 없지만, 그렇게 국어 선생님이 멋있어 보였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가지고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으로 부모님의 농사를 도와주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그때 상상해 보았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엄마는 국어 선생님이 될 기회를 빼앗겼다. 외할아버지는 자녀의 교육에, 특히 딸의 교육에 큰 관심이 없었다. 전국이 제조업 열풍이던 1970년대 후반, 외할아버지는 엄마와 큰 이모를 경남 양산으로 보냈다. 겨우 열여섯, 열여덟이던 소녀들은 금성사(지금의 LG) 공장에서 TV 리모컨을 조립했다. 계속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앉은 엄마는 그때 처음 트랜지스터를 봤다고 했다. 엄마와 큰 이모, 그리고 엄마보다 2살 어리던 동네 여동생 세 명이 먼 친척의 집 한편 단칸방에서 지냈다. 10대 소녀들이 공장과 집을 오가며 그 시절을 보냈다.
몇 년 뒤 양산에 살던 친척이 집을 내놓으며 더 이상 그 집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엄마는 부산으로 이사했다. 그땐 부동산 플랫폼도 없어 거리의 벽과 전봇대마다 붙어 있는 '달세 방'을 보며 일일이 주인집을 찾아갔다고 했다. 부산에서 엄마는 부곡동에 살았다. 약간 비탈 진 집, 온천장이 코 앞이었고, 길을 건너 걷다 보면 부산대학교가 나오는 그곳에서 엄마는 20대 초반을 보냈다.
타지 생활의 고됨에도 엄마는 여전히 첫 번째 장래희망을 지키고 있었다. 월말이면 한 달치 작업량과 시간을 토대로 급여명세서와 월급이 노란 봉투에 담겨 손에 쥐어졌다. 방세, 전기세, 똥세(그땐 화장실도 푸세식이었다)를 빼고 약간의 생활비가 남았는데, 그걸 차곡차곡 모아 명절마다 외할머니에게 드렸다. 그래도 월급날이면 부곡시장에 가서 같이 살던 언니, 동생과 칼국수를 한 그릇씩 먹었다. 그게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금성사에서 일하며 가장 좋았던 건 우수사원으로 뽑혔을 때였다. 성실해서, 아니면 조금은 순진해서 엄마는 거짓말 없이 열심히 일을 했다. 어느 날 공장의 높은 사람이 엄마를 찾아왔다. 우수사원이 됐으니 작업반장을 맡아달라는 거였다. 반장이 되면 사람들 앞에 나서야 했다. 그냥 시키는 일만 적당히 잘 해내고 싶었던 엄마에게 작업반장은 너무나 싫고 내키지 않는 자리였다. 그래도 맡았다. 우수사원은 가족 여행을 보내줬기 때문이다. 엄마는 다급히 포항에 전화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 언제까지 양산으로 오라고 했다. 양복을 입은 외할아버지, 한복을 차려입은 외할머니와 함께 엄마는 경기도 평택의 호텔에서 여행을 했다. 다 기억은 안 나지만, 호텔은 물론 유적지를 둘러보았고, 양산에선 회사 견학도 했었다. 엄마는 그때 기분이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효도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엄마는 매번 해내던 첫 번째 장래희망 말고, 두 번째 장래희망을 위해 도전한 적도 있다. 10년 전, 엄마는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비슷한 삶을 살던 동네 친구들과 함께 중년 검정고시를 도와주는 봉사 매체(야학 비슷하다)에 나가 수업을 듣곤 했다. 가게 일을 마치고 오면 그렇게 피곤하면서도 식탁에 앉아 풀리지도 않는 함수 문제를 보고 있었다. 고등학생이던 나에게 '이건 왜 이런 거야?'라는 질문을 매일 밤마다 퍼부었다. 그런 엄마에게 검정고시를 공부하는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엄마는 "나중에 사위랑 며느리 왔는데, 너무 모르면 부끄럽잖아"라고 답했었다. 며칠 전 그때 공부를 하며 기분이 어땠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몰라? 그냥 뭔가를 안다는 게 너무 재밌었던 것 같은데."라고 답했다.
문득 오래전 감나무 밭도 있고, 산도 있고, 하물며 라디오도 있던 외할아버지 집에서 왜 딸을 교육시키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외할아버지가 자녀 교육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외할아버지의 엄마, 그러니까 엄마의 할머니가 반대를 했었다. 돌봐야 할 동생이 여섯이나 있는데, 어떻게 자기 자식만 챙기냐며 눈치를 줬다고 했다. 너무 아쉽지 않냐고, 공부를 시켜주지 않아 서운하지 않았냐는 말에, 엄마는 그땐 어쩔 수가 없었다고 답했다. 그래도 아빠와 결혼한 뒤엔, 꼭 우리 딸과 아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공부를 시키자고 약속했다고 한다. 시대를 견뎌 낸 그때의 약속이 나를 길러 냈다.
의식만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오직 몸으로 겪어야만 느끼는 삶의 기억을 흩어지기 전에 이곳에 남겨 본다.
삶의 욕심이 앞서 불안과 걱정이 짓누를 때. 그 어떤 것보다 내가 작고 하찮게 느껴질 때.
나는 끈질겼던 그녀의 삶을 떠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