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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숲 Nov 14. 2020

차별이란 게 생각보다  애매하더군요

11월의 산문 #1

나는 대학을 다니며 친해진 6명의 친구가 있다. 나까지 포함하면 7명이니 딱 가운데 한 명을 두고 3명씩 서기 편한 구조이다. 친구의 생일이거나 좋은 날, 슬픈 날들이 있으면 모여서 함께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며 우정을 쌓아왔다. 하지만 그런 우정 사이에서도 우리는 서로 다른 모습과 생각을 지닌다. 각자의 인생 경험과 바탕이 되는 관계들, 공부해온 것들, 좋아하는 것들, 앞으로 지니며 살아가야 하는 모든 가치에 있어 우리는 비슷하면서 또 다르다. 그리고 그런 모든 분야들에 있어 나는 내 친구들의 관점에선 진보적인 사람이다. 쉽게 말해 왼편에 서 있는 사람이다. 큰 언쟁까지는 아니지만 나 역시 내가 경험하며 살아온 시간 속에서 깨달은 것들을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설득하고자 할 때가 있다. 아무튼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의 무리에서 나는 가장 왼쪽에 서 있다.


나는 대학을 다니며 전과를 했다. 기계공학과에서 언론정보학과로. 진로가 변하며 공부하고자 하는 분야도 변한 게 이유였다. 학과의 특성상 토론과 발표가 많고 어떤 관점을 지니며 살아갈지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오간다. 한 번은 공모전을 같이 준비하던 후배들과 대화하며 내 생각에 대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들은 말은

"오빠는 엄청 보수적이네요?"였다. 단순한 하나의 일화이긴 하지만 내가 느낄 때도 우리 학과에서 나는 그리 왼편에 서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언론정보학과에서 줄을 서면 평균적으로는 오른쪽에 서 있다.


뻔해 보이는 이 말을 두 단락이나 할애해가며 글을 쓴 건

'나'라는 인물은 여러 모습이 존재하면서도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다는 점과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내 모습은 카멜레온처럼 변한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비단 나뿐만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많은 '나'들 역시 그러하고.


며칠 전 우리 학교에 붙여진 한 대자보를 봤다. 로스쿨에 붙여진 대자보였다. 내용인즉 한 동아리의 톡방에서 이뤄지는 서양 여성에 관한 비하를 비판하며 그러한 문화를 단지 '친목도모'라는 모습으로 방관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단편적으로 말하면 나 역시 무언가 그 글을 읽으며 불쾌했다. 여성도 아니고 서양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며 남성이 많이 속해있는 집단에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난이라고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어떤 대상 집단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해 희롱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성별을 바꾼다고 해도 나는 불쾌하다. '특정인'이 아닐지라도 '특정 대상 집단'을 비하하는 용어가 어떻게 쉽게 받아들여질까. 나와 반대되는 사람들의 의견을 읽고 들으면서 얼핏 이해가 가는 측면은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묘하게 스며드는 불쾌감과 옳지 못하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자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생각이 흔히 말하는 '내로남불'인가? 이유인즉 과거의 내가 그렇게 차별적인 용어를 쓰지 않은 사람이라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별에 대한 차별적인 용어를 쓴 적이 있다. 아마 내 또래의 많은 남학생들이 으레 그래 왔듯 축구를 하며 약한 슛들을 쏘는 친구를 보며

'소녀슛'이라며 장난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직업의 형태에 대해서도 그런 적이 있다. 공사현장에서의 일을 비유한 '노가다'를 반복적인 업무가 있을 때마다 썼다. 그뿐이겠는가. 생각나지 않을 뿐 수차례의 차별적인 용어를 일상을 살아가며 썼다. 그런 내가 과연 이런 사안을 보며 타인을 비판할 수 있을까? 과거와 다른 가치관이 내게 새로 자리 잡혔기 때문에 그랬다고 할지 언정 내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들만 골라 정의를 선택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정의의 기준에 따라 무엇은 차별이고 무엇은 차별이 아니고를 기준 지을 수 있을까.


인턴을 하며 잠시 거울을 보는데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축구. 축구에서도 낮잡아 부르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가. 나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해온 포항 스틸러스는 타 K리그 팀 팬들에게 <고철>이라는 별명으로 낮잡아지고 전북은 과거 매수한 전력으로 인해 <매북>, 수원 삼성은 <개랑>, FC 서울은 <북패> 등으로 불린다. 공식 중계에서는 절대 등장하지 않지만 인터넷 광장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용어들.

생각에 조금 깊이 빠진 탓인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지끈 아팠다.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공간에 나도 모른 채 웃고 장난치며 차별적인 언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지 몰랐다.

분명 차별적인 용어는 현실에 존재하고 누군가를 낮잡고 힐난하는 용어들은 우리 곁에 있는데 그러한 사실들을 모두 규제하며 잡아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무시한 채 그러려니 하고 살기에도 어렵다.    


그러다가 어느 한 생각에 멈췄는데 바로 지난여름에 많이 봤던 '포괄적 차별금지법'이었다. 사실 헤드라인 정도만 읽고 제대로 기사 내용은 읽지 않았는데 다시 찾아보니 23개의 차별 항목들을 이유로 4가지 영역에서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었다. 천천히 읽어보니 또 법안의 상정 배경들을 읽어보니 우리 사회가 변함에 따라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내용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럼에도 이런 법안을 반대하는 집단은 존재했다. 좋게 생각하자면 각자의 생각과 신념을 가지고 논쟁을 펼치는 것이니 민주주의의 순기능(?)이라고 봐야 할 테다.

그러다 한편으론 내가 이 법안에 대해 크게 관심 없었던 이유가 떠올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내가 저 23개의 차별 항목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크게 차별을 당해보지 않았기에 혹은 그 차별 속에서도 개인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이유로 견뎌낼 수 있었기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다수는 늘 차별에 속하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에.

'차별'이라는 키워드로 지난 한 주간 여러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아직까진 내가 '차별'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기엔 많은 것을 알지도 또 직접적인 차별의 한가운데에 떨어져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감정에만 호소하는 생각을 나열하고 싶지도 않다. 차분히 바라보며 생각을 다듬고 좀 더 객관적이고 포용적인 지향점을 갖고 싶다.(물론 이와 중에도 차별을 받는 누군가들은 싸우고 있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은 제각기 다른 관점과 모습과 시선을 지닌다. 또 우리 개개인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따라서도 우리는 어떨 땐 왼편에 어떨 땐 오른편에 선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아직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전히 당신이 나를 모르는 것처럼. 그렇기에 사람들은 각자의 정의의 기준을 만들고 인생의 경험에 따른 선(善)을 만들어낸다. 개인은 다르기에 싸우지만 또 다르기에 이해하고 배려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어떤 게 맞는 선택이고 어떤 게 더 좋은 정의인지 가끔은 누군가의 명쾌한 해답을 통해 듣고 싶은 세상이지만 그렇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앞으로의 세상은 어쩌면 끊임없이 개인들의 정의와 선을 토론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에서 종종 쓰이는 말이지만 '피해자 없는 가해자'라는 단어가 있다. 앞으로도 보고 싶지 않은 화가 치미는 말이다. 마치 전에 인국공 사건과 관련해 글을 쓸 때 느꼈던 '알바나 구해보자'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종종 혐오표현과 포괄적인 차별에서 특정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았기에 가해자도 없다는 식의 저런 말이 오가는데 이는 너무나 위험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드러내 놓고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을 뿐 그러한 말속에서 우리는 여실히 피해를 입고 있다. 그러한 것들이 없다면 왜 우리는 역사적 사건에 같이 공감하며 분노하고 내가 피해를 입지 않은 사건에, 나와 관련 없는 사안에 같이 애도하고 슬퍼할까. 공감이 있고 슬픔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희열이 있는 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의 다양한 아픔에 함께 공유하고 치유할 줄 알아야 한다.

러시안룰렛에 들어간 총알이 나를 빗겨 나갔을 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그 총알에 맞을 수 있다. 과학적인 증거를 내놓아야만 피해가 발생하는 게 아니고 특정인을 지칭해야만 피해가 발생하는 게 아니다. 나의 가족, 내 친구, 친구의 가족,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할 수 있는 것들에 우리는 더 조심하고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피해자 없는 가해자'보다 무서운 '가해자 없는 피해자'를 줄여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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