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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숲 Sep 25. 2020

오늘도 출근합니다.

쓴맛을 모르는 자! 단맛도 모릅니다.

9월의 산문 #1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은 매일같이 거기서 거기다. 

대충 8시 30분, 나는 비슷한 색감의 하늘을 맞이하며 어제와 또 비슷한 하루를 맞이한다.

어제 봤던 사람들이 오늘도 같은 정류장에서 서로를 마주한다. 

분명 각자의 머릿속에 '그 사람이네?'라는 생각을 스치듯 하지만 누구도 말을 걸거나 쉽게 웃음을 짓진 않는다.  보이는 건 조금 달라진 옷차림과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 지쳐있는 표정 정도가 전부다.


출근 버스는 나름대로 지옥이다. 대전이 이 정도면 서울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아마 서울의 출근은 내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지치고 답답하고 막혀있겠지.

출근길에 기분 좋은 순간은 몇 안 된다. 

그날따라 귀를 타고 들어오는 음악이 유난히 날씨와 잘 맞는다거나 

그렇게 많이 열리지 않은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미치도록 기분을 좋게 한다거나 하는 경우들이다. 

아직 출근해서 사무실에 앉진 않았지만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의 신호를 대기하는 순간부터 

내 마음은 퇴근 후의 일들을 상상한다. 


사실 내가 뭐 정규직도 그렇다고 계약직도 아니다. 고작 인턴이다.

방송국에서 인턴을 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계획이었고 해보고 싶은 커리어였다.

물론 많은 사람들도 알고 있고 나도 알다시피 인턴은 그리 크게 중요한 업무를 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기업의 입장에서는 값싼 노동력을, 구직자 혹은 대학생의 입장에선 이력서나 

경력을 증명할 커리어를 얻을 수 있기에 서로가 윈윈 하는 전략인 듯하다.

하지만 실상이 그렇다고 해도 대학생의 입장은 약간 다르다. 

인턴이 되기 위해서도, 자소서와 경력, 자격증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 이거 할 줄 알아요!"라고 어필해야만 한다. 

설렁설렁하는 사람에겐 그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시대가 좋은지 안 좋은 건지 요즘은 분간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다. 

회사는 인턴이든, 뭐든 신입을 뽑을 때면 그 사람의 '무언가'를 보고 뽑을게 분명한데 

그렇게 나름의 역량을 갈고닦은 인턴이나 신입은 '무언가'를 뽐낼 수 없다.

방송국은 나한테도 그랬지만 미디어 업종을 꿈꾸는 많은 친구들에게 동경의 대상이다.

방송을 만들고 생각한 것들을 현실로, 존재하는 무언가로 만들기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방송은 가장 트렌드를 쫓으면서도 가장 보수적이다. 

멍청해지기 십상이다. 노트북의 선을 하나 건드리는 일도, 장비를 아주 잠깐 다루는 일도

그 어떤 것도 뭔가 건드리면 안 될 것만 같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간의 묘한 신경전은 판을 친다.

고용의 형태 역시 알 길이 없는 깜깜이가 많고 학력과 성별에 관한 차별도 여전히 만연하다.

물론 내가 본 사례들과 내가 그 사례들을 통해 가지게 된 생각들이 온전히 맞다고 볼 순 없겠지만 언론학을 

공부하면서 배우고 생각했던 것들이 마치 유토피아처럼 형성된 곳은 결코 아니다.(어디든 그렇겠지만)

 

사실 '인턴'이라는 타이틀 덕에 요즘은 바쁜 와중에 생각을 많이 가진다. 

나는 여전히 인턴이기에 팀이나 회사보다는 나의 개인적인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한다. 

앞으로 어떤 진로를 설정해야 하는지, 내가 이 분야에서 하고 싶은 건 뭔지, 넓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쩌면 인턴 생활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50%의 만족도에도 못 미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아마 인턴생활이 끝나면 학교와 대전시가 연계한 프로그램을 통해 꽤나 짭짤한 양의 돈을 손에 쥘 것이고 6개월이라는 경력도 얻게 되겠지만 내가 이전에 쉽게 세워놨던 일종의 커리어에 대해서는 더 큰 고민거리를 얻게 되지 않을까. PD를 꿈꾼다고 하지만 방송국의 프로세스 안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지 않는 내가 보일 때마다 영상을 다루는 어떤 직업이 내게 어울리는지 고민하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에 나조차도 속을 때가 많다. 

당연히 친구들의 격려와 칭찬들은 내가 나름대로 어깨에 힘을 주며 일을 하고 생각을 개진할 추진력을 준다.

하지만 진짜 고민하고 진짜 더 많이 경험하며 계획을 세울 것들은 화려함이라는 거품을 걷어내고 바라볼 때 알 수 있다. 매일 같이 출근을 하지만 그 안에 답이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과 업무를 하지만 그 일상 안에 나의 방향이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무얼 하고 싶은 걸까? 또 나는 어떻게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 걸까? 

상상했던 모습과 현실의 나를 매일같이 조율하며 또 타협하며 출근하는 중이다.

언젠가 조금 더 지혜가 쌓이고 용기가 쌓이고 확신이 생긴다면 이런 생각을 덜 할 수 있을까?

한편으론 20대에 하는 이 치열한 고민들이 30대가 돼서 40대가 돼서 

한 여름의 꿈처럼 사라지지 말았으면 한다. 삶에 대해, 꿈에 대해 살아가며 늘 고민하고 싶기도 하다.


집 앞 이마트 24 편의점에서 민생 쓴-커피를 하나 샀다. 

어깨가 쳐진 직장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쓴맛을 모르는 자! 단맛도 모릅니다."

오늘도 출근을 하는 모든 이들이 단맛을 느끼길 바라며 그만 글을 줄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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