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얼숲 Feb 04. 2021

오픽점수가 망했다

IH 못 받으면 쪽팔릴 텐데

그래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난 영어를 잘하지 않았다. 아니 못한다. 가끔 영상을 만들다 보면 한글을 쓰는 것보다 영어를 쓰는 게 더 나아 보일 때가 있어, 그럴 때마다 영어를 써넣긴 하지만 그것도 찰나의 허세나 멋일 뿐 영어로 궁시렁대는 외국 유튜버들의 말은 자막이나 그림이 없다면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남들 다 하는 영어공부는 뒤로 미뤄둔 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영상을 만들고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시간이 지나고 이 시대의 많은 대학생들이 그러하듯 나에게도 '졸업요건'이라는 꼬리표가 달라붙었다. 사실 토익시험을 본 적이 있었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고 또 누구나 이 점수로 졸업요건을 패스하고 이력서에 써넣기에 나도 한 번 도전해봤다. 코로나 19 때문에 지지부진하던 시험일정이 확정돼 드디어 친 첫 시험의 발표 날. 난 시험성적이 뜬 노트북 화면에 대고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685. 부정하고 싶었지만 별 수 없는 그게 내 성적이었다. 그렇게 영어를 외면하고 회피하던 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현준이로부터 '오픽'이라는 제법 재밌는 시험을 알게 됐다.


오픽은 꽤 좋아 보였다. 말 그대로 좋아 보였다. 토익스피킹처럼 딱딱하지도 않았고 암기를 하는 형식도 아니었다. 물론 토익처럼 머리가 지끈거리지도 않았다. 자연스러운 영어였고 내 생각을 기반으로 하는, 그나마 내가 가장 선호하는 영어 교육의 방식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현준이가 알려준 대로 유튜브 <오픽노잼>을 열심히 보며 모의고사를 몇 회 풀었다. 솔직히 <오픽노잼>을 보며 'IH는 금방 나오겠는데?'라는 오만방자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자신감을 심어주고 영어를 재밌게 알려주는 게 워낙에 내 스타일과 맞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근자감'이라고 했던가. 어느샌가부터 노력과 연습보다는 '나는 될 거다'라는 의미 없는 주문만을 외고 있었다. 결과는 또다시 처참했다. IM2. 최소한 IM3는 맞았어야 했는데 또다시 영어에 내 피 같은 돈을 버리고 만 것이다.


어제와 오늘은 조금 우울한 감정도 있었다. 시험 성적이 안 나와서라는 이유가 표면적이지만 사실 나를 자책한 게 컸다. '왜 더 열심히 공부를 안 했지?' '난 영어를 왜 이렇게 못 하지?' '난 그냥 영어를 평생 못 할 운명인가?' 또 내가 못해 놓고는 영어교육을 탓하기도 했다. '아니 애초에 영어를 한글 가르치듯 가르쳐야지 왜 학교부터 학원까지 <This is Grammar> 따위의 책을 들고 다니는 거야?' '단어는 왜 또 빽빽이로 적어서 손만 아프게 만들고 기억은 안 나게 만드는 거지?'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글로벌한 교육을 하겠다며 데리고 온 학교와 학원의 외국인 선생님들이 <어벤저스>를 틀어주고 <행맨>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던 웃픈 경험도 떠올랐다. 


그런데 솔직히, 진짜 솔직히, 아니 갓. 직. 히 내가 무능력하진 않았다. 특히 언어에 관해 무능력하진 않았다. 소위 말하는 재능은 어느 정도 있었고 어릴 때 공부에 대한 노력은 꽤나 공들였기도 했다. 그저 토익이고 오픽이고 나는 내가 쏟아부을 수 있는 노력의 많은 부분을 쏟지 않았을 뿐이다. 공부방법이며 공부의 시간, 양 모두 할 수 있는 차선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 증거로 초등학교 때 한자급수를 3급을 딴 채 2급까지 공부했고 고등학교 때 국어 모의고사는 쳤다 하면 1등급이었다.(수능은 왜...) 언어적 능력에 비해 그냥 관심이 덜 하다는 이유로, 생각보다 어렵다는 이유로 외면을 한 것뿐이었다. 


오픽 시험 점수가 IM2가 나오고 나서 다시 해서 IH 이상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누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78,000원이라는 살인적인 응시료에 애당초 말하기 시험이라는 부담스러운 점, 그리고 졸업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중압감까지. 하지만 다시 도전해보려고 한다. 꾸준히 하루에 한 발자국씩 더 나아가고 점점 더 시간을 늘리고 더 외우고 더 입에 익히고. 불현듯 한 기억이 스친다. 아주 어릴 때 승부욕에 휩싸인 초등학생 시절의 내가 한자 3급 시험에 2번 떨어지고 울면서 아빠한테 매달린 적이 있었다. 짜증이 밀려왔고 왜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가 하는 좌절감을 맛봤다. 그때 아빠가 포항 바닷가로 나를 데리고 갔다. 조금 오글거리지만 아빠가 당시 나에게 바다를 보여주며 넓은 바다를 보다 보면 나의 시험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말했다. 울 일도, 슬퍼할 일도, 괜히 큰 걱정을 할 일도 아니라고 했다. 그때 뭔가 어린 나이임에도 아빠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진짜 바다를 보다 보니 세상만사 다 그렇게 죽자고 덤벼들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3개월 뒤 정확히 같은 시험장에서 나는 너무나 여유롭게 당당히 합격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자만심에 빠져 공부를 멀리했고 내가 노력하지 않은 채 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걸 애꿎은 '무언가 탓'을 했다. 장점이 하나 있다면 그 때문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원래 마음이 가벼워지고 멘탈이 빨리 회복되려면 소위 말하는 빡치는 감정을 흠뻑 느껴야 한다고 했던가. 이제 좀 더 마음은 가벼워지고 공부의 의지가 올라온다. 부디 다음 시험에선 원하는 성적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또 공부를 해야겠다.



사실 이 글도 오픽 공부하다가 산소가 부족해서 쓰러 왔다.





작가의 이전글 차별이란 게 생각보다  애매하더군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