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찬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2

-노래를 잊은 사람들~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by 조현수

정재찬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

(노래를 잊은 사람들~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


정재찬 교수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시를 잃고, 정의를 잃고, 낭만을 잃고......

소중한 많은 것을 잃어버린 채,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삶을 돌아보게 한다.


「노래를 잊은 사람들」에서, "젊은 시절의 꿈들은 잊힌 채, 그리하여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오랜만에 김광규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저자는 "이 시가 수필을 쓰듯 그저 일상어에 가까운 시어로 이루어진 시, 하지만 이 평이한 시가 주는 감동은 경이적이다. "

그리고 이 시에는 친숙함 속에 낯설게 하기의 장치가 있다고 말하면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시 제목과 관련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많은 이야기를 박식함으로 잘 이끌어 가고 있다.

4·19가 나던 해 세밑 /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 하얀 입김 뿜으며 / 열띤 토론을 벌였다 /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 별똥별이 되어 버렸다 /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 회비를 만 원씩 걷고 /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 부끄럽지 않은가 / 부끄럽지 않은가 /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출처 :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 같기도 한 이 시를 읽고 사람들은 많은 생각에 잠길 것 같다.

"이 시는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보다 현실에 대한 부끄러움,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그 삶의 진실을 주제로 삼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부끄럽지 않은가 / 부끄럽지 않은가 /

이 구절이 온종일 나의 머리에 남아 맴돈다.


'누나야 너 살아 있었구나'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실향민의 애환을 그린 이호철의 소설 <탈향>을 소개한다.

"한국전쟁을 다룬 소설은 제법 알고 있지만 월남민의 문제에 주목한 이는 거의 없는데, 월남민 출신인 이호철이당대 문단이 지나쳐 버리고 말았던 이 소재를 단단히 붙잡았다"라고 했다.

1983년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이야기도 다루는데, 대학 초년생이던 나도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많이 울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황지우 시인의 <마침내, 그 40대 남자도>, 김종삼의 <민간인>, 송수권의 <면민회의 날>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말한다.

"4.19 대신에 6.25를 대입하여 김광규가 <희미한 예사랑의 그림자> 를 썼다면, 아니 이호철이 <탈향>의 속편을 시로 섰다면, 송수권의 <면민회의 날> 같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내 안에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에서 벗어나려 한 것도, 끝내 아버지를 닮고 마는 것도

다 아버지의 그늘 탓이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 겨울의 기나긴 밤, /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 이 이야기 듣는가? /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출처 : 김소월의 <부모>

시인 김소월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모르는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다.

소월 김정식의 아버지는 소월이 두 살 때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몰매를 맞았고, 이로 인해 정신 이상을 일으켜 평생을 실성한 사람으로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소월은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그는 짧은 생애에 당대 그 어느 시인보다 다작을 하면서도 손에서 생업을 놓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시에는 사랑과 이별의 정한으로 가득 찬 수많은 '임'이 등장하지만 그는 본처만 아내로 삼고 충직하게 정상적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부의 일을 도우던 광산업이 실패하고 동아일보 지국 개설도 실패하고... 아편을 가득 머금고 서른셋의 나이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의 죽음!

그의 삶이 얼마나 정상이 아니었음을 잘 말해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죽하면 여섯이나 되는 그 새파란 자식들을 놔두고 스스로 생을 접었겠는가. 이것은 슬픈 아이러니다"


소월의 한을 집단적 전통이나 식민지 민중의 심정과 기계적으로 결부 짓곤 하는 상투적인 해석과 이젠 결별하자. 그의 한은 사무치게 개인적이다...... 부모가 될 수 없었던 이를 아버지로 두었던 소월의 상처를 아프게 바라봐 주고, 시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신음을 공감하며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가 시인에게 먼저 베풀어야 할 도리가 아닐까? 그런 연후에 그에게 '민족 시인'이라는 월계관을 씌워 드리자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엾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 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출처 : 신경림의 시 <아버지의 그늘> 일부분


이 책을 읽으며, 소월의 시와 신경림의 시를 천천히 읽으며 아버지의 이름을 음미해 보고 싶다.

저자의 말처럼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내 안에 아버지가 있는 것일까?


「어쩌란 말이냐, 흩어진 이 마음을」에서는 <가슴앓이>를 다루고 있다.

시적 표현이 뛰어난 이 노래를 한 편의 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한다.

"동그랗게 내버려진 나의 사랑이여" "어쩌란 말이냐, 흩어진 이 마음을..."

저자는 지영선이 부른 리듬 앤 블루스 풍 편곡보다, 순수하고 맑게 들리는 포크송 같은 원곡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혼성듀엣 '한마음'이 부른 <가슴앓이>를 많이 불렀었다.


생명파 시인으로 알려진 청마 유치환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의 시 <바위>와 <그리움>을 인용했다.

청마와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와의 안타깝고 애달픈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세상을 뜰 때까지 청마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 동안 정운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편지를 쓴 사람도 놀랍지만 그 많은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둔 정운의 정성도 너무나 놀랍다.

"청마와 정운의 사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사랑 시편 <행복>을 남기게 되었다."

「겨울, 나그네를 만나다」에서 저자는 말한다.

"인생이란 이토록 허무한 것인가? 사랑은, 열정은, 낭만은, 행복은 그저,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그런 것일까?"

뮐러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겨울 나그네>는 언제 들어도 좋다.

황량하고 쓸쓸한 겨울 풍경 속으로 마음을 던져 놓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면 겨울은 아름답다.

서른셋의 나이로 뮐러가 세상을 떠나고 바로 이듬해 슈베르트도 서른한 살로 세상을 떠난다.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그의 손을 거치면 시는 노래가 되고 음악은 말을 했다."


저자는 강석우와 이미숙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 <겨울 나그네>를 소개하면서, 시나라오의 원작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최인호의 동명 소설이었다고 설명한다.

너무 오래전에 봤던 영화라 두 주인공의 풋풋하고 젊은 시절 모습, 영화 속으로 흐르던 클래식 선율, 쓸쓸하게 울리던 성악곡 <보리수>만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찾아보는 것 역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덜컥 숨이 멎었다."

또한 저자는 소설가 최인호의 작품 세계와,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 나오는 소풍을 설명하면서, 나그네의 방랑과 소풍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둘 다 집을 떠나는 것은 같다. 하지만 전자는 오고 감에 정처가 없고, 후자는 분명하다. 그래서 전자는 새로움에 대한 도전의 매력이 있는 반면, 먹을거리 조차 스스로 구해야 하는 고달픔이 있고, 후자는 김밥 도시락까지 싸 가는 즐거움이 있는 반면,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는 아쉬움이 있다. 나그네에게 소풍은 없다. "

출처 : 정재찬 교수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 p.257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에서는'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 식민지 경성의 눈 내리는 밤'을 다루고 있다.

"함박눈이 펄펄 날리었다. 어디고 눈을 맞으며 끝없이 걷고 싶어 진다."라고 말하면서, 김광균 시인의 <설야>와 <30년대의 화가와 시인들>, <눈 오는 밤의 시>, <장곡천정에 오는 눈>을 소개한다.


「깨끗한 기침, 순수한 가래」에서 저자는 뻔한 시에 시비 걸기와, 기침과 가래의 정체에 대해서 소견을 밝히고 있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출처 : 김수영의 <눈>


김수영 시인의 시 <풀>과 <눈>은 문학 교과서에 실려 있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다.

저자는 김수영의 시 <폭포>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발씻개로 하자>를 특유의 화법으로 잘 설명해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기침과 가래인가?"라고 하면서 "무엇보다 기침과 가래는 머뭇거림이나 거침이 없다. 그것은 타협하지 않은 양심이며, 내부 깊숙이 고인 시적 욕망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토해 내는, 아니 저절로 터져 나오는 시인의 살아 있는 목소리다. 생리적인 고로 그것은 더욱 생명력에 가깝다"라고 말한다.


한 권의 책에서 이렇게 많은 시를 소개받고, 저자의 생동감 넘치는 설명까지 들으니 행복해진다.

시를 잊은 그대들이 많이 돌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다시 한번 시를 만나고, 사랑하고, 꿈꾸고,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