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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딩 피플 Oct 31. 2018

사춘기를 끝내지 못한 감상주의자의 조잡한 일기

트레인스포팅 - 어빈 웰시



<트레인스포팅>은 마약, 폭행, 방종에 찌들어 있다. 소설 속 일상이 된 일탈은 어딘가 유혹적이다. 밑바닥 인생이 인생역전을 노린다는 단순한 줄거리만큼이나 단번에 경계심을 허무는 접근은 입고 있던 두터운 옷의 단추를 풀게 한다. 허례허식의 때를 벗겨내고 속살을 노출하게 한다. 웰시의 수법은 자연스러워 의식할 수 없다. 그것은 훈련으로는 방어할 수 없는 선천적인 아우라다. 독자가 자발적으로 바보가 되고 굴복하게 만드는 마성이다.


이 작품은 비주류계의 주류란 표현으로 정의할 수 있다. 흔히들 기대하는 궤도에서 벗어난 작가의 삶만큼이나 작품 또한 신산하다. 부평초 같은 불안정함, 모아지지 않는 열정, 선을 넘은 행동들은 개인의 추락과 무너져 내리는 주변 세계를 강렬하게 현시한다. 컬트적으로 강조되는 붕괴 감각은 상관관계를 전혀 발견할 수 없음에도 중요한 무언가를 완성하는데 실패한 시대상과 반복되는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체계, 체제의 무덤 위에 침을 뱉는 듯한 소설 속 인물들의 언사에는 논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당당함을 넘어선 뻔뻔한 태도가 오히려 논리의 부재에서 의미를 기어이 발견하게 한다. 여타 문학에서 보아왔던 문학성이라 지칭할만한 교양의 흔적이 전혀 없기에 역으로 해석은 자유로워진다. 평소에 소설을 많이 읽지 않은 사람일수록 양식이란 허구에 맞춰 쌓아올려진 문학보다 <트레인스포팅>의 반사회적인 불량함이 더 사실적으로 느껴질지 모르겠다.


이 소설이 발표되고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대중문화는 이전보다 더 자극적이고 세속적으로 변해왔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 2010>의 악마조차 영화적 표현이라 용인된 지 10년이 지났다. 충격요법으로 여러 차례 예방접종을 한 대중은 <트레인스포팅>이 보여주는 똥통에도 놀라지 않는다. 영화가 아무리 잔인해도 화면이란 벽으로 나와 분리되어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과 같다. 벽 너머가 추악할수록 되레 안도감마저 느껴진다.


즉, <트레인스포팅>의 공부가 필요 없는 손쉬운 서술, 편안하고 안전한 자극은 놀이공원이 제공하는 흥분과 닮아있다. 하루 동안 최대한 즐거움을 누리고 떠날 채비를 도착하기 전부터 하는 밝은 유원지 감각과 이 소설 속 추악하고 어두운 소재들은 정반대의 극단에서 맞닿아 있다.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놀이공원의 행복과 같이 이것 또한 소중한 삶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착각하게 한다.


이러한 착각은 문학은 배설에 불과하다는 허무주의 혹은 대단한 교훈을 품고 있을 거라는 교조주의와 맞물려 독자들을 바보로 만든다. 이 소설이 그려내는 현대적인 병리들이 이중적인 의미의 간극 사이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늙은이는 배재된 또래들만의 세계, 맹종에 가까운 팬덤의 추구, 기회주의로 점철된 일확천금의 꿈같은 기호들의 나열이 사회 현상을 관통하고 있지 않나하는 마음이다.


마음에 돋아난 싹은 웰시의 진의와는 무관하게 혼자 힘으로 자라난다. 그것은 어라? 아차! 싶은 탄식을 부르는 발작적인 공감에 가깝다. 속물근성도 철저하게 추구하면 벽을 허물 수 있다며 뽐내는 듯한 변죽을 따라 감정은 고조된다. 이미 바보가 된 독자는 거기에 맞춰 어느새 개인사를 떠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한다. 그렇지만 한번 터져 나온 방언은 멈출 수 없다. 그것이 이 책의 인기요인이다.


분명 긴장을 풀고 바보가 되는 일은 유쾌한 경험이다. 사무실의 파티션에 가로막혀 좁아진 시야를 탁 트인 광장에서 보는 풍경으로 바꿔준다. 하지만 기껏 상식의 구속복을 벗어던진 후 다시 허영으로 짜인 옷을 주워입는 바보짓은 어떻게 보아야할까. 사실 웰시의 말들은 아무것도 암시하고 있지 않다. 병적인 집착, 중독, 타락은 그것을 시대가 요구했다 변명해도 그저 악일뿐이다. 반대로 정상적인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다고 합리화해도 변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좋게 보면 언더그라운드 아마추어리즘의 신화 찰스 부코스키의 부사 없는 고백이고, 그대로 보면 사춘기를 끝내지 못한 감상주의자의 조잡한 일기다. 모든 의미를 해체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현대문학의 임무를 거절한 동물적 리얼리즘이 본질이다. 웰시는 겉보기와 달리 진보적이거나 급진적이지 않다. 이전 시대를 뛰어넘으려는 지금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다는 것은 결국 제자리걸음이다. 화려한 회전목마라 할 수 있다.


웰시는 자기가 태어난 알의 껍질을 깨지 않고 남아있기를 택함으로서 연한 속살을 유지한 폐란이다. 그가 지닌 마성은 더러운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건드려보게 되는 식의 배덕감에서 오는 호기심과 흡사하다. 다양성 담보 측면에서 이런 사람도 필요하겠지만, 두 번은 읽을 수 없게 하는 설득력 부족과 균열이 가득한 허술함을 새 출발로 포장하는 사람을 허풍쟁이 이외의 무엇이라 불러야할지 나는 모르겠다. 놀이공원은 언젠가 폐장하기 마련이다.



서평 <이상민/리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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