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남겨진 나의 시절에게
지나간 시절 중에 언제가 제일 재미있었을까 하고 떠올려 보면,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거 같다. 시험을 칠 때마다 우열반을 나누고 모의고사를 칠 때마다 1등부터 100등까지 벽보를 붙였고 야간 자율학습을 10시까지 하면서 미친개 학생 주임 선생님이 머리 길이부터 교복 색깔까지 트집을 잡던 시절이었건만, 그래도 친구들과 야자를 째고 공개 방송을 보러 가고 불 꺼진 운동장에서 초코파이에 초를 꼽고 생파를 했던 그때가 제일 좋았다.
우리 학교는 100년이 넘은 학교라서 교문을 들어서면 몇 백 년 된 커다란 은행나무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냥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니 마니 말이 나올 만큼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것만 알뿐 사실 우린 그 나무 아래서 놀기 바빴다. 가을이 되면 엄청난 양의 은행잎을 떨구었는데, 외국 영화의 어느 숲속 처럼 쌓인 은행잎에 누우면 푹신할 정도였고, 리어카에 담으면 수북이 쌓일 정도였다. 청소 당번이 된 날이면 친구들과 은행잎을 뭉쳐서 눈싸움 비슷한 놀이를 했다. 은행잎을 쓸기 전에 치러야 하는 의식처럼, 친구들이랑 실컷 던지고 구르고 깔깔거리며 놀고 나서 순식간에 커다란 쓰레기통에 다시 쓸어 담아 소각장에 버리고 다시 야자를 하러 들어가야 했다. 30분 남짓한 그 짧은 청소 시간이 입시라는 무거운 분위기를 걷어줄 숨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래된 건물답게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교실 건물과 참 잘 어울렸던거 같다. 그 때부터였을까. 내가 좋아하는 풍경들에는 항상 크고 오래된 아름드리 나무가 있었다.
학교 건물은 본관과 별관 2개였는데, 건물 사이에 작은 연못이 있는 정원이 있었다. 연못 위 작은 구름다리를 건너 계단을 올라가면 별관이 나왔다. 작은 연못 주위로 커다란 바위들과 나무들이 있는 일본식 정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도시락은 2교시나 3교시 끝나면 벌써 먹어치우고 점심 시간에는 학교 매점으로 달려가 달달한 간식을 사들고 그 연못에 살고 있는 거북이나 잉어랑 나눠 먹으면서 삼삼오오 모여 수다 삼매경에 빠지곤 했다. 학교 곳곳에 오래된 나무들들 많았었는데 쨍한 여름에도 어디든 그늘을 찾기 쉬웠고, 교실이 답답했는지 모두들 뛰쳐나와 어딘가 구석구석에 무리를 지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연못에서 50년쯤 살았다는 거북이는 수많은 아이들의 고민과 비밀들을 다 알고 있겠지.
별관 건물의 제일 위층은 다락처럼 되어있는데 항상 문이 잠겨 있어서 아무도 들어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여느 학교처럼 괴담의 주인공이 되었다. 우리 학교 근처에 큰 공원이 있어서 비둘기가 많이 날아다녔는데, 다락을 청소하고 난 수위 아저씨의 리어카에는 비둘기 시체가 가득한 걸 봤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100년 전 학교에서 자살한 아이의 귀신이 그곳에 살면서 외로워서 비둘기들을 불러 모은 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어둠이 짙어지는 겨울밤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별관 옥상에서 무슨 소리라도 나면 웅성웅성 난리가 났다. 물론 괴담일 뿐 당연히 진실 같은 건 밝혀질 리가 없었지만, 야간 자율 학습의 정적을 깨는 공식적인 신호탄 같은 거라 사실 무조건 신나있었다.
우리 학교 운동장 끝은 철길과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날에 창밖을 보면 메트로놈처럼 주기적으로 전철이 지나갔다. 밤이 되고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 중 창가에 자리 잡은 이들에겐 꽤나 운치와 낭만을 주었다. 창밖을 보며 이어폰을 꽂고 멍 때리는 아이가 한 둘이 아니었으니, 아마 그러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철길과 맞닿은 으슥한 운동장 귀퉁이는 나와 친구들에게는 추억의 장소다. 야간 자율학습이 의무인 우리들에게 생파는 점심시간에 매점으로 달려가 공수해 온 초코파이 한 상자와 과자 몇 봉지, 딸기 우유가 다였지만, 선생님 몰래 야자를 빠져나와 어둠속에 생파를 하는 저녁의 스릴을 대비하여 생일의 주인공과 상관없이 준비하는 아이들이 더 들떠있었다. 10시 야자 종료 전 선생님들의 감독이 느슨해지는 9시쯤 탈출에 성공하면, 시끄러운 전철 소리에 우리의 목소리를 묻혀서 떠들 수 있는 운동장의 철길 앞이 가로등이 닿지 않는 그곳이 제격이었다. 전철 불빛이 다였지만 몇 분 간격으로 지나가서 몸을 숨길 만큼 적당했다. 적당한 어둠과 적당한 소음에 숨어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깔깔대는 스릴이야 말로 그 시절 최고의 시간이었지 싶다.
겨울에는 장작으로 불을 피우는 옛날식 난로라서 아침에 처음 장작을 넣고 1교시가 끝날 때까지는 매콤한 연기가 교실 안을 가득 채웠지만 장난기 가득한 아이들에게는 그마저도 놀이에 가까워서 고구마를 가져오는 친구부터 쥐포를 구워 먹는 친구까지 쉬는 시간은 난로 앞에서 떠들썩했다. 에어컨도 제대로 된 난방기도 없이, 한 여름에는 천정 선풍기 몇 대와 창문을 열어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겨울에도 난로에 멀리 떨어져 않은 아이들은 코트를 벗을 수 없는 교실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예쁜 학교였다. 우리 학교가 우리 지역에서 제일 오래된 학교였어서, 내가 고3 때 최신식 건물을 새로 지어 학교가 이사를 갔다. 교실도 커졌고 깨끗했고 온풍기와 에어컨으로 냉난방이 확실하게 되었고, 뜨끈한 온돌이 있는 예절실, 실험 도구가 꽉 찬 과학실, 최신식 컴퓨터실까지 모두가 깨끗하고 화려하게 구비되었다. 삐걱대는 나무 바닥에 왁스칠을 하는 수고도 없어졌지만, 오래된 나무들과 정원도 없고 우리 이야기를 들어줬던 50살 넘은 거북이도 없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전철도 없어진 학교는 낯설었다. 6개월 남짓 다닌 새 건물이라 정이 안 들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사실 100년 넘은 옛날 학교가 더 좋았던 거 같다. 졸업 앨범에도 최신식 건물과 새로 구비된 시설들의 사진들만 가득해서 그 시절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때는 교정이 그렇게 예쁜 줄 모르고 낡고 청소하기 힘들다고 툴툴대며 다녔는데, 지나고 보니 다 추억이 될 줄 알았다면 교정 사진을 많이 찍어 둘 걸 그랬다.
성적에 일희일비했을 법도 하였으나, 그 기억보다는 아름다운 교정과 틈틈이 친구들 놀았던 추억이 더 많은 거 같다. 뭐든지 재미있었고 다 별거 아니었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던 시절이 생각나는 노래다.
https://youtu.be/vx-uOne_5R0?si=0OIamagRMwz5bmX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