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이란 번역되지 못한 마음
규칙과 체계로서의 언어인 랑그, 그리고 그 언어로 실제로 건네진 말의 의미인 파롤.
구조주의 언어학자의 시초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처음으로 언어를 랑그와 파롤로 나누었다. 사람들이 공통적인 '살다'라는 낱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랑그 때문이고, 실제 대화할 때 상황에 따라 '살다'라는 의미를 조금씩 다른 느낌(뉘앙스)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파롤 때문이다. ‘랑그’와 ‘파롤’은 언어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규칙과 관점을 습득해야 제대로 소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도 항상 랑그와 파롤, 그 사이를 헤매고 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자세히 설명하지 못했거나 잘못된 설명을 했을 때도 어떤 말인지 알아들어주는 사람이 있다. 나조차도 무슨 감정인지 모를 때, 내가 하는 말이 무슨 의도를 전달하고자 하는지도 몰라서 아무 말이나 쏟아져 버릴 때가 있다. 그러나 상대는 나의 이야기를 나와의 경험을 통해 재해석해서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니 개떡 같은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는 건 너와 나의 역사가, 아니, 너에게 쓰인 나의 역사가 제법 괜찮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가끔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내뱉곤 한다.
“괜찮아”, “알겠어”, “사랑해”, “아무 일 없어”.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할 때가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알겠다고 답할 때가 있다. 습관처럼 사랑한다고 하기도 하고 슬픔을 감추려고 아무 일 없다고 할 때도 있지만, 결국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엔 괜찮지 않은 나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정확히 이야기해도 진심이 전달되기 쉽지 않은데, 이렇게 전혀 다른 말로 답해놓고는 마음이 전달되길 바라는 이기적인 순간들. 하지만 말과는 다른 마음들이 정말로 상대에게 도착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과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는 예상이 들어맞을 때, 이런 지점들이 모여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된다. 하지만 알려주지 않은 마음은 알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외로움은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외로움은 사는데 항상 일정 부분 수반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는 외로움이다.
어쩌면 진짜 외롭다고 느껴질 때는 혼자 있을 때가 아니다. 함께 있는 사람에게 제대로 나의 마음이 번역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함께라서 더 외롭다고 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같은 방에 앉아 있고, 같은 침대에 누워 있어도 혼자일 때보다 오히려 더 깊이 외로울 수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보낸 파롤이 상대의 마음에서 전혀 다른 언어로 처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도움을 청했는데 상대는 불평으로 듣고, 나는 다가갔는데 상대는 공격으로 느낀다. 우리는 말을 주고받지만 마음은 계속 서로를 스쳐 빗나가고, 그 스쳐가는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파롤은 단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역사다. 누군가의 “괜찮아”에는 참아온 시간들이 들어 있고, 누군가의 “몰라”에는 포기해 버린 기대가 숨어 있다. 그걸 모르면 우리는 랑그만 듣고 그 사람의 마음을 놓치거나 오해한다. 그래서 함께 대화하고 있으면서도 상대에게 절대로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지쳐버린다. 우리가 파롤을 포기하기 시작하면서 더 외로워지는 이유일 것이다. 내 마음은 분명 말을 했는데, 그 마음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함께 있는데 느껴지는 외로움이란 이해받지 못한 감정이 혼자 남아 있는 상태이기도 해서, 이해받고 싶은 기대와 얽혀버릴수록 더 어려워진다.
서로의 파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
쓸데없는 대화는 무용한 것이 아니다. 농담, 잡담, 의미 없는 수다, 그 모든 것이 상대와의 티기타가가 된다. 가벼운 소통을 주고받으면서 그 사람이 어떤 리듬으로 말하는지, 어디서 멈추는지, 어디서 흔들리는지 알게 된다. 이런 시간이 쌓이면 비로소 우리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 대화를 나눴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서로의 파롤을 이해하는 대화를 얼마나 많이 했냐가 중요하다. 그래야 어느 순간, 문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의도가 들리게 된다.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닿지 않는 마음을 확인하는 대화만큼 서로를 지치게 하는 건 없다. 도저히 너에게 나의 진심을 전달할 자신이 없을 때,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어도 대화하지 않거나 대화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그때는 말을 줄이는 게 아니라, 상대에 대한 나의 빗나간 해석을 줄여야 한다. 다시 처음부터 너와 나의 파롤을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할지라도, 서로의 파롤을 포기하지 않고 번역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이 것은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다. '함께'여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