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색'이었다.
나는 무색, 무취, 무향의 인간이다. 선명하게 좋아하는 것도 뚜렷하게 싫어하는 것도 없다. 어릴 적엔 무언가 하나쯤 나를 드러내는 색을 찾아야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색이 없는 나는, 계속 나의 색을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과 색이 없는 내가 고민이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니, 호기심이 많은 나에겐 어쩌면 제격일지도 모를, 나의 색은 '무색'이었다. 다른 색 옆에서 사라지는 볼품없는 색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색을 품을 수 있는 '무색'이 나의 색이라 좋다. 투명한 나는, 그래서 타인의 세계로 아무 거부감 없이 들어갈 수 있다. 타인의 세계에서 그들이 울고 웃는 사건에 공조하면서 나는 그들의 세계에서 그들의 리듬으로 숨을 쉬고, 잠시 그들을 닮아간다. 나의 선택지에 없던 그들의 선택지들을 함께 즐기고 내 세계에 없던 풍경을 바라본다. 새로운 타인의 세계를 탐험하는 일은 나에겐 일종의 그 사람을 향한 여행 같은 것이라서, 낯선 나라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마주하는 것처럼,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듯이 이것저것 보고 듣고 이야기하는 순간들이 나는 좋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색을 원한다. 선명한 취향과 분명한 주장, 나라는 사람을 한 번에 설명 가능한 정체성을 원한다. 그래서 나의 색은 종종 오해를 산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내가 싫다고 했다. 왜 너는 너의 색도 없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거냐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너의 색을 갖지 못한 건, 너의 생각과 의지가 없는 거라고, 널 생각하면 떠오르는 게 없어서 기억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어떤 결정을 타인에게 미루는 의존형 인간인 거냐며 분노에 가까운 실망을 던지기도 했다.
나는 '무색'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들은 믿지 않았다. '무색'은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나는 분명 '무색'이었고, 나의 색은 채워지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태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배우고 즐기길 좋아한다. 그리고 이런 '무색'인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그런 이들을 만나면 나는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이 좋아하는 차를 같이 마시고 책을 읽고 나누면서 타인의 취향 속에서 타인의 사유와 감성을 잔뜩 묻힌 채 나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렇게 나의 세계로 돌아오면 나는 이전의 나도 아니었고 또 그들의 닮은 꼴도 아니다. 오묘한 빛깔을 가진 또 다른 나만의 독특한 색으로 얼마간의 시간을 살아간다. 잔향이 없어질 무렵까지 시간이 또 얼마간 지나고 나면, 나는 다시 빛도 향도 옅어져 무색으로 돌아와 또 다른 여행을 즐길 준비가 된다.
그렇게 다른 이들의 세계를 들락거리면서, 참 많은 사람들의 바람들과 만났더랬다. 그 많은 꿈들일지 바람일지 혹은 추억일지 모를 이야기에 끼어서 같이 꿈을 꾸는 일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나는 타인의 꿈들을 응원한다. 그들의 꿈을 들여다보는 게 재미있었다. 타인의 세계에서 묻혀온 그들의 꿈들을 같이 향유하면서 나도, 나의 세계도, 겹겹이 나이테 같은 껍질을 쌓아간다. 그렇게 매번 나이테 같은 껍질을 쌓아가다가 어느 날엔가 껍질을 깨고 나올 나는, 수없이 많은 색을 통과해 온 찬란한 빛깔이길, 그런 나를 만나게 되길 바란다. 아직은 수많은 꿈들로 가득한 세상을 좀 더 즐길 예정이다.
'신은 네가 이루지 못할 꿈이라면 애초에 네 가슴에 심지 않았다'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나이를 한참 먹었지만 아직도 뭐가 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러면 또 어떤가. 그냥 지금 재미있는 것들을 이것저것 하다 보면 언젠가는 뭔가가 되어 있겠지. 그 많은 씨앗들이 가슴에 심어졌으니, 뭔가 하나는 잘 자라서 나무가 되어 주겠지. 소년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꿈을 꾸는 자의 가슴은 모두가 다 평등하게 두근거린다. 그러니 끝도 없는 꿈을 매일 꾸면 될 일이다.
신은 네가 이루지 못할 꿈이라면 애초에 네 가슴에 심지 않았어
https://youtu.be/dwh9OdNfdG8?si=Mb9XgNqrsvuz0YK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