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뛰어넘는 시크릿
이전 글에서 우리는
'인간의 고유성'에 대해 같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고유성'의 근원인
‘생각’에 대해
같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핵은
바로 생각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단순히 인공지능이 처리하는
'정보'나 '계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지요.
삶의 고뇌 속에서,
관계의 결 속에서,
그리고 자신과 세계를 향한
사랑과 책임에서 비롯된 것이니까요.
인공지능이 아무리 빠르고,
정밀하게 판단할 수 있다 해도,
삶의 무게를 느끼며,
고뇌하는 존재는 아니지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신비와 위대함을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깊은 '생각'은,
때로는 시대를 앞서가고,
때로는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장에서는 '생각'을 통해
세상을 움직인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능력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이 여정이,
인공지능이 급속도로 발달한 오늘날,
"인공지능과 다른 나는 누구인가?"
고민하는 이들에게
삶의 작은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ㅡ그들의 '생각'이 인류에 남긴 혁신과 울림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요.
바로 남들과 다른,
깊고도 자유로운 '생각'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단지 머릿속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행동이 되었고,
그 행동은 혁신이 되었으며,
결국 인류의 미래를 바꾸는 열쇠가 되었지요.
이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과 실천가들—
한계 상황을 돌파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공지능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인간만의 ‘생각의 힘’을
다시 묻고자 합니다.
그들의 생각과 인사이트는,
난관을 뛰어넘어,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긴
진정한 용기와 더불어,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한줄기 빛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본래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을
극렬히 박해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충실한,
유대교중 바리새파 엘리트로,
유대 종교 체계 안에서 철저한 정통성을 자처하며,
예수를 통해 시작된
새로운 종교를 이단으로 여겼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의하면
그가 다메섹(다마스쿠스)으로 가는 길 위에서
강렬한 빛이 그를 둘러쌌고,
그는 눈이 멀게 됩니다.
그 빛 가운데서 바울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예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는 자신이 절대적이라 믿었던 '신념'이 무너지고,
‘자신이 이단이라 여겼던 진리’와
마주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신을 만난 체험을 넘어서,
신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한
생각의 전환점이 되었는데요.
자신이 붙잡고 있던
모든 지식, 정의, 믿음이 무너지면서
그는 새로운 사고의 틀
—예수룰 통한 구원과 자유—을 직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생각의 전환은
단지 개인의 신념 변화에만 그치지 않고,
인류 종교사에 지대한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의’로 구원에 이른다는 파격적인 생각을 통해,
구원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것임을 선언하면서,
예수의 사상을 체계화시켰습니다.
“헬라인(로마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이 한 구절에 담긴 바울의 생각은,
인종과 계급, 성별을 초월한,
인간 존재의 평등을 천명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사상은,
이후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계몽주의를 거쳐,
인간의 존엄, 보편 권리, 평등사상으로 이어지며,
근대 시민사회의 탄생에 깊은 뿌리를 제공했습니다.
바울은 증명합니다
— 하나의 ‘생각’이 시대를 넘어,
문명을 이끄는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세종은 ‘왜 우리 백성은 글을 읽지 못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궁금증이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요.
당시 수백 년간 한자는 지배계층만 쓰는 언어였고,
백성은 문자로부터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세종은 ‘훈민정음’을 통해
생각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도구를 창조했어요.
한글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 평가받고 있지요.
이는 단순한 문자 발명이 아니라,
언어적 상상력과 사회적 정의에 기반한
'생각'이 만든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글을 통한 지식과 정보의 민주화라는
거대한 사상적 혁신이었기 때문이지요.
세종의 이 혁신적인 '생각'은
중국 문자인 한자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만의 언어와 사고체계를 갖게 됨으로써,
문화적 자립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생각은
단지 선언적 문장이 아니라,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남북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노예 해방이라는 도덕적 신념을 잃지 않고,
1863년 노예 해방 선언을 통해,
수백만 명의 흑인 노예에게 자유를 선포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향한 깊은 믿음에서
비롯된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노예로 삼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권리가 될 수 없다.”
링컨은 평등이라는 '생각'을
법과 사회 시스템 속에 실현하기 위해 싸웠고,
그 결과 미국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재정립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신념은 1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이어져,
“I have a dream.”이라는
또 다른 자유의 울림으로
세상에 되살아났습니다.
이처럼, 하나의 ‘생각’이
세대를 넘어
정의와 인권의 물결을 만듭니다.
그의 평등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인권 운동의 근간으로 남아 있으며,
민주주의의 본질을 다시 쓰게 만들었습니다.
19세기 후반, 유럽 화단에서는
사실주의 화풍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당시 화가들은 가능한 한 사물을 ‘정확하게 그리는 것’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겼죠.
그러나 클로드 모네는 달랐습니다.
그는 세상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빛과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인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네는 정확한 형태보다,
빛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찰나의 '느낌'을 그리려 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인상, 해돋이 (Impression, Soleil Levant)》는
안개 낀 항구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몇 개의 붓질로만 간결하게 표현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당시 미술계에서 혹평을 받으며
“이건 단지 하나의 인상(impression) 일뿐이다”라는 비아냥을 받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인상주의(Impressionism)라는
새로운 예술 사조의 시작이 되었죠.
모네의 파격적인 생각은
기존의 미술 규범을 깨뜨렸고,
이후 세잔, 고흐, 마티스, 피카소에 이르는
표현주의, 야수파, 추상미술의 문을 여는
현대 미술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모네는 단순히 새로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그린다 “라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세상에 외쳤고,
그 생각은 예술의 표현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모네의 남다른 시선과 생각은,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감각과 직관이
얼마나 위대한 변화를 이끌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전기차 테슬라,
민간 우주기업 스페이스 X,
인공지능 연구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까지,
일론 머스크의 행보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혁신적 사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기존 산업의 틀을 깨고,
전 지구적 문제(에너지, 환경, 우주 이주)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아이디어는
단지 상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현을 향한 집념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의 사고는
단순히 기술을 응용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는 기존의 세상 위에
무언가를 덧붙이는 사람이 아니라,
문명의 설계도를
처음부터 다시 그리려는 상상력으로
세상에 도전해 왔습니다.
전기차, 우주항공, 인공지능,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등,
그가 선택한 분야들은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향한
집념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도전은,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출발점은,
어린 시절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머스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성장하며
심각한 따돌림과 학교 폭력,
그리고 아버지와의 감정적인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친구들에게 구타당해 계단에서 밀려
병원에 실려 간 기억은,
그의 내면 깊숙이
세상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새겨 넣었습니다.
현실에서 위로받지 못했던 그는
책 속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하루 10시간 이상 독서에 몰입하며,
아이작 아시모프의 과학소설, J.R.R. 톨킨의 세계관,
그리고 우주적 윤리의식을 담은 서사 속에서
세상을 구하려는 주인공들의
도덕성과 사명감에 감동받았습니다.
그에게 책은 단순한 탈출구가 아닌,
도덕적 자각과 가능성에 대한 훈련장이었던 거죠.
그의 상상력은
단지 허구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서 그는 ‘책임’이라는
삶의 지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깊은 몰입은 단순한 집중력이 아니었습니다.
2021년, 머스크는 미국 SNL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저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첫 SNL 진행자입니다."
— Saturday Night Live, 2021.05.08
아스퍼거 증후군, 즉 신경 다름(Neurodivergence)은
그에게 감정 표현의 어려움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한 가지 주제에 깊이 몰입하고,
자신만의 논리와 직관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인지적 특성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머스크는 세상의 기준보다
자신의 질문에 더 충실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묻습니다.
“가능할까?”대신에,
“왜 안 되지?”라고..
많은 사람들은 전기차를 비현실적이라 말했습니다.
로켓을 재활용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머스크는,
‘불가능’은 현실의 벽이 아니라,
'상상력의 한계'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기존의 틀에 갇히기보다는
그 틀을 만든 전제를 의심했고,
기술이 아니라,
열려있는 생각의 틀과 질문하는 용기로
혁신을 이끌어냈습니다.
머스크의 생각은 기술 너머를 향합니다.
그는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고,
'문명의 방향'을 다시 그리는 사람입니다.
그의 상상력은 고통에서 시작되었고,
그의 몰입은 신경 다름(아스퍼거증후군)에서 비롯되었으며,
그의 책임감은 책 속 영웅들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를 이해하려면,
그가 만든 '기술'보다
그가 던졌던 '질문'을 바라봐야 합니다.
“왜 안 되지?”
그 질문 하나가,
지금 인류의 미래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생각'을 통해
세상을 바꾼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생각’을 달리 한 것입니다.
그들은 기존의 틀 안에 갇히지 않고,
가능성의 세계를 향해
언제나 질문을 던졌던 것이죠.
세상을 바꾼 위대한 변화는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언제나
'왜?'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까?'
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실현할 용기’를 통해
결국 인류를 더 높은 단계로 이끌었습니다.
마치 한 알의 씨앗이 거대한 숲을 이루듯,
하나의 '생각'이라는 씨앗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이들과 같이
‘남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역사를 다시 쓰는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