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후식일담, 빼빼로
올해도 어김없이 빼빼로 데이는 돌아왔다. 날씨가 눈에 띄게 추워지고 옷이 조금씩 무거워질 무렵 이 가늘고 긴 과자는 자그마한 온기가 되어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닌다. 이맘때쯤 편의점이며 베이커리며 심지어 떡집까지도 가지각색의 빼빼로를 진열해 놓아, 거리마다 말 그대로 빼빼로 천지가 된다. 숫자 1과 모양이 비슷하다는 아재개그 같은 이유로 지정된 기념일만 아니었으면 평범한 과자로 남았을 빼빼로가, 11월 11일만큼은 매출 1위를 달성하는 효자 상품이 되다니 참으로 신통방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내게 빼빼로는 단지 11월 11일에만 반짝 머무는 과자는 아니었다. 소소하지만 특별한 기억을 많이 안겨준, 그리고 지금은 가히 내 삶의 일부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 과자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거쳐 온 빼빼로의 맛도 한 가지로만 정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의 빼빼로에는 검정 네임펜의 맛과, 씁쓸한 소주의 맛과, 칭다오 대형마트의 오색찬란한 맛까지 모두 스며들어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와 전혀 다른 동네로 와 중학교를 다니게 된 일은 어린 내게 적지 않은 긴장과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그 동네 초등학교를 나온 애들이 대부분이었던 나의 중학교에서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던 나는,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위화감과 괴리감, 따돌림과 갈등으로 순탄치 않은 첫 해를 보내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선명히 기억나는 몇 안 되는 따뜻한 기억들이 있는데, 빼빼로데이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다행히도 학년이 끝나갈 무렵에 모두 친해졌던 우리는, 빼빼로데이 때 모두가 모두에게 빼빼로를 선물하는 귀여운 이벤트를 열었다. 즉 내가 20개를 사서 20명에게 나눠주면, 나 역시 그 20명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또 마침 그 해 빼빼로데이부터 상자 겉면에 편지를 쓸 수 있도록 자그마한 공간이 생겼는데, 순수한 중학교 1학년이었던 우리는 빼빼로 상자 하나 하나마다 친구들의 이름을 네임펜으로 적어 넣으며 진심을 담은 귀여운 편지를 썼더랜다. 그 와중에 한 친구는 내게 사랑 고백의 편지를 써 주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11월 11일 하루 동안 정신없이 빼빼로를 주고받고, 가져온 것보다 두 배는 많을 법한 빼빼로 상자들을 집으로 들고 가며 그 빼빼로보다 훨씬 많은 양으로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친구들끼리 빼빼로를 교환하는 것도, 그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우정도 내겐 모두 처음이었다(물론 빼빼로 고백도 말이다). 그래서 그 무수한 빼빼로 박스들의 빠알간 색깔과, 그 위에 각양각색의 글씨체로 적힌 내 이름들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것 아닐까.
그렇게 따뜻한 우정으로 성장한 나는 드디어 알코올의 따뜻함을 알게 되는 성인이 되었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내 몸의 소중함이나 위장을 보호한다는 개념 따위는 없이 되는 대로 술 먹으러 다니던 스무 살이었다.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그전까진 절대 용납하지 않던 ‘야식’을 내 삶에 들이기도 하고, 그러다 살이 찌는 게 싫어서 저녁도 굶고 안주도 안 먹고 오로지 술만 마시기도 하고, 그러다가 속 버리고 다음날 끙끙 앓기도 하던 나였다. 그런 나를 빼빼로가 구원했다는 건 조금 기묘하기까지 한 인연이다.
예컨대 술 마시기 전에 밥 먹으면 너무 배부를 것 같을 때, 그러나 허기는 질 때, 아몬드 빼빼로 한 통 먹고 바로 술을 마시면 양도 딱 맞고 속도 별로 안 상했다. 또 한창 술 마시다 취할 것 같을 때, 술집 옆 편의점에서 빼빼로를 사와 먹으면 신기하게도 술이 조금 깼다. 편의점 가는 김에 찬바람 쐬면서 한 번, 오도독 오도독 씹어 먹는 소리에 두 번, 그리고 나 먹을 때 친구들도 나눠주며 내 이상한 주사에 대해 한 소리 들으면서 세 번 술이 깬다. 그래 짐작했겠지만, 나의 주사는 빼빼로를 사먹는 것이다.
이건 천기누설인데, 사실 빼빼로는 아주 효과적인 숙취방지제이자 안주이자 숙취해소제이다. 초코우유, 고기 안주, 배즙 이런 거 다 필요 없다. 얇으니까 배도 안 부르고, 다른 안주에 비해 칼로리도 덜 나가고, 게다가 숙취에 좋다는 초콜렛도 (조금) 발려 있으니 아주 금상첨화 아닌가. 그러한 이유로 빼빼로는 신촌, 강남, 신림, 이태원 등 서울 방방곡곡의 술집에서 나와 함께하는 진정한 술친구가 되었다.
중국은 역시 중국이다. 범접할 수 없는 대륙의 힘이 빼빼로에도 깃들어 있다. 작년 여름 칭다오로 놀러간 이 빼빼로 덕후는 칭다오 까르푸(대형할인 체인점) 매장에서 빼빼로의 신세계를 접하게 된다.
빼빼로의 중국판이라 할 수 있는 pejoy이다. 정확히 말하면 누드 빼빼로에 가까우며, 일본의 빼빼로인 pocky를 중국어로 음차한 이름이라 추측해본다. 까르푸의 매대 하나가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통으로 pejoy 차지였다. 옆에 pocky도 빠지지 않고 여러 줄 진열되어 있었다. 가장 놀라운 건 맛의 무한한 다양성이었다. 우유, 녹차 무스, 레몬 타르트, 티라미수, 망고, 레드와인 초콜릿, 심지어 피자와 콘스프(…)까지 있었다.
그리고 역시 나는 빼빼로 덕후였다. 레어탬들을 향한 연정(戀情)에 불타올라 종류별로 하나씩 쓸어 담았다. 영수증에 찍힐 숫자가 잠시 두려워졌지만, 한국에선 절대 못 산다는 절박한 심정에 결국 되는 대로 집어오고야 말았다. 과자는 중국에서 먹거나 친구들 줘 버리고 대신 상자들을 고이 접어 모조리 한국으로 모셔왔다. 친구들의 한숨에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 레어 피규어들을 내 방에 전시해 놓을 생각에 그저 설레기만 했으니까.
지금까지도 이 희귀 빼빼로들은 내 옷장 한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잘 보면 우리나라 빼빼로의 희귀템도 있다. 귀여운 코리락쿠마 콜라보 디자인도 있고, '응팔'이 인기일 때 롯데에서 한정 판매한 88년도 버전도 붙어 있다. 볼 때마다 뿌듯함이 차오르는, 진정한 덕질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다.
참 역사도 깊고, 사연도 많다. 이 하잘 것 없는 천이백 원짜리 과자가 나의 취미이자 사랑이자 반짝이는 추억이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당신에게 빼빼로는 어떤 맛인가? 어떤 맛이든, 적어도 이 진부한 기념일의 상술적인 매매 행위보다는 더 맛있는 추억의 맛이기를, 감히 11월 11일에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