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기억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내 사업을 세팅하며 예전에 하던 일을 전생처럼 떠올린다.
분명 내가 했던 일이고, 내가 선택했던 삶인데, 지금의 나와는 조금 거리가 느껴진다. 그때의 나는 늘 바빴고, 늘 최선을 다했고, 겉으로 보기엔 꽤 잘 굴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 어딘가에 계속 바람이 들어왔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의 나는 구멍이 숭숭 뚫린 커다란 스펀지 위에 서 있는 기분으로 그 스펀지를 계속 만들며 일하고 있었다. 닥치는 대로 쳐내는 일상. 아무리 성과를 쌓아도, 아무리 다음 목표를 세워도, 그 아래로 빠져나가는 에너지가 너무 많았다. 불안이 새고, 의문이 새고, ‘이게 맞나?’라는 질문이 새었다. 계속 뭔가를 해내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선명하지 않았다.
요즘의 나는 다르다. 새로운 '내'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상할 정도로 속도를 늦추고 있다. 급하게 확장하지 않고, 쉽게 벌리지 않는다. 대신 하나씩 벽돌을 쌓는 기분으로 일하고 있다. 당장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손에 잡히는 감각이 분명하다. 이 벽돌 위에는 다음 벽돌을 올릴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다.
잘 돌아가는 하루들 사이에서,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은 내 모습과 다르게 마음 한편이 가라앉는 순간들이 있다. 특별히 불행하지도, 그렇다고 마냥 행복하지도 않은 상태. 그 애매한 지점에서 나는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오래 붙잡혔다.
이 책은 위로를 주지 않는다.
대신 아주 불편한 질문을 건넨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 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나는 그 문장에서 멈췄다. 행복해지기 위해 애써온 시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 편안해지려고, 덜 불안해지려고, 조금이라도 안정적인 상태에 도달하려고. 그런데 이 문장은 말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건 안락함이 아니라 긴장이라고. 정확히 말하면, 의미를 향한 긴장이라고.
빅터 프랭클은 인간을 고통에서 구해내려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을 의미 없는 상태에서 구해내려 한다.
의미를 치료의 중심에 두는 방식인 '로고테라피'. 그 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개념은 ‘누제닉 노이로제’였다. 마음의 병이 아니라, 의미의 결핍에서 오는 공허.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데도 삶이 비어 있는 느낌. 어쩌면 지금을 사는 많은 사람들의 상태와 닮아 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보게 됐다.
“지금 내가 힘든 이유는 정말 일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이 고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일까?”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문장을 읽으며 이상하게도 마음이 정리됐다. 나는 고통을 피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헛되게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 책의 가장 급진적인 메시지는 여기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다.』
삶은 이미 질문을 던지고 있고, 우리는 그 질문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방식은 단 하나,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태도뿐이라고.
이 대목에서 나는 오래 생각했다. 책임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조용하고 단단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나 싶었다. 무겁게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프랭클은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길이 세 가지라고 말하는데, 일, 경험과 사랑.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대하는 태도다. 나는 이 세 가지가 지금 내 삶에 모두 걸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일을 하고 있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고, 피할 수 없는 선택의 무게를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는 이유는, 아마도 이 모든 것을 ‘잘 해내야 할 과제’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은 얻으려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행복을 목표로 삼는 순간, 삶은 도망친다. 대신 의미를 향해 걸을 때, 행복은 부수적으로 따라온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조금 웃었다. 그동안 너무 정직하게 행복을 쫓아다녔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의 후반부에서 프랭클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하려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잘못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마치 지금의 내가 정말로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생에서의 실수, 과속, 과신, 불필요한 확장들을 이미 한 번 겪어본 사람처럼. 그래서 지금은 더디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구조를 선택하는 중이다.
나는 더 이상 삶을 크게 부풀리고 싶지 않다.
대신 단단하게 만들고 싶다.
스펀지가 아니라, 벽돌로.
이 문장은 경고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기회처럼 들린다.
아직 수정할 수 있다는 신호, 아직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
『가능성은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 바로 현실이 된다.
인생에서 정말로 무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잠재 가능성이다.』
나는 이 문장에서 오래 멈췄다. 가능성은 오래 품고 있다고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 선택되는 순간에만 의미가 된다. 이 책을 덮으며 하나는 분명해졌다. 삶은 나에게 친절하지 않을 수 있다. 상황은 쉽게 바뀌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태도만큼은 언제나 선택 가능하다는 것.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 문장은 명령이 아니라, 자유에 가깝다. 바꿀 수 없는 운명 앞에서도, 인간은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고 말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삶에게 “왜?”라고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이렇게 묻기로 했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답할 것인가.”
아마도 이 질문을 1분 1초씩 계속 붙잡고 살아가는 한, 삶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 삶과 내 브랜드의 결정 기준이 확고해졌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