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한 게 없네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퇴사 의지를 밝히고 인수인계를 할 때 그동안 무슨 일을 했냐는 질문에(이 질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음) '기획을 해서 일을 벌이고, 키우고, 실행'하며 그 과정에서 각 담당자들에게 맞는 일을 배분하고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어려운 건 해결하며 KPI에 도달하는 역할'이라고 했더니 '실제로 한 게 없구나'라는 회신이 돌아왔다. 그렇긴 했다. 주문을 받고 만들어서 배송 보내는 일련의 루틴으로 돌아가는 업무들은 이미 숙련된 직원들이 잘 해내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 주문을 만드는 기획을 했고 꽤 잘 해냈다고 생각했지만, 오너의 눈에는 '그럼 실제로 한 게 없네'로 비칠 수 있는 것이었다. 기획을 하지 않으면 나는 쓸모가 없는 역할이었던 거다. 내가 없어도 핵심 루틴에는 문제가 없으니까.
이 기획이 성공한다고 해서 당장 폭발적인 매출 증가가 있기보다는 브랜드 인지도라던지, 이미지 쇄신에 중점을 둔 기획들이었기 때문에 결과는 2~3년에 걸쳐서 나타나는 것이었고, 조금씩 변화들이 보이던 시기에 퇴사를 하게 되었다.
주변에 퇴사 소식을 전했을 때, '그럼 **는 누가 하냐', '**는 없어지는 건가', '**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가'라는 반응을 보며 오너보다는 고객들이 나를 더 인정해 주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퇴사가 맞는 건가? 내가 이뤄놓은 것이 있고 그것들이 이제 조금씩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데... 아까웠다. 이 회사를 설립하고 지켜온 내 10년 시간이. 10살 된 내 자식 같은 회사가. 하지만 나를 둘러싼 것들이 나의 이 애사심을 제외하고 나에게 너무나 건강하지 않은 것들이었기 때문에 앞을 상상해 보면 계속 내 애사심만 믿은 체 나를 갈아가며 소비할 게 분명했다.
그러다 '이걸 꼭 내가(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계속해야 하나? 다른 사람이 맡아서 하면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질문을 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불안보다, 두려움보다, 먼저 찾아온 감정은 시원함이었다.
마치 꽉 조여 있던 끈이 조금 느슨해진 느낌. 아직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알았다.
'아, 이건 놓아도 되는 거구나.'
그때 처음으로 ‘홀가분함’이라는 감정을 또렷하게 인식했다. 홀가분함은 도망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려놓는 선택을 도망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다.
'여기까지 해왔는데?'
'지금까지의 노력은?'
하지만 막상 하나씩 정리해 보니 이건 도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면 돌파에 가까웠다. 나를 붙잡고 있던 건 일이 아니라 ‘이걸 놓으면 나는 뭐가 되지?’라는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을 내려놓는 순간 신기하게도
정체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이룬 것을 던지는 용기'랄까.
내가 정말 두려웠던 건 실패가 아니었다. 이룬 것을 스스로 던지는 선택이었다. 사람들은 실패한 이야기는 쉽게 이해하지만 스스로 내려놓는 선택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왜?'
'아깝지 않아?'
'조금만 더 버텼으면…'
그 질문들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물었다.
'지금까지의 성취가 계속 앞으로의 나를 결정해도 되는가?'
그 질문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홀가분해지자, 선택이 달라졌다. 홀가분해지고 나서 삶의 결정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잘 보일까? → 내가 숨 쉬는가
유지할 수 있을까? → 계속하고 싶은가
손해 아닐까? → 나를 소모시키는가
기준이 바뀌니 속도가 붙었다. 고민이 줄었고, 설명도 줄었다. 무엇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맞는 선택 앞에서는 힘이 빠졌고, 틀린 선택 앞에서는 다시 무거워졌다. 이제 나는 그 감각을 신뢰한다. 새로운 시작은 늘 가볍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 우리는 늘 두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두려움보다 더 강한 감정이 있다. 가벼움. 지킬 게 없을 때의 가벼움. 증명할 필요가 없을 때의 솔직함. 나는 다시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실패해도 괜찮다”는 감각을 얻었다. 아니, 오히려 실패라는 것을 전혀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당장 급여가 나오지 않는 상황인데도 지금 벌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컸고, 만약 잘 되지 않아도 나 하나만 책임지면 되는 상황이니, 직원 20명이 있을 때랑은 완전히 달랐다. 가벼운 실패를 반복하며 가볍게 털어내고 있다.
새로운 선택 기준이 생겼다.
1. 나를 키우는가, 유지하는가
2. 내 이름으로 남는가
3. 에너지 순환이 되는가
4. 지금 이걸 안 하면 6개월 뒤 후회할까
5. 남이 보기 좋은 선택인가 내가 편한 선택인가
6.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3개 이상 '아니다'라면 정리한다.
결정으로 이루어진 삶이 다시 내 것이 되는 순간 이제 나는 안다. 삶이 내 것이 아닌 순간은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있을 때라는 걸. 성취는 나를 위로해 주었지만 홀가분함은 나를 앞으로 움직이게 했다.
최고의 감정은 홀가분함이다. 이룬 것을 던질 수 있는 용기, 새로운 시작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 그때 비로소 삶은 남의 기대가 아니라 내 감각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아주 오랜만에 내 인생을 내 손에 쥐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