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도 설거지가 필요하지 않을까

쓰이고, 더러워지고, 다시 쓰인다

by 리블럼

집안일 중 싫은 거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단연 설거지.

정확히 말하면, 설거지가 가진 끝없는 반복이 싫었다. '돌(아서면) 밥, 돌(아서면) 밥'처럼.


밥을 먹는다. 그릇이 쌓인다. 씻는다. 다시 쌓인다. 또 씻는다.

이건 어쩐지 아무 의미도 남기지 않는 노동처럼 느껴졌다. 마치 어제의 일이 오늘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그래서 설거지를 할 때면 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끝이 없지.”


그런데 오늘 아침,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었다. 싱크대에 놓인 그릇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느낌이 들었다. 이 그릇들은 이미 한 번 선택된 것들이구나.


누군가가 찬장에서 꺼냈고 이 그릇에 음식을 담았고 식탁 위에 올렸고 그리고 쓰였다. 그릇은 제 역할을 한 것이다. 설거지는 그릇을 처리하는 일이 아니라 다음 쓰임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릇은 쓰이고 더러워지고 씻기고 다시 정리되고 그리고 또 쓰인다. 그 순간 이상하게 이런 생각이 이어졌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보통 “쓰인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쓰였다고 느끼면 왠지 손해 본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면 쓰인다는 건 어쩌면 필요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릇이 쓰이지 않으면 그건 그냥 찬장 속 물건일 뿐이다. 예쁜 접시라도 아무도 꺼내지 않으면 결국 장식품으로 남는다. 그릇의 존재 이유는 어쩌면 쓰이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문득 내 삶을 떠올렸다. 우리는 계속 쓰인다. 일에서 쓰이고 관계에서 쓰이고 가족을 위해 쓰이고

어떤 날은 나 자신을 위해서도 쓰인다. 그러다 보면 지치기도 한다. 마음이 탁해지는 날도 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종종 이걸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 이렇게 지쳤지.”

“왜 이렇게 힘들지.”


하지만 설거지를 하다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릇도 쓰이면 더러워진다. 그리고 그 더러움은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릇이 더러워졌다는 건 그릇이 제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설거지는 그 더러움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릇을 다시 회복시키는 일이다.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계속 쓰인다. 에너지를 쓰고 시간을 쓰고 마음을 쓰고 어떤 날은 나 자신까지 다 써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어쩌면 잠깐의 설거지 같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혼자 있는 시간.
조용히 숨 고르는 시간.
몸을 움직이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그 시간은 멈춤이 아니라 다시 쓰이기 위한 준비일지도 모른다. 설거지를 마치고 그릇들을 다시 정리해 놓았다. 깨끗해진 접시들이 찬장 안에 차곡차곡 놓여 있다. 이제 이 그릇들은 또 쓰일 것이다.


다시 꺼내지고 다시 음식을 담고 다시 더러워지고 다시 씻길 것이다.


그 순환 속에서 그릇은 자기의 역할을 다한다.


아마 사람도 비슷할 것이다.


우리는 쓰이고 지치고 회복하고 다시 쓰인다. 그래서 어쩌면 인생은 설거지를 반복하는 일과 조금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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