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사람이 이긴다]를 읽다가
한때 나는 ‘이기적이다’라는 말을 꽤 경계했다.
그 말에는 늘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자기만을 챙기며, 공동체를 무시하는 이미지가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그 단어와 거리를 두며 살았다. 조금 손해 보더라도, 조금 더 참더라도,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는 쪽을 선택했다.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 다정함의 끝에는 늘 내가 없었다는 사실을.
괜찮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었고, 이해한다는 말로 나의 불편함을 덮었다.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관계는 유지되었지만, 그 관계 속에서 나는 점점 말라갔다. 모두에게 다정한 대신, 나에게는 유난히 무심했다.
이기적이라는 평가가 두려웠다.
하지만 더 무서웠던 건, 나 자신을 잃어가는 감각이었다.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이해인 저]를 읽다 이 문장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나는 나를 지키는 중이다.”
그 문장은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문장이었다.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안으로 들이기 위해 필요한 선택들이었다. 모든 관계에 설명할 필요도, 모든 감정을 공유할 의무도 없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배웠다.
모두에게 다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했다. 관계를 정리하고, 거리를 두고, 더 이상 나를 소모시키는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마다 죄책감이 따라왔다. 하지만 그 죄책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랜만에 숨이 쉬어졌다.
나는 나를 위한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운동이었다.
운동은 늘 해야 할 일, 관리해야 할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운동은 나를 다그치는 수단이 아니라, 나를 회복시키는 방식이 되었다. 몸을 움직이는 동안 생각은 단순해졌고, 호흡이 돌아오자 마음도 중심을 찾았다. 땀이 흐르고 근육이 깨어날수록, 나는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운동을 했더니 활력이 생겼다.
그 활력은 체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판단이 또렷해졌고, 감정의 경계가 분명해졌다.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 알게 되었다. 나를 지키는 기준이 생겼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변화였다.
그제야 이해했다.
이기심은 결코 차가운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 '이기심은 나를 위한 다정함'이었다.
나를 돌보지 못한 상태에서는 누구도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단순한 진실. 내가 무너지지 않아야, 내 사람들도 지킬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나는 선택적으로 다정해지기로 했다. 모두에게가 아니라, 나와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게.
조금 이기적이어도 괜찮다.
그 선택은 결국 나와 내 사람들을 지키는 일이니까.
나는 더 이상 나를 희생하며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나를 소진시키는 친절보다, 오래갈 수 있는 건강한 거리감을 택한다. 나 하나 바로 서자, 삶의 균형도 함께 돌아왔다. 책임감 있는 이기심은 이탈이 아니라, 지속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오늘도 나는 나를 위한 시간을 낸다.
운동을 하고, 숨을 고르고, 나의 상태를 살핀다. 그 시간은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준비다. 나를 지키는 사람이 되는 일은 결코 이기적인 삶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성실한 삶에 가깝다.
조금 이기적이어도 괜찮다.
나는 지금, 나를 지키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