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소설
재단에서 일주일의 휴가를 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번 해의 주요 사업을 모두 끝낸 다음인 데다, 사무국장이 건강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는 60대였기 때문이다. 국장은 친구들의 결혼식이나 돌잔치보다 장례식장에 갈 일이 더 많아질 나이였다. 하지만 워낙 젊은 나이의 양이기에, 국장은 가볍게 받아들이며 휴가 신청서를 결재했다.
“쉬어, 쉬어. 푹 쉬어도 돼. 하 팀장, 그동안 너무 일만 했잖아. 근데, 어디가 많이 안 좋대? 그건 아니지?”
“일단은, 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뭐가 의심된대?”
“잘… 모르겠어요.”
“별일이야 있겠어? 조금 이상이 있어도 젊으니까 치료하면 될 거야. 검사 결과가 나오면 괜찮다는 연락이라도 주고.”
“알겠습니다.”
여전히 양은 국장에게 말할 시점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직은. 그래도 만약을 위해, 올해 진행한 모든 사업 내용을 정리해서 이 과장에게 메일로 보내 두었다. 11월에 있을 이사회 보고서를 왜 벌써부터 준비하느냐며 툴툴대는 이 과장을 위해, 양은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혹시, 모르니까요.”
평일을 기준으로 하는 일주일의 휴가에 2번의 주말을 더하면 10월 6일까지 쉴 수 있었다. 11일,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양은 생각했다.
이날,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밀린 설거지를 다할 때까지도 대양에게서는 전화가 없었다. 양은 책상에 앉아 동네 병원에서 받은 진료 의뢰서와 검사 결과지를 펼쳤다. 여러 수치가 기준보다 지나치게 높거나 낮았다.
영어로 된 각 수치의 의미를 모르더라도 몸 곳곳의 균형이 깨지고 어그러진 상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양은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 검색창에 ‘만성골수백혈병’을 친 다음, 의학 사전의 정의부터 읽기 시작했다.
만성골수백혈병(CML: chronic myeloid leukemia)은
혈액과 골수 즉 혈액세포가 만들어지는 뼈 내부의 해면 조직에 나타나는 암의 한 유형으로, 필라델피아 염색체(Ph)를 지닌 조혈모세포의 클론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되면서 골수 내에 미성숙한 골수구계 세포가 과도하게 증식하여 생기는 질환이다.
알 수 없는 의학 용어가 가득한, 원인에서 증상, 진단, 검사, 치료, 경과로 이어지는 긴 내용은 읽는 사람을 지치게 했다. 양은 좀 더 이해하기 쉬운 설명을 얻기 위해 검색 대상을 뉴스로 바꿨다. 그 결과 최근에 올라온 기사의 제목들만 보면, 만성골수백혈병 환자의 미래는 동네 의사의 말처럼 꽤 희망적이었다.
“표적 항암제의 눈부신 발전, 만성골수백혈병 치료에 새 빛을 비추다!”
“글리벡 개발, 만성골수백혈병 치료에 기념비적인 사건!”
“이젠 백혈병도 고혈압이나 당뇨병처럼 관리하며 살 수 있어요.”
양은 세 번째 뉴스를 클릭했다.
2001년 1세대 표적 치료제인 글리벡이 개발되면서 만성골수백혈병 환자들의 기대 수명은 크게 늘어났다. 글리벡 이전의 시대에 만성골수백혈병 환자는 골수 이식 외에는 치료가 어려웠고, 이식 후에도 생존율이 60% 정도에 머무는 난치성 질환이었다. 하지만 글리벡 도입 이후 만성골수백혈병 환자의 5년 생존율은 이식 없이 약 복용만으로도 85%라는 엄청난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결과는 다른 백혈병의 생존율에 비해 월등히 좋은 성적으로, 이제 백혈병도 고혈압이나 당뇨병처럼 먹는 약으로 관리하며 살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양이 열어 본 다른 기사들도 대부분 같았다. 만성골수백혈병의 치료법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환자의 생존율이 높아졌다며 들뜬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안에 숨은 진실, 구세주 같은 약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병에 걸린 사람 100명 중에 15명은 5년 안에 죽는다는 사실을 가리지는 못했다.
양이 85명 안에 꼭 들리란 확신은 어떤 기사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양이 5년을 다 채워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겨우 37살이었다. 양은 자신이 마흔까지도 못 살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건 당장 한 달 뒤에 죽는다는 말과는 또 다른 얘기였는데, 실제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는 채로 5년 이후의 삶은 계획조차 세우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갑작스레 불안이 밀려들었다. 양은 쫓기듯 대양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 나 지금 회식 중. 갑자기 오늘 저녁에 잡혀서 전화를 못했다.”
“아, 나중에 전화할까?”
“왜? 짧게 말해 보셔.”
“나, 대한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로 내일 아침 진료가 잡혔는데, 부모님께 말해야 할 거 같아서.”
“잠깐만, 나가서 받을게. 후, 결과를 보고 말씀드린다고 하지 않았나? 괜히 걱정하시지 않을까?”
“응… 그랬는데, 인터넷 뉴스를 찾아보니까 5년 생존율이 85퍼센트라고 나와. 내일 병원에서 보호자가 필요할 수도 있을 거 같아.”
“몇 퍼센트?”
“85퍼센트.”
“그려, 네가 많이 불안하면 그렇게 하셔. 미안한데, 나는 회사에 일이 너무 많아서 내일 같이 못 가겠다. 괜찮겠어?”
“응, 그럼. 오늘도 바쁜데 시간을 뺏어 미안하지, 내가.”
양은 조심히 들어가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서운해 하기에는, 대양이 매일같이 야근을 하며, 거의 모든 주말에도 회사에 나가 원형 탈모가 올 정도로 일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