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옳았다 11화

실화 소설

by 홍유진

그렇게 만난 세 사람은 암 병원에서 각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스스로와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특히 금희는 양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황달 수치가 이렇게 높다니… 그러고 보니 애 얼굴이 귤껍질처럼 노랗네. 손바닥도 그렇고. 며칠 전에도 봤는데, 엄마가 돼서 내가 왜 몰랐을까? 여기저기 자꾸 멍이 들어서 아프다고 했는데, 왜 이상하다고 생각을 안 했을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빠가 장담해! 무슨 방법이 있을 게다. 우리나라의 의술이 얼마나 발달했냐! 다른 나라의 의사들도 배우러 오는 수준이야. 못 고칠 리가 없다.”


“그냥… 혼자 오긴 불안해서 말씀드렸어요. 약만 먹으면 된다고 하니 저, 괜찮을 거예요.”


셋은 수납 창구에서 진료 의뢰서와 검사 결과지를 접수한 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4층까지 올라갔다. 4층 중앙에 자리한 혈액암센터는 널찍한 대기실의 오른쪽에 3명의 간호사가 앉은 안내대가 있고, 그 너머로 설명 간호사실, 의사의 이름이 붙은 2개의 진료실이 있었다. 양이 만날 안심해 교수의 방은 오른쪽이었다. 양은 진료실 문에 붙은 예약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과 시간을 확인하고 안내대로 가서 간호사에게 진료 카드를 냈다.


이제,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입구 쪽에 앉은 수상과 금희에게로 돌아가는 양의 눈에 대기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얼핏 봐서는 여느 동네 병원과 별로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풍경이었다.


긴 파마머리를 늘어뜨린 젊은 여자나 세련된 청바지를 입은 남자, 화려한 스카프를 두른 아줌마들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가까이 지나치며 뜯어보자, 구불구불한 머리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가발인 티가 났고,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청바지가 감추지 못하는 앙상한 몸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으며, 이마부터 목까지 머리 전체를 가린 스카프 아래로는 머리카락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겉이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웃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특히 의사를 만나고 나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하나같이 심각하거나 절망적인 한숨이 섞여 있었다.


“매년 10만 명 중에 한두 명이 이 병에 걸리고, 발병 초기라도 심한 빈혈이 있으면 일시적으로 입원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네?”


금희가 옆에 앉는 양에게 작은 책자를 건네며 흐린 미소를 지었다. 대한대학교 암 병원에서 만든 ‘만성골수백혈병’에 대한 안내서였다. 인터넷에서 찾은 의학 정보처럼 정의와 원인, 증상, 진단 및 검사, 치료 등의 순서로 되어 있었다. 여덟 쪽을 빽빽이 채운 글자 중 양의 머릿속에 들어온 내용은 원인과 증상에 관한 부분이었다.


만성골수백혈병의 원인을 밝히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예방법도 없습니다. 병의 원인이 되는 갑작스런 유전자 돌연변이는 정상인에게도 평생 몇 번 정도 생깁니다. 이 경우 대부분의 사람에서는 자가 면역 시스템에 의해 자연스럽게 없어지는데,

왜 어떤 사람에게서는 사라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남아서 만성골수백혈병을 일으키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환자의 5% 정도에서 강한 방사능에의 노출이 원인일 가능성이 있고, 부모에서 자녀에게 유전되는 부위와는 다른 염색체 위치에 있기 때문에 유전적인 요인은 없는 걸로 밝혀져 있습니다… 만성기를 지나 가속기, 급성기로 진행되며, 만성기에는 일반적으로 뚜렷한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이 진행됨에 따라 피로, 발한, 체중 감소, 빈혈, 비장 비대로 인한 소화 불량 및 좌측 갈비뼈의 통증이 나타나며… 원인을 알 수 없는 열이 계속 나는 경우, 예후가 안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이 안내서는 죽음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이때 간호사가 양의 이름을 불렀고, 거의 동시에 대양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마음이 쓰여서, 회사에 출근했다가 반차를 내고 왔어요.”


“그래, 아들. 잘 왔다. 아무렴, 동생의 일인데 와야지.”


네 사람이 함께 진료실로 들어서자, ‘안심해’라고 수놓인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심해는 양에 대한 진료 의뢰서와 검사 결과지가 뜬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었다. 평생 공부만 했을 법한 고운 손을 가진 중년의 남자 의사였다.


든든한 응원군처럼 뒤에 버티고 선 가족들 앞에서, 양은 등받이 없는 둥근 의자에 앉아 자신이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를 짧게 설명했다. 컴퓨터만 바라보며 말없이 이야기를 다 들은 의사는 양의 배를 직접 한 번 만져 보지도 않고, 선이 가늘어서 여린 느낌을 주는 말간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백혈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혈액 검사를 하고 다시 한 번 보지요.”


조금 전에 양의 이름을 불렀던 간호사가 다가와 말했다.


“나가 계시면, 안내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