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옳았다 16화

실화 소설

by 홍유진

격리 병동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양을 송두리째 떼어 놓았다.


두꺼운 비닐과 그 안의 하얀 면 커튼. 이중 차단막으로 둘러싸인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양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외면하려 애썼다. 금희와 수상은 대양과 저녁을 먹으러 가고 없었다. 이번에는 함께 가라며 양이 떠민 게 아니었다. 세 사람은, 양이 혼자 남는다는 사실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나란히 병실을 나섰다. 그들은 응급실에서의 3일에 지쳐 있었고, 그곳을 드디어 벗어났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은 그만큼 컸다. 그사이에 긴 머리를 뒤로 틀어 올린 간호사가 와서 양의 이름을 확인하더니 혈압과 체온을 쟀다. 다시, 열이 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혈압은 97에 55로 좀 낮긴 해도 괜찮으신데, 체온이 38.2도세요. 하양 님, 열이 나셔서, 혈액 배양 검사를 하셔야 될 것 같아요. 혹시 열이 나는 이유가, 몸속에 균이 있어서인지, 있으면 어떤 균인지를 알아보는 검사예요.”


양이 손목의 수도꼭지를 내밀자, 유치원 선생님처럼 다정한 말투의 간호사는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양 님, 이 검사를 위해서는, 왼쪽과 오른쪽 팔꿈치의 안쪽에서 주사기로 직접 피를 뽑아야 한답니다.”


3일 동안 온 팔이 만신창이가 된 양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 아파요. 흑, 아프다고요, 흐흑. 전 피가 너무 느려서 잘 멎지도 않아요, 두 팔에서 다 빼면 혼자서 지혈할 수도 없어요, 흐흐흑. 가족들이 올 때까지 조금만, 조금만 있다가 하면 안 될까요?”


“그럼, 얼마나 있다가 올까요? 30분? 1시간? 1시간이면 괜찮겠어요?”


어린 아이를 달래듯 다독이는 간호사에게 양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간호사는 정확히 1시간 만에 다시 왔다. 가족들이 곧 돌아오리란 기대에 양은 마냥 기다렸지만, 세 사람의 저녁 식사는 길어졌다.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기에 양은 더 버티지 않았다. 병원에선 의료진이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차라리 고분고분히 따르는 게 낫다는 사실을 양은 이제 알고 있었다.


간호사는 피를 뽑은 자리에 알코올 솜을 대고 반창고로 2번씩 단단하게 감아 지혈하기 쉽도록 최대한 고정시켜 주었다. 양은 제대로 힘이 안 들어가는 두 손을 서로 엇갈리게 해서 반대편 팔의 솜을 누르고서,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안간힘을 썼다.


양은 침대에 앉은 채로 두 눈을 감았다. 아까부터 거슬릴 정도로 윙윙거리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나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를 쉴 새 없이 내려보내는 장치가 천장에 달려 있었다. 주위가 커튼으로 막혀서인지, 소리는 비행기를 탔을 때처럼 컸다. 여긴 마치 이코노미석 같아. 가림막에 온통 에워싸여 겨우 몸 하나 누일 침대만이 온전히 자신의 공간임을 깨달으며, 양은 비행기의 3등석에 앉았을 때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2인실은 비즈니스석이고 1인실은 퍼스트 클래스겠지? 그러면서 양은 의사가 기장이고, 간호사는 승무원이며, 환자들을 태운 격리 병동 전체가 어딘가로 날아가는 비행기라는 상상에 빠져 들었다. 머릿속에서 양은 날개 쪽에 앉아 창 너머로 아스라이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똑똑.”


이때 현실을 일깨우듯 누군가 입으로 내는 소리가 났고, 양은 퍼뜩 눈을 뜨며 침대 위로 돌아왔다.


“똑똑.”


끝에서부터 커튼이 살짝 걷히더니, 파란 마스크를 쓴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심해와 함께 응급실로 양을 찾아왔던 젊은 의사였다. 그는 들어오면서 양의 뒤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양이 돌아보자, 침대 머리맡에 붙은 환자 정보가 보였다.


성별 : 여자
나이 : 만 31세
혈액형 : AB+
전담의 : 안심해
주치의 : 사원석


얼굴이 허연 의사는 친근하면서도 힘 있게 말했다.


“하양 씨죠? 저는 하양 씨의 치료를 함께할 주치의, 사원석입니다. 이 방의 주치의기도 합니다. 응급실에서 하양 씨를 보고 나서 그날 밤에 한숨도 못 잤어요. 저랑 나이가 같으시더군요. 꼭 내 친구가 아픈 것만 같아서 제가 괴로워하니까 교수님께서 이만큼 두꺼운, 영어로 된 책을 주셨습니다. 이번 기회에 백혈병에 대해서 공부 좀 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열심히 읽을 테니까, 뭐든지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제가 모르면 알아내서라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원석은, 심해가 줬다는 책의 두께를 설명하느라 위 아래로 크게 벌린 두 손을 그대로 멈춘 채로 웃었다. 마스크에 가려 입가는 안 보였지만, 양은 따스하다고 느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그러더니 원석은 대답할 틈도 없이 성큼성큼 다가가 자신의 두 손을 지혈 중인 양의 손 위에 올렸다. 건강한 성인 남자의 힘이 실린 손아귀는 수도꼭지가 박힌 양의 손목까지 사정없이 짓눌렀다. 양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원석의 낯선 친절에 위로를 받는 자신에게 조금 놀랐다.


“아, 이런! 아파요? 살살 누를까요?”


“저, 혼자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요? 좀 전에 여기 다녀온 간호사 말이, 혼자서는 지혈도 못한다고 엉엉 울었다던데? 그럼, 내가 가고 나서 울면 안돼요!”


장난스런 발걸음으로 돌아서는 원석의 뒷모습을 보며, 양은 작게 중얼거렸다.


“좀 이상해. 독특한 의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