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무렵, 수상이 양의 일기장과 책을 가져왔다. 양은 병원에 온 뒤로 못 쓴, 밀린 일기를 쓰려고 했으나 오른 손등에 꽂힌 수액용 주삿바늘 때문에 손이 저려서 포기했다.
6인실에 들어온 뒤로 온종일 커튼을 친 채로 지낸 탓에 이날도 금희는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앉아 양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양은 그런 금희의 걱정스런 눈동자가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애정 어린 눈길에 깃든 불안은 양으로 하여금 불행이 이미 바싹 다가와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오후 내내 양은 책 속으로 도망쳤다. 다행히, 달리 시선을 둘 곳을 못 찾던 금희가 어젯밤의 피로에 곯아떨어지면서 양은 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원석이 어제와는 달리 입으로 노크하지 않고 조용히 커튼을 젖혔을 때, 잠시 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득 달라진 공기를 깨달은 양이 고개를 들자, 열린 커튼 사이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서 있던 원석이 보였다. 원석은 양과 눈이 마주치자 친한 친구들끼리 인사하듯 반갑게 손을 흔들며 들어왔다. 당황한 양은 거리감을 두려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뭐해요?”
그렇게 물으면서 원석은 이미, 양의 무릎에 놓여 있던 책을 집어 들어 표지를 보고 있었다.
“팜 파탈(Femme Fatale)? 아, 이런! 누구를 페이털(fatal)하게 하려고 이런 책을 읽어요?”
“네? 아하!”
이번에는 양의 입꼬리도 살며시 올라갔다. 양은 보통 때의 자신처럼 자연스레 원석의 농담을 받았다.
“이거, 선생님이 생각하는, 그런 책이 아니에요. 굉! 장! 히! 인문학적인 책이거든요? 근데, 남자니까 좋아하실 수도 있겠네요. 꽤 야하거든요!”
“오호! 그래요?”
원석은 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만화 주인공처럼 눈을 마구 굴리면서 책장을 빠른 속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넘기며 열심히 훑어보는 척했다.
“이거, 별로 안 야한데요? 다음에 더 볼! 만! 한! 인문학 책을 읽으면 알려 주시죠.”
“아하, 기억할게요! 근데… 무슨 일이 있나요? 회진도 아닌데 오셔서요.”
“아, 이런. 아침에 중요한 말을 잊어서 왔습니다.”
“혹시, 제 결과가 안 좋은가요?”
이때 두 사람의 말소리에 깬 금희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원석은 금세 의사의 자세로 돌아가 금희와 예의 바르게 인사를 주고받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오, 결과는 아직. 비장 때문에요. 하양 씨의 비장이 엄청나게 커진 상태니까, 움직이거나 걸을 때 배가 어디에 안 부딪치게 조심하시란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비장…이 뭐예요? 저, 평생 처음 들어봐서요.”
“지라는 들어봤어요?”
“네.”
“비장이 지라예요. 쉽게 말하면, 세균을 잡은 백혈구나 오래된 적혈구 같이 불필요한 피를 처리하는 기관인데, 하양 씨는 병 때문에 비정상적인 피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비장이 그걸 다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 점점 커진 겁니다. CT 영상을 확인했는데, 내 평생 그렇게 큰 비장은 처음 봤어요! 거의 이만해요. 35센티미터 정도!”
원석은 장난스럽게 눈을 희번덕거리며 두 손을 자기 어깨너비만큼이나 벌렸다.
“비장 크기가 원래는 어떤데요?”
“정상인이면 주먹 크기 정도? 13센티미터 미만이에요. 위 뒤쪽에 있어서 손으로 배를 눌렀을 때 잘 안 만져지죠. 아, 이런! 하양 씨는 3배는 되는군요? 뱃속을 다 차지하니 다른 장기들이 엄청 비좁았겠는데요?”
“아… 혹시, 그래서 화장실에 자주 갈 수도 있나요? 맥주를 한 잔만 마셔도 화장실에 가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런데, 저만 들락날락하니 이상하긴 했어요. 저도 예전엔 안 그랬거든요.”
“맞아요. 비장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동안 안 아팠어요? 비장 쪽 갈비뼈가 다 휘었던데요? 뼈가 부러지기라도 했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비장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상태에서는 잘못해서 살짝 건들리기만 해도 바로 터질 수가 있어요! 터지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걸을 때도 이렇게 허리를 숙이고 두 팔을 몸에 바싹 붙이고 조심조심히 걸어 다녀야 됩니다! 알았죠?”
“네. 조심할게요.”
다 큰 남자가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처럼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 같은 자세를 흉내 내자, 틀림없이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양과 금희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원석은 달랐다. 환자를 인간적으로 대하는 의사였다.
“그럼, 어디 그 어마어마한 비장 좀 만져 봅시다!”
원석이 시키는 대로 양은 누워서 두 다리를 모으고 무릎을 반쯤 구부렸다. 원석이 양의 배로 오른팔을 뻗다가 손끝을 과장해서 부들부들 떨더니 얼른 거두었다.
“어휴, 터질까 무서워서 만질 수가 없어요. 다음에 봐야겠군요.”
그렇게 셋이 웃고 있는데, 양의 옆자리에서 원석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이고, 배야! 선생님, 저도 좀 봐 주세요! 거기만 계시지 마시고!”
원석은 금희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양에게는 올 때처럼 손을 흔들며 나갔다. 이번에는 양도 답하려고 무심코 손을 어깨쯤 올리다가 내리고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우리는 친구가 아니야. 원석은 의사고 양은 환자였다.
“재미있는 의사네?”
금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후 늦게 원석은 다시 왔다. 졸라덱스(Zoladex)’라는 주사를 놓기 위해서였다.
“혹시 암세포가 20퍼센트를 넘을 경우를 대비해서 이 주사를 놓으라고 교수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항암제가 암세포로 착각해서 공격하지 못하게 난소를 잠재우는 주삽니다. 항암제는 빨리 자라는 세포를 죽이는데, 난자와 머리카락이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난자가 크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아마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을 준비하는 거니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주삿바늘이 엄청 크네요?”
“이 주사는 바늘을 아랫배에 찔러 넣은 뒤 뱃속에서 피부 쪽으로 다시 한 번 찔러야 하거든요. 두 번을 찔러야 하니 길고, 도중에 바늘이 휘어지면 안 되니까 주사 중에 바늘이 제일 굵은 축일 겁니다. 무서운 비장을 건드릴까 겁나니 안전하게 오른쪽 아랫배에 맞읍시다. 잠깐만 참아요.”
주사를 맞고 1시간이 지나도 피가 안 멎고 계속 조금씩 거즈에 스며 나오자, 금희는 원석을 불렀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피가 너무 느리고 찐득찐득해서 그래요. 내일까진 멎을 겁니다.”
원석의 말에도 금희는 밤새 걱정하며 양의 배를 들여다봤지만, 양은 주사를 맞느라 긴장했던 몸이 풀리면서 화장실도 안 가고 푹 잤다. 피는 원석의 예측대로 새벽녘이 되자 거의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