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와 환자, 의료진들 모두가 바쁜 111병동이지만, 주말만큼은 나름의 평화가 감돌았다.
토요일이 되면 간병인들은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1박 2일의 휴식을 즐기러 병동을 떠났다. 심해와 원석을 빼면 다른 교수나 주치의의 회진도 없었고, 당직 의사와 간호사들 말고는 의료진도 대부분 자리를 비웠다.
병원이 나른한 잠으로 빠져드는 순간, 환자 옆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가족과 친척, 지인이었다. 면회를 금지하는 감시의 눈초리가 느슨해지는 날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보호자를 바꾼다는 핑계로 1명씩 번갈아 들어왔다. 나갈 사람과 들어올 사람의 교대가 곧바로 안 이뤄지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에 때로는 2명, 3명이서 환자 옆에 모여 앉아 그동안 못다 한 말과 그리움과 소식을 나눴다. 정다운 말소리가 도란도란 이어졌고, 죽이 잘 맞아 보이던 환자와 간병인이 서로에 대한 하소연을 보호자에게 몰래 늘어놓는 반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일요일이 다가오면 조금씩 말이 줄어들고, 남겨질 환자들은 더 외로워지는 오후가 찾아온다. 각자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주말의 방문자들은 다시 병원 밖의 일상으로, 환자들은 회진과 검사 결과에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현실로.
일요일 오후에 나온 혈액 검사 결과, 양의 백혈구 수치가 조금 올랐다.
백혈구는 처음에 대한대병원에 왔을 때의 16만대에서 3천대까지 떨어졌지만, 며칠째 주춤하더니 오늘은 조금이지만 높아졌다. 거의 0까지 없어져야 할 숫자가 오르다니! 양의 생리가 좀 덜한지 확인하러 온 원석에게 금희가 물었다.
“선생님, 백혈구 숫자가 5,350. 4,410. 3,920으로 사흘째 잘 떨어지다 오늘은 다시 4,010으로 올랐네요? 우리 애, 괜찮을까요? 항암 치료를 시작한 지 2주 정도 지나면 백혈구가 거의 0으로 떨어진다고 하셨는데, 아직 너무 멀어보여서요. 오늘이 12일째인데. 이러다 관해가 안 되는 건 아닌지….”
“어머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정도의 숫자 변화는 올랐다고 볼 수 없습니다. 4천대에 잠깐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관해가 되든 안 되든 항암 치료를 하면 보통 2주 뒤에 백혈구와 과립구가 0에 가깝게 떨어집니다. 백혈구는 0이 안 될 수가 있어도, 과립구는 반드시 0을 칩니다.”
“그러고 보니 과립구는 어제보다 내렸네요. 그래도 4일째 2천대예요. 아직 2,206인데 언제 떨어질지… 빨리 0이 돼야 할 텐데 초조하네요.”
“하아. 하양 씨도 마음이 급해요? 서두르지 말아요. 과립구가 0으로 떨어지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못 할 무시무시한 후폭풍이 불어닥칠 겁니다.”
“후폭풍…이요?”
“아, 이런! 미리 겁먹지는 말아요. 열이 펄펄 끓고 설사가 죽죽 나고 폐렴에 걸려서 가래가 그렁그렁하거나 등등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겠지만, 제가 옆에 있으니까요. 그럴 때 도와드리려고 의사인 제가 여기에 주치의로 있는 겁니다.”
“아하! 감사합니다. 매우 위로가 되네요. 하…하.”
후폭풍… 원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양은 감도 안 잡혔다. 병원에 갇혀 작은 숫자들에 울고 웃는 자신의 상황이 그저 서글펐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모든 환자들이 양과 같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양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원석이 나간 뒤, 양은 늦가을의 지는 햇살을 쐬기 위해 하얀 커튼을 걷고 침대 발치에 눈을 감고 앉았다. 화장실이 양의 침대 대부분을 가리기에 비스듬하게라도 햇빛이 들어오는 곳은 거기뿐이었다. 금희 역시 보호자 침대 발치에 앉아 양의 그림자를 품은 햇볕을 받으며 졸기 시작했다.
5호 영원희가 풋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딸인 천사랑은 보호자 침대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원희는 마음으로 딸을 다독거리고 투명 커튼 너머로 눈을 돌렸다. 처음에는 양의 침대 아래에 놓인 노란 좌욕기를, 잠시 뒤엔 검은 머리가 비죽비죽 돋는 양의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내 딸 같은 안쓰러움이 밀려들었다.
“거기, 젊은 아가씨는 어쩌다 여기에 왔누?”
이번에도 양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지난밤의 악몽을 걷어 내려 애쓰던 중이었고, 지난번에 들었던 5호의 혀 짧은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3호 아가, 자냐?”
“네? 저요?”
“응, 응. 아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냐? 여긴 아가가 올 곳이 못되는디.”
“그게….”
양의 목소리에 깨어난 금희가 얼른 대답했다.
“우리 애가 배가 좀 아프고 불편해서요, 동네 병원에 갔더니 암이 의심된다고 피 검사를 해 보잤다네요? 설마설마했는데, 백혈병이라고 큰 병원으로 가래서 오게 됐어요. 아주머니는 어떻게 여기에 오시게 되셨어요?”
“우리 엄마는 사진을 찍으셨어요. 아버지랑 같이 사진관을 하셨는데, 작년부터 가슴이 눌리면 아프고 자꾸 어지러워서 검사를 받았다가 급성골수백혈병 판정을 받으셨어요. 찾아보니 이 분야에서 반대로 교수님이 제일 유명하셔서 여기로 왔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