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소설
빈속을 달랠 겸, 배선실에서 마시는 믹스 커피 한 잔.
달콤한 설탕 맛이 입안에 진하게 퍼질 때면 금희는 답답하던 속이 탁 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배선실은 알토란 같은 정보의 마당이라는 점에서도 도움이 됐다. 111병동의 다양한 병실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온갖 뒷이야기가 돌기 때문이다.
“복도에 젊은 군인들이 병문안을 한가득 왔더라. 알아보니 군대에 갔다가 백혈병 판정을 받은 청년이 2인실에 있대.”
“엄마랑 아들이 동시에 암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있어. 엄마는 여동생이, 아들은 아버지가 돌본다는데 환자복을 입은 아들이 환자복을 입은 엄마의 휠체어를 밀고 가는 모습을 봤어. 마음이 짠하더라. 유전은 아니고, 아들이 먼저 희귀한 암에 걸렸고, 엄마는 나중에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더라.”
“승무원처럼 머리를 올려서 예쁜 간호사 있지? 그 간호사는 모든 환자들에게 그렇게 친절하다네? 그래서 별명이 나이팅게일이래.”
시간이 갈수록 금희의 관심은 양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모아졌다. 금희는 방앗간을 드나드는 참새처럼 부지런히 정보를 물어 날랐다. 소소하지만 쓸모 있는, 항암월드의 꿀팁이었다.
“아침으로 나오는 빵의 치즈가 굳으면 맛이 덜하잖아? 배달해 주길 기다리지 말고 보호자가 가서 복도에 세워진 밥차에서 직접 쟁반을 들고 오면 따끈따끈하게 먹을 수 있대.”
“속이 너무 울렁거려서 밥도 먹기 어려울 때는 식사 대신으로 뉴케어란 음료를 하나씩 마시면 좋대. 지하의 의료기 상사에 판다는데, 검은콩 맛, 딸기 맛에 커피 맛까지 다양하대. 마셔 볼래?”
“치료 중에는 생과일이나 야채를 못 먹으니까, 전자레인지를 이용해서 고구마나 토마토를 찌더라. 제대로 될까 했는데, 토마토는 속에서 김이 펄펄 나고 국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푹 익더라.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된대. 해 줄까?”
“항암 치료로 신장이 나빠지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네? 신장에 좋은 옥수수차를 끓여서 자주자주 많이 마시래. 배선실에서 다들 전기 포트 뚜껑을 열어 놓고 끓이더라. 그러면 끓는 시간이 지나도 전원이 안 꺼져서 20분 정도 팔팔 끓일 수가 있어. 자, 여기 있으니 오늘부터 틈날 때마다 마셔.”
보호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배선실의 전기 코드와 전자레인지 앞에 줄을 서서 옥수수차를 끓이고, 토마토를 익히고, 고기를 구웠다. 소중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느라 정작 자신의 생활을 돌보지는 못했다. 짧아도 한 달인 항암 치료 기간 동안 보호자는 환자 곁에 머물되 모든 식사는 바깥에서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간호사들은 복도에 놓인 환자용 냉장고를 가끔씩 열어 보고 안에 든 음식을 모조리 내다 버렸다.
원칙적으로는 맞았다. 냉장고 안의 음식은 환자들의 가글을 오염시키거나 벌레를 부를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집이 멀거나 환자와 보호자가 지방에서 올라온 경우, 환자 곁을 오래 비울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원칙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다.
식사도 샤워도 빨래도 힘든 이곳에서, 보호자들은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한 채 팔걸이도 없는 낮은 의자 겸 침대에 모로 누워 쪽잠을 잤다. 배선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따금 모여 배달 음식을 시키거나 밥을 해 먹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컵라면이나 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이렇게 항암월드에서는 보호자의 건강도 서서히 무너져 갔다.
금희나 수상은 그래도 사정이 나았다. 병원 근처에 양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어야 이틀 정도 머물 거라고 예상했던 서울 방문이 벌써 2주가 넘어가면서 갈아입을 속옷도, 겉옷도, 이불도 모두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양의 살림은 혼자인 삶에 맞춰져 있었다.
금희는 일단 양의 여름 이불을 가져와 겹겹이 덮으며 버텼다. 한 채뿐인 겨울 이불은 바람이 파고드는 옥탑방에서 지낼 수상에게 떠밀었다. 양을 두고 집에 가서 음식을 할 정신이 없었기에 병원 구내식당에서 수상과 함께 밥을 사 먹곤 했는데, 하루 3끼의 식사비도 차츰 만만치 않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배선실에서 얻은 정보로 금희는 6인실을 청소하는 정 여사에게 구내식당용 식권을 사기 시작했다. 정 여사에게는 한 달에 20장의 식권이 직원용으로 나왔다. 정 여사는 도시락을 싸다 먹으면서 10장 당 3만 원을 받고 식권을 팔았다.
“정 여사도 한 달에 6만 원을 벌고, 우리도 한 끼에 천 원씩 싸니 서로 이익이네.”
금희와 정 여사 모두 이 거래에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곧 금희는 정 여사의 단골이 됐다. 정 여사가 식권을 팔려고 하는 다른 청소 직원들을 금희에게 소개하면서, 이제 정 여사는 양의 자리를 특별히 더 깨끗이 정성들여 청소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양에게도 남는 장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