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소설
과연 캡슐 1알의 힘은 대단했다.
지혈제를 먹은 지 하루 만에 생리가 반으로 줄었다.
밤새 뒤척여 부스스한 양의 얼굴과 달리, 심해의 회진 결과도 여전히 양호했다. 이제는 소변 양도 안 재고 뭘 먹었는지 일일이 보고할 필요도 없어졌다. 한고비를 넘겨 긴장이 풀린 양은 오전 내내 밀린 잠에 빠졌고, 금희는 배선실과 수상이 있는 휴게실을 오갔다. 정보가 필요해서였다.
며칠 전부터 병원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지난 주말, 격리 병동이 자리한 본관 바로 앞에 파란 천막이 들어섰다.
병원장과의 대화를 요구하는 천막이었다.
일요일 밤부터는 총파업에 대한 5일 간의 노조원 투표도 그곳에서 시작됐다. 환자와 보호자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뚜렷한 움직임들을 보면서도 근거 없이 낙관했다.
“설마 정말로 파업에 들어갈까.”
“아픈 사람들을 볼모로 그럴 리가.”
“곧 대화로 해결되겠지.”
새로 부임한 병원장이 적자로 인한 비상 경영을 선언하며 자기 입맛에 안 맞는 직원들을 무더기로 해고하면서 벌어진 이 사태는, 병원장이 서울노동위원회의 조정안까지 거부하면서 더 거세졌다.
5년, 10년이 넘게 일하던 병원에서 하루아침에 내쫓긴다면 누군들 가만있겠는가. 그것도 가족들이 모인 추석 명절에,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라, 짐은 퀵으로 보냈다는 문자가 도착한다면.
화요일 새벽, 짧은 파마머리의 인턴 의사가 6인실에서 피를 뽑는 내내 침을 튀기면서 설명한 말은 누가 들어도 공감이 갔다.
“함복수 님, 실제론 적자가 아니라 흑자예요! 7백억이나 비자금을 쌓아 놨다고요! 회계 장부를 조작해서 적자로 만들어 놓곤 임금을 동결하고, 비용을 10퍼센트나 절감하라면서 의료 재료를 값싼 저질로 바꾸라고 압박하고, 환자들이 굳이 안 받아도 되는 검사도 일단 시키고 보라고 지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항의하는 직원들을 막 자르고 있어요! 정말로 돈이 없으면 어떻게 병원하곤 상관도 없는 호텔을 사들이고 수천억을 들여서 건물을 넓히느냐고요! 진짜로 적자가 심각하다면 그런 짓부터 그만둬야 하잖아요?”
“이연두 님, 의사 성과급제는 또 어떻고요! 예전에는 교수님들을 보면서, 나도 국립 병원 의사로서 양심에 따라 공공 의료를 실천하리라! 그런 자부심이 있었어요. 병원 안에서도 치료를 잘 하시는 교수님께서 존경을 받았죠. 국립 병원 의사를 실적으로 평가하다니, 이게 말이 되냐고요? 의사 성과급제가 시작되면서 병원이 싹 바뀌었어요! 이제는 무조건 환자 수와 수술 건수가 많은, 그래서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로 의사의 가치와 파워가 정해진다고요! 협력해서 치료해도 모자랄 판에 같은 과의 교수님끼리는 물론이고 과마다 실적 경쟁을 하느라 피가 터지게 싸워요. 돈이 되는 환자 수를 늘리려다 보니 진료 시간이 3분으로 짧아질 수밖에요. 그나마도 모니터로 검사 결과를 읽고 처방하다 보면 의사가 환자의 얼굴도 한 번 못 쳐다보고 내보내는 경우가 수두룩해요. 이게 말이 되냐고요! 그런데도 늘 진료 시간은 예정보다 지연돼서 30분, 1시간 정도 기다리는 건 일상이에요. 초진 환자는 선택 진료비의 100퍼센트가 의사의 호주머니로 들어가요. 그러니 초진 환자의 예약을 최대한으로 받죠. 그럼 그 피해를 누가 보겠어요? 고스란히 다른 환자들이 입는 거예요. 새벽같이 첫차 타고 지방에서 올라와 검사 받고 몇 시간씩 기다리시는 몸도 마음도 아픈 중증 환자들이요! 재진 환자들은 이미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불만이 있어도 다른 병원으로 쉽사리 옮기지도 못해요!”
“하양 님, 그뿐인 줄 아세요? 수술실은 어떻고요. 수술, 특히 야간이나 주말처럼 업무 시간 외에 하는 수술은 의사한테 떨어지는 돈이 더 많아요. 그러다 보니 교수 한 명이 환자 세 명의 수술을 동시에 하는 경우까지 있어요! 수술방 서너 개를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열어서 교수는 핵심적인 수술만 하고 수술방을 왔다 갔다 해요.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아세요? 그러다 수술이 잘못되거나 의사로 인해 감염이 될 수도 있어요! 말은 그럴듯하죠. 후배들이 직접 수술할 기회를 줘야 한다, 안 해 보면 어떻게 배우겠느냐. 하지만 환자나 가족들로서는 자기 가슴을 여는 사람이, 자기 머리를 꿰매는 사람이 내가 믿고 목숨을 맡긴 교수가 아니라 경험이 훨씬 적은 다른 의사들이라는 사실을 과연 알고나 있는 걸까요? 당연히 허락 따윈 안 받았으니, 다음 환자를 수술하는 동안 앞 환자가 깨어나면 왜 교수님이 없냐고 문제라도 일으킬까 봐 마취과에서 푹 재웁니다. 필요한 수술 시간보다 더 재우는 거예요. 무리하게 수술을 잡으니 회복실 앞에 수술한 환자 침대가 줄을 서는 건 당연하고, 새로운 수술 환자를 받으려고 아직 관찰이 필요한 수술 환자들을 피 주머니나 배액관이 달린 채 퇴원시키는 경우도 숱해요. 암 환자도 마찬가지예요. 다음 환자를 받아야 한다며 무리하게 퇴원시키고 나면 하루, 이틀 만에 그 환자가 다시 응급실로 실려 와요. 열이 펄펄 끓어서요. 이미 암 병동은 꽉 찼으니 면역력이 낮은 암 환자를 일반 병동으로 보낼 수밖에 없고요. 주말에는 응급 환자의 수술을 위한 최소한의 인력이 일하는데 주말에도 돈 버는 수술을 하다 보니 오히려 응급 환자가 닥치면 덜 급한 환자의 수술이 끝날 때까지 발만 동동거리며 기다리는 상황이라고요! 성과급제가 아니면 교수님들이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일하겠어요! 대한대병원에서 연봉이 2억을 넘는 의사들이 60퍼센트나 돼요. 병원 수입에서 의사들이 벌어들이는 선택 진료비 수익이 6백억이나 되고요. 이런 수준이면 국립 병원으로서 공공 의료를 하겠다는 대한대병원이 돈벌이 의료를 하는 일반 병원과 다른 게 뭐냐고요?”
“와… 진짜 열정적이시네요! 선생님을 국회로 보내드려야겠어요! 연설하게요.”
양의 말에 신이 난 인턴 의사는 오른 주먹을 머리 위로 힘껏 들어올리며 외쳤다.
“가자, 국회로!”
“…그럼 이번에 파업을 하면 선생님도 참여하시겠네요?”
“저야 당연히 함께하죠, 마음만. 이번 파업엔 의사들은 빠지거든요. 마음만 달려갑니다.”
“아, 네. 아쉬우시겠어요.”
“엄청요! 환자 분의 말씀대로 전 국회로 가서 1인 시위라도 해야겠어요. 가자, 국회로! 가자, 국회로!”
인턴 의사는 하늘을 찌를 듯이 오른 주먹을 치켜세우고 병실을 나갔다.
휴, 다행이야. 의사들은 파업을 안 해서.
양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아침부터는 6인실을 청소하는 정 여사와 박 여사도 ‘파업 지지, 비정규직 철폐!’라거나 ‘응답하라! 하산낙 병원장!’이 쓰인 종이를 등에 붙이고 다니기 시작했고, 들리는 말로는 노조원들의 파업 찬성표가 물밀듯 이어지고 있었다.
이날 오전에, 금희는 지하 1층 비상계단으로 허겁지겁 도망가는 한 남자를 보았다.
평소처럼 늦은 아침을 먹으러 수상과 구내식당에 가던 길이었다. 로비를 메우고 있던 노조원들이 몰려들자 양복을 빼입은 그 남자가 뒷걸음치며 거칠게 소리쳤다.
“문 닫아! 빨리 닫아!”
그러자 남자를 뒤따르던 흰 가운을 입은 나이든 의사들이 우르르 앞으로 나섰다.
“저놈들 막아! 병원장님을 지켜!”
얼굴이 번드르르한 그가 병원장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쉽게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왜 하필이면 지금, 이런 일이 생기나.”
“나라면 파업 때문에 손해를 볼 돈으로 노조의 요구를 들어 주겠네.”
금희와 수상은 걱정스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