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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진 Aug 25. 2021

웰컴 투 항암월드 25화

실화 소설

  이날 밤, 양은 지독한 악몽에 시달렸다.


  말기 판정을 받으면서부터 시작된 악몽은 잊을 만하면 찾아와 양을 괴롭혔다.


  처음에 양은 정글 속 버려진 정거장에 홀로 서서 오지 않을 열차를 기다렸다. 살짝만 움직이면 닿을 거리에서 뱀들이 온통 주위를 둘러싸고 혀를 날름거렸다. 큰 뱀, 작은 뱀, 징그러운 무늬가 있는 뱀부터 독이 있는 살모사까지. 온갖 종류의 뱀이란 뱀이 뒤엉켜 양을 노려봤다.


  어떤 날은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유리통에 갇혔다. 팔다리에 털이 숭숭한 축구공만 한 거미들이 바깥에 우글거렸다. 양의 키 높이를 살짝 넘긴 유리통의 위쪽은 덮개가 없어서 거미들이 유리를 타고 올라오면 양의 머리 위로 떨어질 판이었다. 거미들이 하나둘 다가와 유리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온몸에 돋는 소름의 감촉까지도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어제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양의 팔과 다리, 얼굴과 가슴, 온몸의 피부에서 검은 무당벌레가 돋았다. 금세 양은 온몸이 검은 벌레로 뒤덮인 거대한 벌레로 변신했다. 끔찍했다. 그렇게 그동안은 꿈에서 늘 옴짝달싹 못하던 양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그나마 처음으로, 움직일 수는 있었다.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손아귀에서 달아나는 신세였지만. 을씨년스러운 회색 시멘트 건물이 어둠 속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지하 몇 층 어딘가에서 양은 사람들의 비명을 들으며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이 건물 어딘가에 칼을 휘두르는 살인마가 있었다. 어디로 가도 검붉은 피로 물든 사람들이 신음을 하거나 무서운 모습으로 쓰러져 있고… 양은 건물 밖으로 나가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내 바깥으로 뛰쳐나왔을 때, 양은 4층 꼭대기까지 건물 앞면 전체를 덮으며 쌓여있는 시체 더미를 보았다. 사람들에게서 흘러내린 피가 끈적한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양이 도망가려면 발을 내딛어야 할 바로 그곳에. 스르륵, 다리에 힘이 빠지는 순간, 얼굴이 가려진 검은 옷의 남자가 나타나 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큰 칼을 양의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헉! 양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다.


  온몸은 언제나처럼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여기는 수용소야! 죽음이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곳.
 누가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죽음의 수용소.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떠올랐다.


  빅터는 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던 유대인이었다. 그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아우슈비츠에서는 사람들의 머리를 밀고 이름 대신 부를 번호를 팔뚝에 문신으로 새겼다. 그곳에서 죽음은 언제나 모두의 곁에 도사렸다.


  대학 시절, 빅터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 양은 인류의 비극으로 가슴 아프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의 일이라고 온전히 느끼지는 못했다. 거리감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던 그때의 양은 건강했고, 편안한 방에 앉아 안전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죽음이 매 순간 노리고 있다는 점에서, 양도 빅터와 같았다. 그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버텼더라? 기억이 흐릿했다. 버리지 않았다면 분명 옥탑방의 어딘가에 있을 거야. 빅터는 결국 살아남았지. 그 책을 찾아야 해. 양은 빅터를 생각하며 가까스로 꿈에서 벗어났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찬바람에 불현듯 온몸이 떨려 왔다. 축축해서 이대로는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땀에 전 환자복은 물론 속옷까지 갈아입어야 했다.


  하루에 5벌. 이즈음 양이 받을 수 있는 환자복의 최대치였다. 땀이 나기 시작하는 저녁부터 새벽까지 시간을 잘 나눠야지, 자칫하면 젖은 옷으로 다음날을 보내야 했다. 양은 이미 저녁에 1번을 갈아입었고 4번의 기회가 남아 있었다.


  침대 옆 탁자에는 잠들기 전에 금희가 미리 받아 온 환자복이 하나 놓여 있었다. 히크만 때문에 옷을 갈아입으려면 도움이 필요했다. 금희를 깨울지 말지 고민하며 양은 시간을 보기 위해 폰을 열었다.


  새벽 2시 14분. 몰랐는데, 어젯밤 12시가 다 된 시간에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세하였다.


  “이번에 퇴원하면 누나 고향으로 같이 여행 한번 다녀오자.”


  진심이라고 해도, 예의라고 해도, 연민이라고 해도… 세하의 말이 양을 뒤흔들어 꾹꾹 참았던 슬픔을 터트렸다.


  과연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 함께 그곳에 갈 수 있을까?


  눈물이 땀에 젖은 양의 얼굴을 적셨다.


  한참을 소리 없이 울고 나서 양은 세하 대신 이준호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준호가 양에 대해 세하에게 얼마나 자세히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1년 만에 보기로 했던 세하가 어떤 마음인지 모르기에 양은 조심스레 메시지를 썼다. 


  “준호야, 나 하양이야. 늦은 시간에 미안해. 아침에 이 메시지를 보면, 세하 좀 챙겨 줄래…?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어. 세하는 밝고 강한 사람이니까 흐트러짐 없이 자기 생활을 잘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가까이 알았던 사람이 갑자기 큰 병에 걸려서 아프다고 하면 마음이 안 좋을 수 있으니까, 걱정이 돼서… 가능하면 세하 옆에 자주 같이 있어 줘.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면… 너무 힘들어하지 않게… 세하를 잘 부탁해.”


  새벽 4시가 가까운 시간이었음에도 준호에게서 답이 와서 양은 놀랐다.


  “누나, 세하한테 누나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엄청 놀라고 슬펐어요. 세하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 있을게요. 세하는 아마… 괜찮을 거예요. 지금은 세하보다 누나를 걱정할 때인 것 같아요. 힘내세요!”


  “응, 고마워.”


  준호는 세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준호의 답을 거듭 읽을수록, 양에 대한 세하의 마음은 한때 알았던, 아꼈던, 좋아했던 사람에 대한 동정심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준호의 말이 맞았다. 양이야말로 말기 암 환자가 아닌가. 걱정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내가 오지랖이 넓었어. 세하는… 그래, 아마 괜찮을 거야. 절친인 준호가 그렇게 말하잖아.


  양은 금희를 깨워 차가워진 환자복과 속옷을 갈아입고 다시 침대에 웅크리고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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