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한 상자에 담긴 외교의 품격

노태우의 편지에서 이재명 외교를 생각하다

얼마 전, 미국 국무부 소속 냉전·핵정책 역사가 제임스 그레이엄 윌슨(James Graham Wilson)이 링크드인에 흥미로운 자료 하나를 올렸다. 1992년 6월, 노태우 대통령이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며 보낸 메시지였다.


노 대통령은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 증진”을 위한 부시의 “용기 있고 선견지명 있는 리더십”에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한국 배 한 상자를 선물하며, “사과처럼 자르고 포크로 드시면 됩니다”라는 다정한 설명도 덧붙였다. 그해 1월 청와대 만찬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이 배를 맛있게 먹은 모양이다.


노태우 편지 부시.jpg


작은 배 한 상자, 그러나 정성은 컸다. 외교가에선 이 아이디어가 당시 현홍주 주미대사의 손끝에서 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미담이 아니다.

외교의 본질은 자존심이 아닌 설득이며, 감정이 아닌 정성과 신뢰가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한 컷이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외교를 본격화하며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이끌었고, 연말에는 남북기본합의서에도 서명했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이를 지지하면서도, 김일성의 진정성이나 북한 핵 개발 가능성, 한미동맹 균열 등을 우려했다. 워싱턴 외교가에선 ‘속도 조절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현홍주 MBC.jpg


그때마다 노태우 정부의 외교 라인은 바삐 움직였다. 유엔대사를 거쳐 주미대사로 부임한 현홍주 대사는 미 정부 곳곳을 돌며, 논리와 신뢰로 정세를 풀어갔다. 배 한 상자와 함께 도착한 노태우의 친서도, 그 퍼즐의 일부였을 것이다.(윌슨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현 대사는 별도로 부시 대통령의 생일 사흘 전 추가로 생일 축하 서한을 보냈다.)

현홍주 대사 to Bush.jpg


그 시절 한국은 지금처럼 경제 강국도 아니었고, 소프트파워도 부족했다.

그러나 정성과 세심함으로 국익을 키워냈다.


요즘 한미 관계를 보면 그 시절의 ‘배 외교’가 오버랩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직설적 언행에 한국 내 진보 진영은 물론, 일부 보수 논객들까지 격하게 반응한다. 동맹에 대한 배려 없이 밀어붙이는 모양새에 불편함이 있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그 감정이 곧바로 실익으로 연결되면 좋으련만, 현실은 훨씬 더 엄중하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한미관계는 곳곳에서 삐걱거린다. 관리들이 미국의 예기치 못한 일정 변경을 설명하느라 애를 쓰는 모습이 이제 낯설지가 않다. 방위비 분담금과 관세 협상,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한 지지… 하나같이 섬세한 외교적 접근이 필요한 사안들이다.


특히 트럼프 시대의 ‘Radical’이라는 외교 환경 속에서는,

계산된 논리보다 진정성과 정서의 접점이 때로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생긴다. (감성을 자극하는 면에선 한국의 진보 진영이 훨씬 감각적이지만, ‘진정성’에 대한 신뢰는 워싱턴에서 여전히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트럼프 대통령에게 ‘배 한 상자’를 보낼 수는 없다.

그 역시 그것을 넙죽 받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런 '작고 섬세한 외교' 정신이 바로 '큰 외교'의 바탕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재명 정부가 노태우 정부의 외교 매뉴얼을 다시 꺼내 읽어보는 것도 시의적절하지 않을까?


외교는 늘 완벽하진 않았지만, 때로는 한 조각 배처럼 분명한 교훈을 남기기 때문이다.


노태우 편지 2.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깨어 있는 자의 축복